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살에 ‘출생신고’…저는 98살 남파 공작원의 딸입니다

고경태 2023. 12. 2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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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자백’ 공작원 엄주분 딸 박예춘의 삶
할머니 딸로 입적…친모를 “엄 권사” 불러
“재심 중 별세하면 딸 인정받아야 재판 계속”
8월14일 안양의 한 요양원 면회실에서 휠체어를 타고 인터뷰 중인 엄주분씨의 옷매무새를 딸 박예춘(왼쪽)씨가 만져주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엄마’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이다.

박예춘(75)씨는 1959년 겨울의 어느 날, 서울 서대문형무소 면회실에서 엄마를 처음 제대로 만났다. 도망가고 싶을 만큼 어색했던 그날의 공기를 잊을 수 없다. 엄마는 11살이 된 딸을 안아줬으나, 전혀 편하지 않았다. 핏줄이 당긴다는 말은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엄마는 “아버지 소식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알 리 없었다. 울어야 할 것 같은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공작원이 된 얄미운 엄마, 부끄럽지는 않다”

어머니는 월북했고 아버지는 입산했다. 1950년 9월의 일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이 들어오고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두살배기 박예춘은 홀로 남았다. 사회주의자였던 부모는 제각기 떠났다. 북한의 강동정치학원 교관을 지냈던 아버지 박천평(1923년생)은 남에서 빨치산의 길을 선택했다. 한국전쟁 직전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징역살이를 했던 어머니 엄주분은 공작원이 되기 위해 북으로 향했다. 이후 행방불명이 된 부모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할머니 이복례(1900년대 초반생)와 삼촌 박지훈(1927년생)에게 맡겨진 박예춘은 할머니의 딸로 입적됐다.

그로부터 73년이 지난 2023년 12월, 100살을 앞둔 98살의 어머니 엄주분이 대법원에 재심을 신청한 일은 딸 박씨가 상상하지 못한 초현실적 사건이었다. 본인이 실제 공작원임을 인정하면서 재심을 청구한 첫 사례다.

어머니는 1957년 공작원으로 남파돼 1년 뒤인 1958년 검거됐고, 군 특무대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수사받은 끝에 구속돼 1962년 전향했으며, 서울형무소·전주형무소·대전교도소·대구교도소 등을 거쳐 1979년 가석방됐다. 재심의 취지는 “공작원인 건 맞지만 수사과정에서 고문 끝에 허위 자백을 했고, 하지도 않은 간첩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소송은 레드 콤플렉스를 최고조로 자극한다. ‘남파공작원이 감히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해?’ 상당수 한국인들은 무죄 사유를 이해하기까지 애를 먹는다. 새해 99살이 되는 어머니는 어떤 철벽 같은 선입견과 콤플렉스에 도전하는 셈이다.

12월13일 한겨레와 만난 박예춘씨. 고경태 기자

어머니의 재심 신청 이후 박예춘씨는 자신의 호적을 완전히 흔들고 있다. 70대 중반이 되어 출생신고조차 다시 해야 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박씨는 “낳아놓고 책임지지 않은 어머니가 얄밉지만 부끄럽지는 않다”고 말했다. 2023년이 저물어가는 지난 13일 경기 군포의 한 카페에서 박씨를 만나 최근의 사연과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엄마·어머니’가 어색한 딸은 엄주분씨를 ‘엄 권사’라고 불렀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 “사랑 충분히 받았다”

―1948년 1월 대전에서 태어나 부모와 다 함께 산 기간이 1년도 안 된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활동하느라고 바빴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는 날에도 새벽에 집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미역국을 끓이느라 불을 때고 있는데 나타나 딸이라고 하니까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 그놈의 아들아들.(웃음)”

―부모가 떠난 뒤 어디서 살았나.

“전북(현재는 충남) 금산 남일면 황풍리 할머니집에 맡겨졌는데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공주에 있는 외가로 피난 갔다. 외할아버지 부부가 어물전을 했다. 작은아버지도 함께 가서 일을 도와주며 지냈다. 명태 눈알 빼 먹던 게 생각난다. 거기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녔다. 1953년 전쟁이 끝난 뒤 다시 금산으로 왔다. 고등학생 때까지 금산에서 자랐다.”

―부모님 없는 어린 시절은 어땠나?

“행복했다. 할머니와 외할머니, 작은아버지, 외삼촌, 이모 등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 책임질 사람들은 다 떠났지만.(웃음) 전 세대들이 전쟁 속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는 보호받으면서 편안하게 산 거다. 특히 할머니가 정말 나를 ‘불면 날아갈까’ 하고 애지중지 길러주었다. 또 태봉재가 솟아있고 긴 냇물이 흐르는 금산의 자연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기쁨도 컸다. 이제 다 돌아가시고 엄 권사 한 명 남았다.”

―어머니 첫 면회를 195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했다. 이후에도 계속 교도소에서 어머니를 만났을 텐데.

“두번째는 대전교도소였다. 5·16이 난 뒤 1960년인가 1961년인가. 교도소장이 할머니를 부르면서 나까지 오라고 했다. 면회를 시켜주려고 한 게 아니라 나한테 따로 할 말이 있었던 거다. 교도소장은 ‘네가 엄마한테 간곡하게 전향하라는 편지를 쓰라’고 했다. 그때 엄 권사가 고문도 받고 하면서 감방 안에서 미친 사람처럼 막 소리 지르고 할 때다. 편지는 안 썼다. 그런 말 하는 교도소장이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금산여중 1학년 때다.”

1947년 3월12일 박천평과 엄주분의 결혼식. 결혼 당시 박천평은 충남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청년부장으로 일하고 있었고 엄주분은 결혼 후 충남도 남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조선부녀총동맹의 후신)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엄씨는 1948년 1월9일 딸 박예춘을 출산했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박예춘 제공

“감시당한다” 노이로제, 신앙으로 이겨나가

―이후에도 어머니가 20년 가까이 교도소에 있었다.

“어머니가 1962년 대전교도소에서 전향한 뒤 자주 갔던 것 같다. 교목과장하고도 친하게 지냈다. 교도소 정문 앞에 있는 사택에도 놀러가고 그랬는데, 교도소 갈 때마다 경비 서는 교도관들이 ‘울려고 내가 왔나’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놀려대 씩씩거렸다. 그때 다니던 학교가 미션스쿨이라 교도소에서 예배 볼 때 친구들과 찬양도 하고 그랬다. 교도소에 오는 선교사들 영향으로 대전에 있는 한 대학 보육학과에 입학해 1969년부터 유치원 교사 일을 했다. 결혼 앞두고는 남편 될 사람이랑 대구교도소에 인사하러 갔고, 1975년 5월 결혼할 때는 어머니가 간수들하고 함께 식장에 오기도 했다.”

―1979년 가석방 이후 어머니 생활은 어땠나.

“안양의 외삼촌 집에 계셨다. 외삼촌이 누나인 엄 권사를 많이 돌봐주셨다. 외삼촌은 대학 이후 내 생활도 책임져준 어른이다. 엄 권사는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것 같다면서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출소 직후 50대였는데 여러 회유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걸 점차 신앙으로 이겨나갔다. 교회 꽃밭 정리하고 화장실 청소하고. 외삼촌이 화내면서 ‘거기는 사람이 없냐, 노인네한테 화장실 청소시키냐’고 했는데, 엄 권사는 ‘사람들이 은혜받는다’고 그만두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다. 노인들 연극대회 하면 대본 쓰고 분장시키고 연습시키고 밤낮 안 가리고 했다. 십여년 전에 쓰러지신 것도 성경 암송대회 앞두고 밤을 새우다가 뇌의 핏줄이 터져서다. 다행히 그때 수술이 잘됐다. 90살 때까지는 그래도 걸어 다니셨다.”

―어머니가 세상에 나온 뒤 둘이서 이야기 많이 나눴나.

“전혀 아니다. 엄 권사가 뭐라고 해도 관심이 잘 안 갔다. 지나간 일이고, 안다고 해서 다시 되돌릴 수도 없고. 애정 표현도 잘 안 하신다. 철두철미한 분이시라 뭘 사 오라고 해서 마음에 안 들면 답답해한다. 그러면 나는 또 짜증을 내곤 했다. 내가 신앙을 갖지 않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해 하신다. 교회에 함께 나가드릴까도 했었는데 잘 안 되더라. 엄 권사는 나에게 ‘네가 건방져서 영성이 없다’고 하신다. 단 한 명의 가족에게도 전도를 못 해 분해 하셨다.”

올해 8월14일 본인이 기거 중인 경기도 안양의 한 요양원 면회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엄주분(98)씨.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아버지는 어머니가 얼마나 미웠을까

―1950년대 주요 형사사건을 연구 중인 김두식 교수(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와의 인연으로 재심하게 됐다. 어머니가 김 교수와 30여차례나 인터뷰를 했다.

“요양원 면회실에서 이야기 나눌 때 옆에서 졸면서 들었다.(웃음) 덕분에 모르던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됐다. 그동안 어머니가 말해도 듣지 않던 이야기를 이번에는 제대로 알게 됐다. 언제 북에 올라가고 남에 내려오고, 또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 시대가 엄혹했다는 건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는 게 없었다. 고문당한 사실도 들었지만, 영화에서나 보던 일들이 실제로 그렇게 잔혹하게 있었다는 것은 몰랐다. 역사 공부한 셈이다.”

―가장 뜻밖의 이야기가 뭔가.

“1950년 어머니가 북한에 가려고 할 때 아버지가 말렸다는 사실이다. 엄마가 뿌리치고 간 거다. 본인은 산에서 일하는 게 안 맞아서 갔다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얼마나 원망을 했을까. 그럼 결혼하지를 말든지. 소학교 때 선생님이 골라준 사람이니까 싫지는 않았는데, 결혼 뒤 일해야 해서 애 가질까 겁을 내다가 덜컥 나를 임신한 거다. 그럼 북한에 갔을 때 딴 남자를 만나서 살던가. 입장 바꿔 생각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죽을 각오하고 내려왔는데 어쩌다 남쪽에서 오래 살게 된 거다.”

공주관립여자사범학교(1944년 졸업) 시절. 뒷줄 맨 오른쪽이 엄주분. 박예춘 제공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

“엄 권사가 90년대에 손글씨로 남긴 글이 4편 있는데 그중에 ‘유년의 추억’이라는 글이 있다. 당신 어머니, 즉 나의 외할머니에게 고집 부리다가 매타작당하는 이야기다. 엄 권사가 어린 시절 누룽지를 먹고 있는 옆집 아이에게 좀 달라고 했더니 안 주는 거다. ‘난 어제 너한테 누룽지 줬는데 너는 왜 안 주냐’고 따지니까 돌아온 말이 ‘네가 준 거는 꽁보리밥 누룽지고 우리집 거는 콩이 들어있는 누룽지’라는 거였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그 집에 개떡을 주고 오니까 엄 권사가 ‘나한테 누룽지도 안 준 애 집에 떡을 준다고, 도로 받아오라’고 바락바락 대든 거다. 외할머니가 아무리 매질을 해도 잘못했다는 소리 절대 안 하고 철회도 안 했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옹고집을 낳았나’고 한탄했단다.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사람, 그게 바로 엄 권사다.”

꽁보리밥 누룽지와 콩 누룽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림책을 만든다고 들었다.

“2006년 안양의 천사유치원을 끝으로 30년의 유치원 교사 일을 마친 뒤 군포에서 여러 동아리 활동을 하며 지냈다. 요즘에는 그림책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군포 산본에 있는 이야기 그림책 창작동아리에서 활동한다. 5년 동안 약 4권의 책을 만들었다. 군포시의 전설을 갖고 유치원생들에게 동화처럼 들려주기 위해 만든 책이다. 1년에 한 번 전시회도 한다. 내년에는 어머니가 글로 쓴 ‘누룽지 매타작’ 이야기로 한 번 그림책을 만들어볼까 한다. 엄 권사의 고집과 됨됨이를 관통하는 이야기다. 그 밖에도 1945년 8월15일 부여 구룡국민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 해방 소식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면서 무슨 영문인지 찾아 나서는 ‘해방의 날’’이라는 글도 있는데, 이건 너무 어른 시절의 이야기라 어떨지는 모르겠다. 산본에서 함께 인문학 공부하는 사람들한테 읽어줬더니 재밌다고 하더라.” 

12월13일 경기 군포시 산본동 상상마을 갤러리홀에 전시된 본인의 그림책 이미지를 보고 있는 박예춘씨. 고경태 기자

―어머니에 대한 태도가 쿨하다. 주변에는 어떻게 이야기하나.

“내가 먼저 엄 권사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얼마 전 한겨레에 기사가 실렸을 때도 단톡방에 공유했다. 엄 권사가 자식을 낳아 책임지고 기르지는 않은 점은 얄미우나, 그래도 부끄러운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할머니가 저의 아버지이자 당신의 아들 박천평에 대해 하시던 말이 있다. 아버지가 늘 ’어머니, 좋은 세상 만들려고 하니까 기다리세요’라고 했다는 거다. 꼬박꼬박 그날을 기다리다 돌아가셨다. 나는 사상이나 이념에 관심 없지만 부모님이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사익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그 시대에 옳은 일을 한다고 여기고 투쟁했고, 결국 졌지만 말이다.”

―할머니는 남부군총사령관을 지낸 이현상의 누나이고, 아버지 박천평은 외조카다. 아버지의 입산 이후 행적은 모르는 건가?

“북에서 훈장을 줬다는 소식만 들었다. 그래서 돌아가셨다고 짐작하고 있다.” 

작은아버지 박지훈과 금산에서의 어린 시절. 박예춘 제공

보안대 끌려가 고문당한 작은아버지

―작은아버지가 아버지 역할을 해줬다고 들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친딸처럼 돌봐주셨다. 아버지 같은 존재다. 우리 아버지 영향으로 한국전쟁 전에 북한의 강동정치학원에 잠깐 다녀왔는데 그걸 숨기고 금산군 남일면 면사무소에서 일했다. 면서기로 시작했는데 1975년 면장이 될 즈음에 경쟁자한테 빨갱이로 몰렸다. 내가 그때 결혼 직후 임신 초기의 몸으로 작은아버지 집에 갔었는데, 가슴과 등이 채찍 자국으로 온통 시퍼랬던 걸 보았다. 보안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작은아버지의 형, 즉 우리 아버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된 적은 없으니까, 아버지와 내통하지 않았냐고 닦달을 당한 거다. 그래도 작은아버지는 지역에서 워낙 평판이 좋아 면장까지 하셨다. 3년 전 돌아가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뵈었다. 마지막 유언 비슷하게 하신 말씀이 ‘오래 사는 건 아무 의미 없다’였다.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재심 이후 호적이 복잡해졌다고 들었다.

“엄 권사가 재심을 준비할 때부터 변호인단이 호적 정리를 권했다. 현재 할머니의 딸로 돼 있는데, 어머니의 딸로 바로잡는 것이다. 재심하다 만약 엄 권사가 세상을 떠나면 내가 딸로 돼 있어야 재판을 계속 진행할 수 있다. 그래서 친생자 확인소송을 마쳤는데, 문제는 호적이 폐쇄된 거다. 국민연금공단에서 국민연금을 줄 수 없다고 연락이 왔다. 부모님이 혼인신고를 안 했으므로 나는 미혼모의 딸이 됐다. 엄 권사가 출생신고를 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내가 새 주민등록을 생성해야 한다. 도와주는 변호사들이 서울가정법원에 출생확인신청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엄 권사의 딸로 호적이 정리되면서 아버지 박천평과의 연은 끊어졌다. 아버지와의 친생자 확인소송도 해야 한다. 유전자 검사를 해서 아버지의 가까운 친척들과 대조를 해야 한다. 복잡해서 머리가 아프다.”

엄주분씨의 남편 박천평(오른쪽)의 선린상고 시절 모습. 남한 빨치산 조직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의 외조카인 박천평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충남도당과 함께 덕유산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예춘 제공

얄미운 엄마, 자식 된 도리로…

박예춘씨는 이제 어른들이 다 떠나고 엄 권사만 남았다고 말했다.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물론 시부모, 작은아버지 부부, 그리고 남편까지 세상을 떠났다. 군포에서 딸과 함께 사는 박씨는 “그동안 내가 엄청난 울타리 속에 살았음을 실감한다”고 했다.

어머니 엄 권사 역시 이제 딸밖에 없다. 박씨는 낳고 나서 신념에 눈이 멀어 멀리 떠났던 어머니에 대해 “얄밉다”는 표현을 많이 썼지만, ‘그래도 낳아주었으니까 돌봐드려야 한다는 도리’를 지킨다고 했다.

남파공작원 출신 엄주분씨의 재심신청서는 6일 대법원에 접수돼 현재 오경미 대법관이 주심으로 배정됐다. 주심 대법관의 사건 검토가 끝나는 대로 재심개시결정 심의를 13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할지 4명의 대법관만 참여하는 소부에서 할지 결정한다.

지난 6일 엄주분씨의 재심 신청 기사가 나갔을 때 한 포털에는 1000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그중 나름대로 설득력 있어 보이는 댓글은 이러했다. “술은 마셨는데 음주운전은 안 했다는 거냐?” 엄주분씨의 존재를 찾아냈던 김두식 교수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술을 마셔도 혈중알코올농도가 일정 수준 이상일 때만 음주운전이 된다. 그게 법이다. 간첩죄도 마찬가지다.”

김 교수는 “사실 엄주분씨는 간첩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적이 없다. 당시 간첩을 필요로 한 독재정권이 억지로 범죄사실과 공범을 조작했다는 게 이 사건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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