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려 애쓰지 마라, 찔레꽃은 말한다
겨울날 숲으로 들어가다보면 길섶에 팥알만 한 크기의 빨간 열매를 단 덤불을 만난다. 찔레꽃이다. 찔레꽃은 북한 식물분류학자들이 쓴 식물도감에서는 들장미로 통한다. 실제 장미 품종을 만들기 위해 접붙일 때 찔레꽃의 도움을 받는다. 장미와 같은 계보라는 건 가지에 돋은 뾰족뾰족한 가시만 봐도 알 수 있다
찌르륵찌르륵 마음이 구슬퍼지는 꽃
경북 봉화에 내가 연구원으로 일하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있다. 이 수목원에는 여러 품종의 장미를 모아놓은 정원이 있다. 때가 되면 그곳에서 각종 장미가 각양각색으로 핀다. 홑겹이 아니라 겹겹으로 변형된 꽃잎을 포갠 채 화려함을 마구 뽐내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 애써 심어 가꾼 그 장미들이 아니라 내 눈에 가장 돋보이는 건 가꾸지 않아도 변방에 서 저절로 자라는 찔레꽃이다. 인간은 결코 흉내 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미 다 안 다는 듯이 찔레꽃은 청초하고 수수하고 강인하고 순정하다. 일부러 꾸미려 애쓰지 말라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찔레꽃은 5월에 전국 어디서든 하얀 꽃을 피운다
꽃을 볼 목적이 아니라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찔레꽃을 찾아다니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보릿고개를 넘도록 도와준 고마운 먹거리 가운데 하나가 그 연둣빛 햇가지였으므로. 우리 할머니는 봄이 오면 어떤 순수하고 성스러운 장소로 안내하듯이 나를 찔레꽃 앞으로 데려가곤 했다. 겨울눈을 뚫고 새로 나온 순의 껍질을 벗겨 내 입에 넣으며 그이는 말씀하셨다. 이제는 살기 좋아져서 배곯을 일 없지만 그래도 먹어보렴. 곧 닥칠 여름 무더위를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게다. 할머니 돌아가신 지 십 년도 훨씬 지났건만 그때 풍경이 삼삼하다. 찔레꽃을 보면 나는 찌르륵찌르륵 마음이 구슬퍼질 정도로 외롭거나 좀 쓸쓸해지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말 백난아가 부른 의 가사는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으로 시작한다. 직업병이 도져서일까, 노랫말을 곱씹다보면 내 고향에 붉게 핀다는 그 꽃이 찔레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꽃이 나는 찔레꽃과 같은 혈통의 형제 식물인 해당화라고 짐작한다. 해당화를 ‘때찔레’ ‘홍찔레’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현대식 식물분류법이 도입되기 전에는 바닷가 주변에서 붉은 계열로 피는 해당화와 산과 들에서 하얗게 피는 찔레꽃을 엄밀히 구분해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야생 장미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의 장미를 존재하게 하는 원종- 이를테면 찔레꽃, 해당화, 돌가시나무, 인가목 등- 을 세세히 나누지 않고 뭉뚱그려 찔레 꽃이라 불렀을 것이다.
기원전 3000년께 시작해 3만7천 종에 이른 장미
장미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주 친숙한 식물이다. ‘장미 장’(薔) 자에 ‘장미 미’(薇) 자. 한자를 헤쳐보면 담에 기대어 자라는 덩굴장미라는 뜻이다. 일정한 공간을 둘러막기 위해 쌓아올린 울타리 위에 드레드레 넝쿨을 뻗는 식물이 장미라는 것. 그래서 장미는 저 혼자 나타나지 않는다.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원종과 또 다른 원종을 인위적으로 맺어주거나 그렇게 탄생한 교잡종을 수없이 교배하고 육종하는 방식으로 더 다양한 장미 품종을 사람이 일부러 만드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태와 관능적 향기를 얻고 즐기기 위해 우리 인류가 장미를 재배하기 시작한 시기를 이집트와 중국에서 고대문명이 꽃피던 기원전 3000년께로 보거나, 중국에서는 공자의 기록으로, 서양에서는 그리스 시인 사포의 시를 통해 기원전 5~6세기 무렵으로 보기도 한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개량을 거듭하고 육성해서 얻은 원예종은 자그마치 3만7천여 종에 이른다. 세계 최대의 꽃 경매장인 네덜란드의 로열플로라홀랜드가 2023년 밸런타인데이 준비 기간에 거래한 장미는 1억7500만 송이라고 한다. 그 수많은 장미는 주요 생산지인 콜롬비아, 에콰도르, 케냐로부터 수송해와서 대부분 국외로 배송될 것이다.
로마 문화권에서 아주 먼 과거부터 장미는 비밀을 보장하거나 신중한 결정을 내릴 때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성당의 고해소나 법정의 천장과 벽에 장미를 새기거나 장식처럼 매단 이유는 그 아래서 나눈 모든 대화가 비밀로 유지돼야 함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장미를 가꾸는 일에 몰두했던 인물이 나폴레옹의 아내 조제핀이다. 프랑스 파리 외곽 말메종 성의 정원에 당시 알려진 모든 장미를 유럽 전역의 공급업체로부터 받아 가득 채웠다. 프랑스는 영국과 전쟁 중이라 영국해협이 봉쇄돼 있었지만, 영국에서 장미를 선적할 수 있도록 특별한 조처를 했고 장미를 앞세워 영국해협 봉쇄를 아무런 제재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프랑스에서 꽃에 대한 열정과 장미 재배 유행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고, ‘장미 정원’ 개념을 정립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19세기 중반은 동서양의 장미를 접목한 새로운 품종이 지구에 출현했기에 장미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다. 이를 ‘고전 장미’와 ‘현대 장미’의 분기점으로 삼는다. 장미 개종에 열을 올리던 유럽에 동인도회사를 통해 중국의 월계화(1년에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반복해서 꽃을 피우는 장미)가 도착한다. 이 꽃은 여름 내내 반복적으로 꽃을 피우고, 은은한 차의 향기를 내뿜었다. 정원사와 장미 육종가들은 중국의 토종 장미인 월계화에 매료돼, 유럽의 이 장미와 저 장미에 접목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마침내 월계화와 유럽 고전 장미의 결합으로 현대 장미 ‘라 프랑스’(La France)가 1867년 탄생한다. 1875년에는 월계화와 찔레꽃을 교배한 ‘폴리안타 장미’(Polyantha Rose) 계열이 등장한다
‘꽃집 장미는 얼굴도 못 내밀 거야’던 흰인가목
우리나라 동해의 최북단 해변이라 할 수 있는 강원도 고성 화진포에는 늦봄부터 이른 가을까지 붉게 피는 해당화 군락이 있다. 그보다 북진하면 해당화 서식지가 더 있다고 북한의 식물분류학자 임록재는 에서 강원도 원산의 명사십리와 어랑만의 해당화가 얼마나 멋진지 말한다. 일제강점기 전남 순천에 머물렀던 미국 선교사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은 1931년 5월 출판한 에서 “북한 원산의 명사십 리 해당화가 유명한데 강릉 일대 해안에 집중적으로 심어 관광 명소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썼다.
바다 가까이 해당화가 있다면 백두대간 산정에는 그 꽃과 비슷하게 생긴 인가목이 있다. 인가목이란 이름을 처음 맞닥뜨리면 나무가 뭘 인가했다는 뜻인가, 하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줄기에 촘촘히 박힌 가시가 두드러지고 민가에서 약재로 널리 쓰는데, 한방에서 부르던 이름이 붙어 그렇게 정해졌을 거다. 약으로, 향으로, 꽃으로 우리 선조는 해당화와 인가목을 구분 없이 널리 이용했다. 특히 그 식물들로 향낭을 만들어 차고 다녔다는 문화가 내게는 참으로 정답게 다가온다. 그 꽃들이 짙게 피는 여름날, 한복 허리춤과 부채에 꽃을 말린 주머니를 매달아 향을 풍기고 다녔다고 한다.
찔레꽃과 인가목을 절반씩 섞은 것처럼 생긴 흰인가목이 있다. 강원도의 설악산, 발왕산, 박지산 등 인적이 드문 높고 깊은 산에 산다. 내가 식물분류학자로 수목원에서 일한다고 해서 연구실에만 앉아 있는 건 아니다. 누가 애써 가꾸지 않아도 식물이 스스로 사는 땅, 그 현장에 더 많이 머문다. 당장 멸종 위기에 직면한 식물은 없는지, 특별히 보호가 필요한 장소는 어디인지를 알아내는 일이 내 몫이다. 흰인가목을 발견한 것도 그 탐사의 과정 덕분이다.
그들이 살 만한 장소는 샅샅이 다 뒤졌다. 주로 고도 1천m 이상의 고만고만한 바위들이 넘너른한 너덜지대, 그 돌들 사이에 서 한여름에도 찬 바람이 쏠쏠 나오는 곳에 흰인가목이 산다. 돌틈에 발이 끼여 다치기 쉽고 발자국 흔적이 남지 않아 방향을 못 잡고 길을 잃기가 십상이라, 그곳에서는 특히 더 긴장하고 집중해야 한다. 그나마 설악산과 발왕산은 정식 등산로가 있어 그 돌밭 까지 찾아갈 만한데, 평창 박지산은 제대로 된 길이 없다. 내가 길을 만들며 나아가야 한다. 하이고, 큼지막한 찔레 같은 꽃이 얼마나 곱게 피는지 꽃집에서 파는 장미는 얼굴도 못 내밀 거야!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던 동네 어르신 덕분에 산길 초입을 겨우 찾아 흰인가목을 만나러 가던 날이 있었다. 더운 여름날 시원한 바람이 저절로 부는 신비로운 땅에 오롯이 살아남은 흰인가목을 만났을 때의 탄복을 나는 조사 야장(野帳)에 결코 다 담을 수 없었다
반가운 찔레꽃이 마당에 들어오면
정원과 베란다와 화분 안에서 식물이 돌봄을 받는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자연에서는 혹독한 시절을 통과하는 식물이 너무 많다. 장미를 심고 가꾸는 땅에 찔레꽃이 저절로 들어왔다고 해서 잡초 덤불로 치부하고 뽑아낼 일이 아니다.
노년을 식물분류학자로 살았던 프랑스의 사상가 장자크 루소는 여러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식물학적 지식과 소신을 밝힌 바 있다. “(주변의 식물을 관찰하다가) 겹꽃을 한 개량종이 발견되면 조사를 하지 마세요. 그것들은 꼴불견인데다가 사람들 유행에 따라 꾸며진 것이니까요. 그런 곳에는 자연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자연은 그렇게 훼손된 괴물을 재생하지 않으니까요. 가장 아름다운 부분, 예컨대 꽃부리 같은 것이 더 화려해졌다면 그것은 그 화려함 아래 사라져버린 다른 중요한 부분이 희생됐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루소의 말을 나는 주머니에 편지처럼 접어 넣고 다닌다.
글·사진 허태임 식물분류학자·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연재 소개: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이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었습니다. 친근하면서도 다소 낯선,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가 4주마다 펼쳐집니다. 초등학교 6학년 차지우 학생이 그림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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