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공장 사장이 된 북한 여의사… “통일건배주를 만듭니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주성하 기자 2023. 12. 28. 11: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성희 하나도가 대표가 언론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남조선은 월급을 잘 줍니까?”

치료하던 환자의 딸이 자신에게 탈북을 권했을 때 김성희 씨가 했던 첫 질문이었다.
환자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석 달 뒤 한국에 도착한 뒤에도 김 씨는 한국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인천공항에서 조사기관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김 씨는 생각했다.

“이제 고문을 어떻게 견뎌야 하지? 제대군인 출신에 노동당원이고 의사까지 한 나는 악질 빨갱이라고 고문을 더 받을 수밖에 없겠구나.”

조사기간 내내 김 씨는 언제 고문장으로 끌려갈지 두려웠다. 밥을 먹을 때도 독약이 들어있진 않는지 걱정했다. 건강검진 받으러 간 날은 더욱 공포스러웠다. 주사약에 독약을 넣어 평생 고통 속에 살게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조사기관을 퇴소해 하나원을 갈 때도 ‘여긴 새로운 형태의 감옥인가’라고 생각했다. 하나원을 나올 땐 강원도 강릉으로 거주지를 정했다. 전쟁이 나면 얼른 배를 타고 바다로 탈출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조선에 도망가면 고문을 해 비밀을 뽑아낸 뒤 죽인다고 끝없이 주입했던 노동당의 세뇌는 그만큼 오래갔다.

그랬던 김 씨가 지금은 “한국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내가 만든 술을 더 많이 마시고 취하게 만들까”를 고민하는 주류회사 사장으로 변신했다. 고난과 역경을 헤쳐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다.

2023년 남북하나재단이 주관한 정착사례발표대회에서 자신이 걸어온 삶을 발표하고 있는 김성희 대표. 그는 이 대회에서 대상인 국회의장상을 수상했다.

● 김천 출신의 아버지

김 씨는 1974년 함경북도 두만강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신성분이 좋은 집안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북 김천이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북간도로 가서 콩 농사를 짓겠다고 가족을 끌고 떠나는 바람에 중국에서 컸다. 그러다 20대 중반인 1960년대 초반 ‘조선 사람은 조선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결심해 친구 3명과 함께 북한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북한에서 운전 관련 대학을 졸업하고, 김일성의 지시로 ‘농촌기계화운동’이 벌어질 때 농촌으로 자원해 진출했다. 그곳에서 토박이 여성을 만나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남조선 출생에 중국에서 성장한 아버지는 더는 출세하지 못했다. 북한에선 이런 사람들을 ‘동요계층’으로 구분하고 간부로 쓰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는 ‘동요’라는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뚜렷한 소신의 소유자였다. 누군가 “고향이 남쪽으로 돼 있으면 절대 출세할 수 없으니 고향을 중국으로 바꾸라”고 권고했지만, “내가 태어난 고향을 어찌 바꾸겠냐”며 경북 김천 출생임을 당당하게 여겼다. 아무리 높은 간부 앞에서도 부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살면서 자기보다 훨씬 못한 간부들의 지시를 받으며 인생이 꼬여가고, 자식들까지 자신 때문에 출세길이 막히자 점점 성격이 괴벽해지고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김 씨는 자라면서 아버지보다는 두 오빠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며 컸다. 아래 남동생까지 합쳐 6명이나 되는 식구의 생계는 어머니 몫이었다. 함북은 1980년대 말부터 배급을 제대로 주지 않은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산을 개간해 밭을 만든 뒤 거기서 농사를 지었다. 콩과 옥수수를 재배해 두부와 술, 엿을 만들어 팔았다. 두부를 만든 찌꺼기는 돼지를 먹여 키웠다. 버리는 것이 없었다.

김 씨는 어렸을 때부터 밭에 가서 돼지에게 먹일 세투리(씀바귀)를 뜯어 오는 일을 맡았다. 체육을 좋아해 학교에선 태권도와 농구 특기생(선수)으로 뛰었다.

하나도가 사무실의 벽면에는 김성희 씨가 지금까지 생산한 각종 술과 받은 상장들이 빼곡이 놓여 있다.

● “오빠, 나 대신 공부해”

김 씨는 1991년 군에 입대했다. 원래는 전문학교 추천을 받았지만, 가정형편을 생각하니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김 씨의 두 오빠는 출신성분을 바꾸려면 노동당에 입당을 해야 한다며 모두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갔다. 김 씨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그 해에 공교롭게 군에 갔던 맏오빠가 제대해 도 소재지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두 명의 대학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뻔히 아는 김 씨는 군 입대를 택했다.

군에 입대해 가던 중 도 소재지에 열차가 한동안 멎었다. 이때 맏오빠가 기차역으로 찾아왔다. 그가 열차에서 내렸을 때 오빠는 아무 말도 못했다. 둘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백만 마디의 말이 눈물을 타고 땅에 흘러내렸다.

열차가 떠날 때 오빠는 열차를 따라 한참을 달려오다가 자갈에 걸려 넘어졌다. 훗날 집에 와보니 오빠의 손바닥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그때 생긴 것이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오빠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험한 고생이 기다리는 군에 가서 청춘을 바치려 결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빠는 밤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열차에서 오빠가 넘어지는 모습을 봐야 했던 기억은 김 씨의 일생에서 가장 마음 아픈 순간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그 순간만 떠오르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다행인 점은 김 씨가 학교 때 체육 선수였던 점을 인정받아 군단 체육단에서 군 복무를 했다는 점이다. 그는 군단 태권도 선수 겸 농구 선수로 활약했다.

그가 군 복무를 했던 1991년부터 1999년 사이는 고난의 행군 기간이었다. 군단에서 영양실조 환자와 아사자가 무리로 발생할 때였다. 그러나 체육단은 허약에 걸리지 않을 정도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나마 밥은 주었다.

군단 대항 경기는 1년에 몇 차례씩 열렸다. 김 씨가 속한 농구팀은 군 복무하던 8년 동안 4번 정도 우승을 했다. 최상위급의 농구팀이었던 것이다.

원래 여성은 군에서 5~6년만 복무하면 됐다. 하지만 1997년 김정일은 군 병력이 모자란다며 남성은 기존 10년에서 13년으로 군 복무 기간을 늘였다. 여성도 8년으로 늘었다.

김 씨는 17세에 입대해 만 25세를 꽉 채우고서야 제대증을 받았다. 군단 체육단에서의 활약이 인정돼 제대할 때 그는 3년제 의학전문학교 추천서를 받았고 내친 김에 입학까지 성공했다.

하나도가 제품 제조 현장에서 김 대표(오른쪽)가 박영금 회사 상무와 환하게 웃고 있다. 박 상무는 김 대표와 정착초기부터 15년 가까이 동거동락해 온 고향 동생이다.

● 술을 만드는 처녀의사

8년이나 공부를 하지 않던 김 씨가 전문학교 학업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출신성분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전을 졸업하면 준의사 자격을 받았다. 북한에선 준의사를 준의라고 하지만, 환자들은 의사 선생님이라고도 한다.

준의는 의사와 간호사 중간쯤에 위치한, 이를테면 보조 의사라고 볼 수 있는 직제다. 집집마다 찾아가 진료를 하는 왕진 의료 시스템을 표방하는 북한에선 의사들이 힘들어 모든 담당구역을 커버할 수가 없다. 그리 심하지 않은 병은 준의가 맡는다. 준의도 왕진을 다니고, 처방을 내줄 수 있다.

2002년 김 씨는 고향으로 가 병원 준의로 일했다. 그동안 두 오빠 모두 대학을 졸업해 자리를 잡았다. 대학 및 전문학교 입학률이 15~20%에 그치는 북한 실정에서 3남매가 모두 대학, 전문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병원에 가보니 약이 없었다. 의사가 하는 일은 진찰을 하고 처방을 떼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환자가 장마당에 가서 처방대로 중국제 약을 사고, 다시 병원에 오면 의사가 주사를 놔주었다.

병원에 입원실이 있긴 하지만, 입원하려면 환자가 먹을 것을 모두 집에서 가져와야 했다. 겨울엔 입원실 난로의 땔감도 보장해야 했다. 병원은 침상을 빌려주고, 관찰하고, 환자가 가져온 약을 주사하는 일만 했다.

의사라고 해도 배급도,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출근하지 않으면 처벌하니 어쩔 수 없이 출근은 해야 했다.

점점 의사들은 돈 많은 집 가정 의사처럼 변했다. 지금은 돈을 낼 수 있는 집에서 의사를 부르면 찾아가 진단을 내린 뒤, 의사가 직접 장마당에서 약을 구해 매일 찾아다니며 치료를 한다. 이 과정에 용하다는 소문이 나면 저마다 해당 의사를 찾게 된다. 그러면 의사 몸값도 높아져 잘 살 수가 있게 된다.

반면 의사를 부를 수 없는 가난한 집은 기존처럼 병원을 찾아 처방을 받는다. 병원에서 자리를 지키는 의사는 능력이 없어서 불려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2023년 현재의 북한 의료 제도의 실태다.

김 씨가 준의로 일했던 2008년까지는 의료 제도가 위처럼 변해가는 과도기적 단계였다. 아무리 열심히 치료해봐야 보상도 없으니 의사들은 왕진을 나가기 싫어했다. 점점 김 씨에게 왕진 부담이 전가되기 시작했다.

낮에는 의사로 왕진을 다니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야 했다. 김 씨는 명색이 의사였지만, 퇴근 뒤에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돼지를 먹일 뜨물을 걷어오는 것이 일과였다. 늦은 밤엔 단속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술을 빚었다.

하나도가에서 생산되는 각종 주류 브랜드.

● 고향에서 받은 충격들

의전을 졸업하고 고향에 온 그는 여러 번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 충격은 11년 만에 고향에 오니 가까운 친구들이 거의 다 사라진 것이다. 물어보니 중국에 시집갔다고 했다.

두 번째 충격은 위생검열을 가다가 길에서 본 여인들이었다. 북한 당국은 수십 명의 여성들에게 수갑을 채워 거리를 행진하게 했다. 중국에 갔다 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다. 노예처럼 끌려 다니는 여인들을 보며 그는 같은 여성으로서 참을 수 없는 수치와 분노 한편으로는 공포도 느꼈다.

세 번째는 왕진을 갔다가 본 북송 여인이었다.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산 미라가 누워있는 줄 알았다. 북송돼 전거리 수용소에서 1년을 복역하다가 죽기 직전 병보석으로 풀려났는데, 해골에 눈만 붙어있는 줄 알았다. 매일 가서 수액을 놔주었는데 한 달 뒤 또 한번 놀랐다. 미라가 여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옥수수죽에 된장국만 먹었는데도 놀랍게 달라졌다. 치료를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북한 보위부에서 고문받던 일, 전거리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차마 인간의 짓이라고 할 수 없는 학대들…. 특히 임신한 여성들은 배를 걷어차 어떻게 하든 유산하게 만든다는 말에 치를 떨었다. 전거리에 가면 1년을 버티기 어렵다고 한다.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치료를 끝내고 얼마쯤 있다가 그 여인은 다시 중국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김 씨는 2005년 31세에 결혼했다. 북한 여인들은 20대 중반에 결혼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늦은 나이였다. 남편은 제대군인이었고, 대학을 나왔는데 직업은 약초 관리사였다. 매일 병원을 찾아와 고백하는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이듬해 딸도 태어났다.

그러나 신혼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8년 3월 산에 갔던 남편은 도벌꾼들이 벤 나무에 깔렸다. 한국 같으면 목숨까지 잃지 않았겠지만, 산에서 업어 내려오고 달구지에 태워 병원에 오느라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숨을 거두었다.

졸지에 청상과부가 된 김 씨는 두 살이 된 딸을 안고 울었다. 더는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영국 BBC와의 언론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는 김성희 대표.

● 어린 딸을 위해 결행한 탈북

아무런 삶의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던 때 왕진을 다니던 집의 딸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선생님 함께 남조선에 가요”라고 제안했다. 딸의 여동생이 이미 한국에 가 있는데 어머니와 자기도 데려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아픈데 의사 선생님이랑 가면 치료도 해줄 수 있으니 좋잖아요. 여기에 무슨 미련이 더 있어요. 함께 가요.”

김 씨는 그들과 함께 떠나기로 결심했다. 김 씨는 의사 생활을 하면서 한국 드라마 같은 것은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남조선이 어떤 곳인지 알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남들이 다 그렇게 가려고 애쓰는 곳이니 당연히 북한보다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운명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린 딸은 나처럼 살지 않겠지.”

2008년 11월 김 씨는 두만강을 넘었다. 서울에 있는 환자의 딸이 브로커를 포섭하는 등 모든 준비를 했다.

두만강을 넘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고향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던 아버지처럼 나도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야겠구나. 과연 살아서 다시 고향에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를 땐 울컥 했지만 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너는 나처럼 살면 안돼.”

11월의 두만강 물은 몹시 차가웠고, 깊은 곳은 가슴까지 왔다. 두 살 남짓 딸을 목마 태우고 비틀거리며 강을 건널 때 아이가 울까봐 제일 걱정이 됐다. 건너는 지점의 경비대 초소는 돈으로 매수했지만, 아이가 울면 인근 초소에서 군인들이 달려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 딸도 위급한 순간임을 감지했는지 찬물에 잠겨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김 씨는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강을 건너니 서울 딸이 보낸 브로커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때부터 동남아 모 국가까진 불과 20일 만에 빠르게 이동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중국 대륙을 횡단하면서 김 씨는 “내가 지금까지 우물 안에 갇혀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중국은 정전되는 일도 없었고 어딜 가나 먹을 것이 풍부했다. 옷 사러 시장에 나가니 보지 못한 온갖 상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악어강’을 넘어 간 동남아 국가에서 3개월을 기다린 끝에 김 씨는 2009년 3월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와선 고문을 받을 걱정으로 잠을 설쳤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사기관에 들어갔을 때 “당연히 딸과 나는 따로 가두고 심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딸도 함께 지내게 했다.

“남조선은 고마운 일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지어주는 조사관들의 웃음이 거짓이 아닌 진심이었음을 그는 한국 사회에 나와서야 알았다.

강릉에서 만난 첫 신변보호 담당관은 여형사였는데, 사심없이 너무나 친절하게 잘 대해주었다. 여형사 덕분에 한국 사회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마음도 열게 됐다.

하나도가의 전통주는 최불암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한국인의 밥상’에도 나왔다.

● 충북 음성에 자리잡다

강릉에선 3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딸이 문제였다. 식당 보조로 첫 직업을 얻었는데 어린이집은 일찍 문을 닫았다. 아이를 데려와 식당 구석에 앉히고 일을 하면서 늘 마음이 내려가지 않았다.

이때 충북 음성에 사는 동생이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북한 한 동네에서 컸던 3살 어린 동생이었는데, 그가 고향에 왔을 때는 중국에 가서 없었다. 김 씨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 한 일행과 합세했는데, 거기서 동생을 만났다. 몇 년 동안 동생은 중국에서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살다가 뒤늦게 한국으로 떠난 것이다.

음성의 한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동생은 “우리 둘이 같이 살면 아이를 번갈아가며 볼 수 있으니 좋지 않냐”고 했고, 그 말에 김 씨는 선뜻 짐을 싸고 음성에 왔다. 공장에서 일하니 퇴근 시간이 있어 아이를 돌보긴 좋았다.

동생에겐 중국에 남겨둔 아들이 있었는데, 김 씨의 딸과 동갑이었다. 둘은 돈을 벌어 제일 먼저 아들을 데려왔다. 15평짜리 집에서 두 가족의 동거가 시작됐다. 나중에 김 씨가 집을 받아 분가하려 하니 이미 남매처럼 살던 아이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며 난리였다.

그래서 조금 더 큰 18평 아파트로 이사가 방 하나씩 쓰면서 공동주택처럼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13년 동안 이렇게 살고 있다. 아이들은 커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동생 아들은 서울의 한 대안학교에 입학했는데 얼마 전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한다. 딸이 이 소식을 듣자 이렇게 말했다.

“진짜 축하해. 여친한테서 머리털 뽑히지 않으려면 정말 잘해야 해.”
김 씨가 창업한 뒤 동생도 함께 옮겨왔다. 지금도 둘은 같은 회사에서 함께 회사를 키워가고 있다.

밭에서 일하고 있는 김성희 대표. 그는 직접 밭에서 재배한 천년초로 술을 생산하고 있다.

● “내가 술을 만들어 팔자”

음성에 와서 김 씨는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일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창업을 하겠다는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 주말마다 창업교육을 받으러 가서 많은 직업을 알아봤지만 음성이란 지역에서 토착민들과 경쟁해선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술 공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본 것이 술독이었고, 탈북하기 전까지 했던 것이 술을 만드는 일이었다. 탈북민들 중에 술을 만들어 성공한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보니 없었다.

“그래, 그럼 내가 술을 한번 만들어보자.”

하지만 결심에서 실행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선 술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보기 위해 술 공장에 취직하려 했지만 여직원을 받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김 씨는 집에 술독을 들여놓고 북에서 만들던 방식으로 계속 시험 제조를 해봤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술 빚는 방법은 김 씨의 집에서 3대째 내려오는 방식이었다.

김 씨의 외가는 나름 지역에서 오래 산 토착민이었다. 다른 북한 가정은 공장에서 만든 술로 제사를 했지만, 김 씨 외가는 제사술은 꼭 집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전통을 고수했다. 그 집에서 자란 어머니가 제사술을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았다. 엄마가 만든 술은 술맛이 좋기로 유명해 만들기만 하면 동네에서 부리나케 팔렸다. 그 방법을 김 씨가 배운 것이다. 술 공장으로 목표를 세운 김 씨는 차곡차곡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2016년 사이버대에 입학해 경영학을 전공했다. 술 공장을 만드려니 자격증들도 많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술을 만들려면 술 종류마다 자격증이 다 달랐다. 알코올이 나오게 발효하면 탁주, 탁주에서 앙금을 가라앉힌 맑은 술은 약주, 찌꺼기를 짜서 증류하면 증류주, 약주와 증류주를 섞으면 기타 주류에 속했는데 각각의 면허가 다 달랐다.

열심히 노력해 술 전문가를 찾긴 했지만 면허를 따려면 400만 원씩 달라고 했다. 4개를 따는데 1600만 원이 들었는데, 창업자금을 억척스럽게 모으던 김 씨에겐 여간 큰 돈이 아니었다.
이럴 바엔 내가 진짜로 공부해 자격증을 따겠다고 생각해 서울의 가양주연구소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다. 부품공장에서 퇴근해 두 시간 넘게 운전해 서울에 가서 7시 반부터 10시까지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오면 12시가 넘었다. 그리고 아침 6시 반에 다시 출근길에 나섰다. 이런 생활이 매주 2회씩 반복됐다.

그는 끝내 술 제조 면허 4개를 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2019년 마침내 건물을 임대해 술 공장을 만들었다. 한국에 온지 10년 만에 목표를 이룬 것이다. 동네의 종친회 회장이 북에서 와서 딸을 키우며 힘들게 사는 그를 눈여겨봤다가 자신의 건물을 싸게 빌려주었다.

건물을 술 공장으로 바꾸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전문 시공업체를 부르려니 너무 비쌌다. 그래서 직접 에폭시 시공을 배워 바닥부터 깔았다. 어린 딸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함께 엄마를 도왔다. 바닥을 칠하고 천정을 수리하고, 증류기와 발효조 등 설비를 사서 들여오는 등 갖은 노력 끝에 2019년 4월 마침내 첫 재료를 발효조에 채웠다. 이것을 6개월 동안 숙성시켜 10월에 마침내 첫 제품을 출시했다.

지역주민들을 위해 김장봉사에 나선 김성희 대표. 그는 지역 탈북민 봉사단체를 이끌고 매년 각종 봉사활동을 벌인다.

● 코로나 위기를 이겨낸 힘

첫 술을 뽑던 그날 밤 김 씨는 정말 많이 울었다.

“북에서 엄마가 술을 뽑아 우리 자식들을 키웠는데, 이젠 내가 남쪽에서 딸을 키우려고 술을 만드네요.”

집에서 술을 뽑을 때마다 처음으로 마셔보며 술맛을 평가했던 아버지 생각도 났다.

김 씨는 처음으로 생산된 술에 ‘태좌주’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북에서 술을 만들 때는 브랜드라는 것을 몰랐다. 그냥 제사술이라고 불렀는데, 한국에서 그렇게 팔 순 없는 일이었다.

김 씨는 제사 때마다 하던 외할아버지 말씀을 떠올렸다. 외할아버지는 일가 남자들이 모여 앉으면 늘 “남자는 술을 마실 때 올방자(책상다리)를 크게 틀고 앉아 마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에 착안해 김 씨는 태좌주란 브랜드를 술에 붙였다.

술을 만들었으니 이젠 판매처를 찾아야 했다. 김 씨는 각 지역 축제장을 타켓으로 정했다. 술을 싣고 가 어르신들에게 맛보시라고 권하며 “제가 북에서 왔는데 술을 만들어봤습니다. 한번 드셔보십시오”라고 열심히 권했다. 원래 술을 잘 못 마시는 체질이지만, 술 공장 사장이 술도 못 마시냐는 소리를 여러 번 듣고 나서 혼자 술도 많이 마시며 단련했다.

“탈북자가 만들었으면 독이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하고, “어디서 이따위 술을 마시라고 하냐”며 면전에서 술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맛을 봐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박대하진 않았다.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이 훨씬 많아 힘이 났다. 전화를 해서 자기 동네 매장에 가져다 팔게 해주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그렇게 2019년 석 달 동안 행사장 등을 돌면서 1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너무 기뻤다. 첫 해에 “100만 원만 벌어도 내가 이기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팔린 것이다. 자신감이 솟구쳤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호락호락하게 성공을 선물하지 않았다. 2020년 본격적으로 술을 만들어보려 했는데 그만 코로나가 터진 것이다.

노인들이 많이 사는 음성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축제도 다 취소됐고, 슈퍼에 입점해도 슈퍼를 찾는 사람들이 없었다.

임대료와 전기세, 수도세 등 고정비는 계속 나가는데 어떻게 팔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장 문을 닫을 수도 없었다. 술은 6개월 또는 1년간의 숙성기간을 거치는데,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술을 계속 빚어 발효조에 채워야 했다.

이 기간 그는 무작정 알바를 뛰었다. 한 번에 새벽 배송과 사무보조, 학교 급식 배송 등 다섯 가지 알바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 하루 1시간도 자지 못하고 일했다.

고마운 도움도 많이 받았다. 남북하나재단에서 그의 술을 받아 명절 선물로 돌렸고, 고성통일전망대에서 판매해주겠다고 승인했다. 충북은 텃세가 심한 동네로 알려졌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대견하게 여겨 일부러 술을 사서 주변에 선물했다.
가장 힘든 시절을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이겨냈다.

매출은 조금씩 성장했다. 2021년 매출 3900만 원을 기록했고, 2022년엔 6000만 원, 2023년엔 9000만 원을 기록했다. 많이 남지는 않지만, 성장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태좌주로 시작한 브랜드도 농태기, 삼팔주, 과하주 등으로 확대됐고 ‘하나도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온라인 판매도 하고 있다. 김 씨는 내년에는 한국에 없는 77도짜리 술도 출품해 시장을 개척하려 한다. 하나도가의 목표는 40대 이상이 집에서 마실 수 있는 묵직한 각종 전통주를 만드는 것이다.

첫 제품을 출시했던 2019년 남북하나재단이 주관한 상품 박람회에 참가해 자신이 생산한 제품을 홍보하고 있는 김 대표(오른쪽).

● “통일건배주는 우리 술이 최고입니다”

김 씨는 지역사회에서 받은 도움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령자가 많은 동네엔 농사 때마다 일손이 부족했다. 그래서 2019년 무작정 딸을 데리고 농사 봉사를 나서기 시작했다. 딸에게 너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봉사가 제겐 생소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북에서 의사로 일했던 6년이 저에겐 봉사였어요. 돌봐줄 사람이 없이 중병으로 앓는 환자를 업고 강으로 나가 목욕을 시켜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봉사는 이후 ‘소금봉사회’라는 탈북민 봉사단으로 성장했다. 현재 봉사단원은 20명인데, 이중 18명이 탈북민이다.

“한국에 정착하는 초기 ‘너희는 우리 세금으로 정착금을 받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받은 세금을 지역 사회에 돌려준다는 의미로 봉사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동네 어르신들 농사일을 돕다가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정기화했어요. 우린 ‘주말 하루는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께 바치는 날이다’고 생각하고 봉사해요.”

소금봉사회의 스케줄은 나름 정교하다. 매월 첫 번째 토요일은 노인복지센터에서 마사지 봉사를 하고 마지막 주 월요일은 인근 이천에서 치킨집을 하는 탈북민의 기부로 ‘학교밖 청소년센터’에 가서 치킨 봉사를 하는 식이다. 농번기엔 매주 토요일에 농사일을 도우러 나간다. 이들의 노력으로 음성에선 탈북민에 대한 시선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김 씨는 300명이 소속된 대한적십자봉사회 음성지구 협의회 사무부장도 맡아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삶을 인정받아 김 씨는 2023년 남북한 사회통합사례 발표대회에서 대상인 국회의장상을 받았다.

김 씨는 술 공장으로 성공하면 탈북한 한부모 가족을 돕는데 힘을 쏟을 계획이다.

“제가 한국에 와서 아무런 연고 없이 혼자 애를 키우니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저는 애를 다 키웠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애를 키우며 힘들게 사는 탈북 여성이 너무 많아요. 제가 겪어봤으니 형편이 되는 한 이런 탈북 여성들을 물심양면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술 제조업체 대표로서의 그의 꿈은 무엇일까.

“우선은 인정받는 술을 만드는 거죠. 한국이 아닌 세계에서 칭찬하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술이 맛있어 알아봤더니 북에서 온 탈북 여성이 만들었다 이렇게 알려지길 원해요. 그리고 제일 큰 소원은 통일이 되면 우리 하나도가에서 만든 술이 통일건배주가 되는 겁니다. 우리 술은 재료는 남쪽의 것이지만, 제조방법은 북쪽의 것입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훌륭한 통일건배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