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오자 北 대화 공세로 돌변... 속내는 '적화통일'
북, 10·26 이후 정치 혼란 틈타 위장대화 공세
대화 재개 위한 실무접촉 중 무장공비 침투
5·17 비상계엄 확대 계기로 갈등 국면 전환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서울의 봄'(1979년 10·26 사건 이후 이듬해 5·17 비상계엄 선포 때까지 벌어진 민주화 운동 시기)이 도래하자, 북한은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적극적으로 대화를 제안하며 위장평화공세를 펼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결국 속내는 북한이 주장하던 '연방제 통일', 즉 적화통일이었다.
28일 통일부가 공개한 1,387쪽 분량의 남북대화 사료집(1979년 1월~1984년 12월)에는 1980년 2~8월 남북 총리 간 대화를 준비하기 위해 양측 실무대표단이 가진 10차례의 회의 기록이 담겼다. 내용의 상당 부분이 가려진 채로 공개됐으나, 대화를 요구하는 북한의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태도 변화의 기점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당시 신군부 세력을 이끌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향하자 '사회 혼란에 따른 북한의 남침 위기'를 이유로 비상계엄을 제주까지 확대한 사건이다. 이로써 신군부는 실질적으로 전권을 장악했으며, 이에 저항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짓밟으면서 '공포정치'의 막을 올렸다.
북한은 1980년 초부터 남북 대화를 위한 군불을 땠다. 1월 12일 우리 측으로 대화를 제의하는 12통의 편지를 보냈다. 이종욱 북한 정무원(1972~98년 존재했던 행정기관) 총리는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김일성의 오른팔'이었던 김일 부주석은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 김영삼 신민당 총재, 김대중·함석헌·윤보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민족연합 공동의장, 김수환 천주교중앙협의회장,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등 11명에게 편지를 보내 대화를 제의했다.
이종욱 총리는 신현확 총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나라의 주변 정세가 우리들로 하여금 외세를 배제하고 북과 남이 단합해 지체 없이 통일의 길을 열어 나가도록 거듭 경종을 울리는 엄혹한 시점에 처해있다"며 "대화가 다시 열린다면 폭넓은 정치협상회의와 당국자회담, 나아가 고위당국자회담도 성숙시켜나갈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후 단절된 대화를 남북 총리의 만남으로 재개하려는 움직임도 발 빠르게 진행됐다. 1980년 2월 6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에서 열린 1차 실무대표 접촉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열렸다. 북측 대표단은 "대동강물과 한강물이 서해에 가서는 합쳐서 같이 출렁출렁하는데, 우리 민족도 합쳐서 통일의 춤을 둥실둥실 추어야지요"라며 운을 뗐다. 이어 같은 달 19일 2차 회의부터는 북측 판문각과 남측 자유의집에서 번갈아 가며 만났다. 끊어졌던 남북직통전화를 개통하고, 남북 총리 대화를 판문점에서 개최키로 하는 등 주요 현안에서 눈에 띄는 진전을 보였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1일 열린 5차 접촉부터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회담 전 한강 하류 무장공비 침투사건(3월 23일), 포항 간첩선 침투사건(25일), 김화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27일)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남북관계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북한의 전형적인 '화전양면전술'(앞에서는 평화를 얘기하면서 뒤로는 전쟁을 준비)이었던 셈이다. 기대에 부풀었던 국내 여론도 차갑게 식었다. 당시 한국일보는 3월 27일 자 사설을 통해 "변동기를 정리 중인 우리 내부를 위협하며 교란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면 이 같은 도발적 공세는 펼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고, 서울신문은 "비수를 들이대는 자들과 무슨 대화냐"며 총리 회담을 그만두라고 촉구했다.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닷새 뒤에 열린 8차 회담부터 북한의 태도가 돌변했다. 언성이 높아지며 분위기도 험악해졌다. 북측 대표단은 5·17 비상계엄 확대를 언급하며 "귀측은 우리를 걸고 남조선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천수백여 명의 청년학생들과 정치인을 체포 구금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폭압조치를 취했다"며 "우리 인민군대가 남조선에 가서 학생들을 탄압하고 총으로 찌릅니까?"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에 우리 측은 '내정간섭'이라며 맞섰다. 결국 북측 대표가 불참한 9·10차 회의는 우리 측 정치 상황에 대한 공방과 신현확 총리가 바뀐 것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공전했다. 북측은 11차 접촉을 이틀 앞두고 일방적으로 중단을 통보하며 반년간 진행해 온 총리 간 만남은 물거품이 됐다.
북한은 이어 10월 노동당 6차 대회, 11월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등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방안'을 주장했다. 김일성 주석 등이 주장해 온 연방제 통일은 북한의 적화통일이나 마찬가지다. 남한이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틈을 타 남북대화와 간첩 침투를 병행하며 우리 내부 여론과 기강을 흔들었던 셈이다.
김경준 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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