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공부를 마친뒤 들어가는 진짜 공부는

한겨레 2023. 12. 2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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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주역의 시대에서 정역의 세계로
향적산방, 뜻을 지켜온 이들이 있기에
향적산방을 지켜온 뜻은
계룡산에서 열린 한겨레휴센터 캠프 참석자들이 서서 심호흡을 하는 모습. 박미향 기자
계룡산 향적산방. 사진 이선경 한국주역학회 회장

향적산방과 일부선생

계룡시 엄사면 향한리, 국사봉 기슭에 위치한 무상사를 뒤로 하고 가파른 산길을 30~40분 올라가면, 한국의 역인 정역(正易)을 창도한 일부(一夫) 김항(金恒, 1826~1898) 선생이 한동안 머물며 연찬했던 산방(山房)에 이른다. 현재 입구의 용바위와 안쪽 거북바위 사이에 위치한 그 건물의 터가 일부선생이 만년에 기거하던 옛집 자리이다.

‘정역’은 1885년에 충남 논산군 연산(連山)지역에서 출현한 새로운 역(易)이다. ‘주역’이 지난 수천 년 동북아시아 문명을 이끌어온 사상들의 중심에 있었다고 한다면, ‘정역’은 그 뒤를 이어 새롭게 펼쳐질 자연질서와 인간변화의 길, 새 문명의 방향을 제시한다고 본다. 지난날의 문명은 그 큰 마디를 매듭지을 때가 되었으며, 이제 자연변화와 더불어 인간 자신도 혁신하여 성숙한 인도주의를 실현해 나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정역’은 한국의 역(易)이지만 인류 보편의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정역’을 신종교로 오해하는 일이 적지 않은데, ‘정역’을 종교라 볼 수는 없다. 일부(一夫)는 교단이나 교리를 만든 일이 없으며, 결코 교주로 처신한 일도 없다. 초상화조차 그리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마치 공자가 평생 ‘선생님(夫子)’, ‘우리 선생님(吾夫子)’이라 불렸듯, 일부도 그러하였다. 뒷날 후세인들의 필요에 의해 다양하게 전개되는 문화적 현상은 그것대로 별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마치 ‘노자’ ‘장자’가 종교를 하기 위해 집필된 문헌이 아니건만 도교의 경전으로도 쓰였던 것처럼 말이다.

일부는 동학의 무장봉기가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1983년 2월 국사봉으로 터전을 옮겼다고 하며, 세상을 떠나기 두어 달 전인 1898년 추석 무렵까지 이곳에 기거했다. 늘 일부선생을 모시고 다니던 집안 조카이자 제자인 덕당(德堂) 김홍현은 국사봉 중턱 거북바위와 용바위 사이에 초막을 짓고 선생을 모셨으며, 사방에서 모여드는 손님을 위해 스스로 ‘밥주인’이 되어, 모든 비용을 부담하면서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덕당(德堂)이라 불렸는데,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정역’을 어깨너머라도 배우고 싶은 일념에서 행한 것이라고 송구한 듯 술회하였다고 ‘학산전집’에 기록되어 있다. 덕당은 학산 이정호에게 ‘정역’을 전수한 분이기도 하다.

향적산방이 ‘정역’을 공부하는 명소로 알려져 있지만, ‘정역’이 이곳에서 탄생한 것은 아니다. 일부는 56세인 1881년 이미 ‘정역팔괘도’를 그렸고 ‘대역서(大易序)’를 썼으며, 59살~60살 사이에 ‘정역’의 상하경에 해당하는 ‘십오일언’과 ‘십일일언’을 집필하였다. 단지 세상의 소요를 피해 장소를 옮긴 것인지 또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지 분명히 알기는 어려우나 일부는 훗날 향적산방이라 불린 이곳에서 5~6년 가량을 지내면서,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향적산방을 지켜온 이들

향적산방 이야기를 하면서, 산장의 주인장 정관(貞觀) 송철화(宋哲和, 1904~1978) 선생의 공로에 대해 특별히 기술해야 하겠다. 일부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적막하던 산방이 다시 소생하여, 20세기 후반 ‘정역’의 공부터로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정관선생 내외분의 헌신에 힘입은 것이다. 내외는 ‘정역’을 공부하기 위해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루 3끼 밥공양을 정성으로 수행하였다. 찾아온 이가 더러 물자를 내놓기도 하였겠으나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관은 딸만 셋을 두었는데, 아래의 서술은 막내 따님 송경자 여사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정관은 본래 대전 사람이지만 6.25 전에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송여사는 젖먹이였으므로, 그 어머님과 큰언니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필자에게 전해주었다. 정관은 한 번 집을 나가면 1년씩이나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으므로, 생계를 꾸리는 것은 늘 부인의 몫이었다. 6·25 때 국사봉으로 피난하였는데, 당시 향적산방 자리 움막에는 어떤 노파 한 분이 살고 있었고, 그분이 송여사가 태어날 때 산파를 해주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저러한 인연으로 올라온 향적산방이 삶의 터전이 되었다. 하도 살림이 궁핍하여 건너편에 보이는 바위산이 그릇에 하얀 쌀밥이 소복이 담긴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단다. 돌을 골라 밭을 일구어, 황기를 심어 약방에 팔고 채소를 심어 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렸다.

정관은 농사를 짓다 말고 낫을 든 채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였으므로, 주변에서 미친 사람 소리를 듣기도 하였단다. 걱정이 된 사모님이 큰딸과 함께 무당을 찾아갔는데, 그 무당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는 이 점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 가서 그분이 누구신지 하늘처럼 받들고 살으라’ 하기에, 속으로 ‘미친 것은 아니로구나’ 안도하며 돌아왔다고 한다. 공부의 길은 공부하는 당사자뿐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하나의 숙명인 것 같다.

새시대의 역인 정역을 내놓은 일부 김항 선생. 사진 한겨레 자료

정관이 언제 어떤 경로로 ‘정역’을 접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막내 사위 나상현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정관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사위에게 ‘예전에 정역을 석 달 배웠다’라고 하였단다. 그러나 평소에 정관이 ‘정역’을 강론하는 것은 본 일이 없으며, 밤에 영가(詠歌)는 하였다고 한다.

정관이 향적산방을 정역의 공부터로 일군 데에는 학산(鶴山) 이정호(李正浩, 1913~2004)와의 인연이 결정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학산전집・학산산고’에는 학산이 정관을 만나게 된 사연과 세상을 떠난 정관을 곡(哭)하는 글이 실려있다. 학산은 정관을 6.25 후에 알게 되었는데,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았고, 일부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이 합하여 더욱 친밀하게 느껴졌다고 기록하였다. 1955년 충남대학교 철학과로 자리를 옮긴 학산은 조용한 연구실이 필요하던 차에, 강의를 마치기가 무섭게 일부선생의 옛 터전인 산방을 찾아 일주일에 4~5일을 그곳에서 지내었다. 학산이 주로 그곳에 기거함으로 인하여, 그를 따라서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10여 명이나 모여들다 보니, 정관 댁에서 계속 지내기에도 불편하여, 그 옆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작은 집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향적산방(香積山房)’이라 하였는데, 그때가 1957년이다. 학산은 그렇게 학교와 산방을 오가며 40여년을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였고, 정관은 그런 학산을 지성(至誠)으로 뒷바라지 하였다. ‘해설역주 훈민정음’(1972) ‘훈민정음의 구조원리’(1975) ‘정역연구’(1978) ‘주역자구색인’(1963) ‘정역자구색인’(2017) ‘주역정의(1987), ‘학역찬언’(1982) ‘원문대조 국역주해 정역’(1988) ‘정역과 일부’(1985) ‘제3의 역학’(1992), ‘주역집주대요(상중하)’ 등 학산의 주요 저작들이 향적산방의 연구실에서 탄생하였다.

향적산방 현판. 창애 김순동 글씨. 사진 이선경 제공
학산 이정호 선생의 육필 원고. 사진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이러한 인연으로 향적산방은 여러 학인들과 명사(名士)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장소가 되어, 한 시절 정역연구의 성시(盛時)를 이루었다. 학산은 정관이 1978년 음력 10월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애통하게 곡을 하는 제문을 지어 그를 추도하였다. 그 문장의 일부를 옮겨 본다.

“오호라 선생이여, 선생과 저는 25년 전 이곳에서, 동족상잔의 참적(慘迹)이 채 가시지 않아 군데군데 잿더미가 울퉁불퉁한 빈터에서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 뒤 선생은 꾸준히 흙집을 짓고 정지를 만들어서 우리들 일부선생의 공부를 하는 몇 사람을 위하여 헌신 노력하여 왔습니다. …생각하면 선생과 저는 참으로 기연(奇緣)이라 하겠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무슨 인연으로 일부선생의 구기(舊基)에 따라들어 오늘날까지 그 모진 고생을 참고 견뎠으며, 저는 또 어찌 선생을 좇아 이곳에 향적산방을 짓고, ‘주역자구색인’을 만들고 ‘정역연구’를 쓰게 되었을까요. 이것이 다 선생의 일부선생 받드는 정성과 그 공부를 중히 여기는 남다른 정신의 운력에 힘입은 것입니다.”(「哭貞觀宋道人哲和公文」)

정관 송철화 선생 내외 묘소. 사진 이선경 제공

향적산방에서의 추억

할아버님이신 학산선생이 산방에 기거했던 관계로 필자도 어린 시절부터 종종 산방에 드나들었다. 지금은 산방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멀리 큰길에서 버스를 내려 한참 마을을 지나고 비탈진 산길을 꽤 올라야 했다. 주로 대전에 사는 숙부님과 동행했는데, 삼촌은 배낭 가득 식품이며 물품을 둘러매고 참 부지런히도 산방에 오르내렸다.

향적산방은 참 좋았다. 더운 여름날 바람이 통하도록 문을 열어놓고 앉아 있으면 맑은 산기운에 마치 신선놀음이라도 하는 듯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 추운 겨울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총총한 별들이 금세라도 쏟아질 듯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기도 없었고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은 건전지로 돌아가는 라디오 뿐이었는데, 적적한 줄도 모르고 지루하지도 않았으니 산 생활이 체질에 맞았나 보다. 그곳에서 할아버님께 ‘논어’를 배웠고 ‘고문진보’를 읽었다. 산방의 아래쪽 집에는 ‘정역’을 공부하는 이들이 머물면서 낮에는 글을 읽고 밤이면 영가(詠歌)를 하곤 했는데, 거기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또한 할아버님이 평소에 영가를 하시는 것을 본 일은 한 번도 없다. 동생과 함께 ‘논어’ 공부를 마치던 날, 동생이 언덕 아래에서 빨간 열매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내려가서 꺾어 올라왔다. 그런데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예쁘다고 꺾어온 열매는 산삼이었다. 며칠 전 심마니들이 다녀갔어도 안보였던 산삼이 어린 동생의 눈에 뜨인 것을 다들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우연하게도 ‘논어’를 마치는 날 산삼 두 뿌리를 할아버님께 진상하게 된 일은 신기하고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계룡산 국사봉 정상. 사진 이선경 제공

훗날 연로한 할아버님은 하산하셨고, 더 이상 산방 출입을 하지 않은 채로 세월이 흘렀다. 어느 해 여름 할아버님은 산방에서 필자에게 ‘정역’의 기초를 강의해 주시기는 하였으나, 굳이 애써 가르치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정역’은 세상 공부 다 하고 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세상 공부를 다 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제는 ‘정역’을 공부할 때가 되었다. ‘정역’에 “사람이 없으면, 그저 (그 도를) 간직할 것이고, 사람이 있으면 전할 것이다”라 하였으니, 그 말씀대로 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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