관동팔경 백미 '삼척 죽서루' 국보 됐다

이윤정 2023. 12. 2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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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의 백미로 평가받는 한국의 대표 누정 건축물인 '삼척 죽서루'가 국보가 됐다.

문화재청은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인 2건의 대형누각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를 국보로 지정했다고 28일 밝혔다.

'밀양 영남루'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라는 절에 있던 금벽루 혹은 소루, 죽루라 불리는 작은 누각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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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시기별 건축 특징 잘 보여줘
영남 대표 누각 '밀양 영남루' 국보 지정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관동팔경의 백미로 평가받는 한국의 대표 누정 건축물인 ‘삼척 죽서루’가 국보가 됐다.

문화재청은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인 2건의 대형누각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를 국보로 지정했다고 28일 밝혔다.

‘삼척 죽서루’(사진=문화재청).
‘삼척 죽서루’는 고려 명종(1171∼1197)대에 활동했던 김극기(1148∼1209)가 죽서루의 풍경을 시로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2세기에 창건됐다. 안축(1282~1348)과 정추(1333~1382) 등의 시를 통해 처음에는 ‘서루(西樓)’로 불리다가 14세기 후반에 들어서 ‘죽서루(竹西樓)’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수온(1410∼1481)의 ‘죽서루단청기’(1472), 허목(1595∼1682)의 ‘죽서루기’(1662) 등에서 ‘1403년 부사 김효손(1373∼1429)이 옛터에 새로 창건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됐다가 조선 전기에 재건된 이후 여러 차례 보수·증축된 기록이 잘 남아있다. 조선 후기 증축된 이후의 모습이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1403년 정면 5칸(측면 2칸)의 규모로 중창된 누정이었으나 1530년 남쪽 한 칸(측면 3칸)이 증축됐다. 1788년 북쪽 한 칸(측면 2칸)이 증축되면서 현재와 같은 팔작지붕 형태가 됐다. 조선 초기의 중앙 5칸과 조선 중기 이후 확장된 좌·우측 1칸은 기둥 배열, 가구의 짜임, 천장과 바닥면의 처리, 공포 및 세부 의장 등에서 각 시기별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죽서루의 절경을 표현한 정철의 ‘관동별곡’, 겸재 정선(1676∼1759)의 ‘관동명승첩’을 비롯해 김홍도, 강세황 등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시인, 묵객 등 다양한 계층이 죽서루를 소재로 수많은 시문, 가사와 그림 등을 남겼다. 더불어 주변 하천인 ‘오십천’(五十川)과 어우러지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밀양 영남루’(사진=문화재청).
‘밀양 영남루’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라는 절에 있던 금벽루 혹은 소루, 죽루라 불리는 작은 누각에서 시작됐다.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365년(공민왕 14)에 밀양군수 김주(1339∼1404)가 중창하고 영남루라고 칭한 것이 관영 누각으로서의 시작이다.

조선 초에 밀양부사 안질이 영남루를 중창하면서 영남루 서쪽 주변에 소루(小樓)를 건축했고, 1442년 경상도사 권기가 소루(召樓)로 명명했다. 그 후 부사 이충걸(1465∼1527)이 임경당(현 침류각)으로 개명했다.

연산군 때에는 밀양부사 김영추가 임경당 반대쪽인 영남루 동북쪽에 망호당(현 능파각)을 지으면서 빈객숙소로 이용했다. 임진왜란 때 객사와 함께 모든 부속 시설이 소실됐으나 1844년 이인재가 밀양부사로 재임할 당시 대루를 확장하면서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고, 관원들과 지방 빈객들을 접대하는 객사로 사용했다.

경사지를 이용해 건물을 적절히 배치한 영남루는 건물 자체의 조형미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은 다른 누정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면서 명사들이 수많은 시문을 남겨 조선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이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의 시판만이 남아 있다.

이윤정 (younsim2@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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