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기자의 사적인 부고] 이선균, 빛나는 별이었으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배우
한국에선 드물게 장르 구애 받지 않았던 배우
한때 '홍상수 월드'에 자기 영역 구축하기도
“이 줄이 맞아?”
수많은 한국인들이 웅성거리는 중에 울림 큰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2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배우 이선균이 영화 ‘기생충’의 동료 배우 이정은, 박명훈과 함께 서 있었다. 2020년 2월 7일 오후 미국 로스앤젤레스국제공항에서였다. 입국 수속을 밟는 한국인들이 북적대는 곳에서 ‘기생충’ 배우들을 마주하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이선균의 ‘동굴 목소리’는 이국 공항에서도 소음을 뚫고 귀에 당도할 만큼 개성 있었다.
‘배우 이선균’을 인지하게 된 것도 목소리였다. 그는 2000년부터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조ㆍ단역으로 활동했으나 ‘손님은 왕이다’(2006)를 보며 그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했다. 이선균은 이 영화에서 해결사 이장길을 연기했다. 주연보다 조연에 가까운 역할이었다. 상대를 협박하거나 폭력을 휘두를 때 그의 목소리가 좀 거슬렸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낯선 소리였다. 너무나 튀는 목소리라 조연이나 단역은 안 어울려 보였다. 목소리가 그의 연기 인생에 도약대가 될 수 있으면서도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그는 얼마 되지 않아 드라마 ‘하얀 거탑’과 ‘커피 프린스 1호점’(2007)으로 스타가 됐다. ‘꿀 성대’라는 수식과 목소리가 감미롭다는 평가와 함께.
20여년 스크린과 TV를 오가다
이선균의 출연작은 많다. 그처럼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20년 넘게 왕성하게 활동한 배우는 극히 드물다. 지금은 칸막이가 많이 사라졌으나 2000년대만 해도 스크린과 TV 사이에는 두껍고 높은 장벽이 있었다. 드라마는 영화보다 아래에 있다는 편견이 충무로에서 강했던 시절이다. 드라마로 성공한 배우가 영화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기도 했다. 한석규 정도만 그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든 배우라고 할까.
수많은 출연작 중에서 ‘파주’(2009)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박찬옥 감독이 연출한 영화다. 당시 영화 ‘미스 홍당무’(2008)로 주목 받았던 서우와 연기 호흡을 맞췄다. 처제와 야릇한 관계에 놓인 미스터리한 인물 김중식을 연기했다. 운동권 출신으로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중식의 모습을 냉기 가득 표현했다. 완성도가 빼어났으나 흥행이 그리 잘되지 않은 저예산 영화라 더 마음이 갔는지 모른다.
이선균은 쓰임새 많은 배우였다. 로맨스와 스릴러, 코미디 등 모든 장르를 소화해냈다. 부도덕한 경찰(영화 ‘끝까지 간다’와 ‘악질경찰’)을 연기하다가도 근엄하면서도 호기심 많은 임금(‘임금님의 사건수첩’)으로 변신했다.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만화가를 우스꽝스럽게 그리다가도(‘쩨쩨한 로맨스’) 갖은 권모술수로 선거판을 주도하는 책사의 면모를 진지하게 표현(‘킹메이커’)하기도 했다. ‘밤과 낮’(2008)과 ‘어떤 방문: 첩첩산중’(2009) ‘옥희의 영화’(2010)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우리 선희’(2013) 등 ‘홍상수 월드’에서도 한때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기도 했다. 영국 가디언의 유명 영화기자 피터 브래드쇼는 ‘이선균의 부재가 한국 영화 세계에 차가운 그림자를 드리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29일 썼다. 이선균이라는 다능의 사라짐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로맨스가 제격이었던 "한국의 휴 그랜트"
아마도 이선균에게 잘 어울리는 장르는 로맨스물일 것이다. 한 유명 영화인은 그를 “젊은 시절 휴 그랜트를 떠올리게 하는 배우”라고 평가했다. “로맨스물에 그처럼 잘 어울리는 배우는 한국에서 찾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동의한다. 이선균의 죽음에 많이 이들이 ‘나의 아저씨’(2018)를 호명하는 건 그의 로맨틱한 면모 때문이리라.
사석에서 그를 딱 한번 만났다. ‘파주’가 첫 상영된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 술자리에서였다. 그는 먼저 자리를 뜨면서 맑게 웃으며 “다음에 다시 보자”고 말했다. 인터뷰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여러 번 마주했다. 2020년 2월 9일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상 4관왕에 오른 후 봉준호 감독과 출연진이 현지에서 한국 기자들 앞에 나설 때도 그를 봤다. 그는 후배 최우식을 유난히 챙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잠’(비평가주간)과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트’(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로 올해 칸국제영화제에 찾았을 때도 그를 만났다. 그는 기자들에게 가끔 까칠하게 굴었다. 화면 밖 그는 다정함과 예민함 사이 어느 곳에 놓인 존재인 듯했다. 빛나는 별이었으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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