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했던 남자의 섬뜩한 배신, 사이코패스 호연한 유연석
원래 착한 사람이 돌변하면 더 무서운 법이다. 연이어 사람 살리는 의사 역할을 맡아온 유연석이 이번에는 정반대로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로 분해 극강의 공포를 선사한다. 그의 ‘오진’ 연기 변신이 섬뜩하고도 반갑다.
그의 변신은 놀라움을 넘어 섬뜩하다. 마치 게임을 즐기듯,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람들을 살해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다. 함께 연기했던 이정은이 우스갯소리로 "(유연석에게) 그런 성격이 있는 거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고 말했을 정도. 그를 캐스팅한 필감성 감독은 "시체 머리를 들고 갑자기 둥개둥개를 한다든가, 살인 후 블랙박스에 브이를 하는 등은 모두 유연석 씨 아이디어였다"며 "연출자로서 유연석 씨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켜본 것 같다"고 말했다.
유연석이 선사한 섬뜩함에는 그간 그가 맡아온 캐릭터와 지금의 낙차, 한마디로 '배신감’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동안 그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외과의사(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나 천사 같은 심성을 지닌 소아과의사(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가 아니었던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는 지고지순한 짝사랑의 주인공(드라마 '응답하라 1994’)이거나, 우유부단하지만 따뜻한 직장 동료(드라마 '사랑의 이해’)였다. 일단 유연석의 변신은 성공적인 듯 보인다. 드라마는 3주 연속으로 티빙 유료 가입 기여도 1위를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악역을 맡았는데, 이전과 다른 반응이 느껴지나요.
드라마를 전날까지 보셨다는 분을 만났는데, 저를 보고 "섬뜩하다"고 하시더라고요. '드라마 재미있게 보셨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지인들에게는 "너무 잘 어울린다"는 말도 들었고요(웃음). 주로 "캐릭터 좋았다" "연기 좋았다"고 해주셨어요. 이런 반응들이 캐릭터 하나를 만들었을 때 배우의 쾌감인 것 같아요.
이정은 배우가 인터뷰에서 "악역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선배의 말씀은 굉장히 좋은 말, 칭찬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어요(웃음). 정은 선배와는 여러 작품에서 인연이 있었지만 장면을 많이 같이하지는 못했는데, 이번 작품도 마주칠 일이 거의 없더라고요. 선배가 맡은 순규는 저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캐릭터였어요. 그러다 마지막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제가 자신이 찾던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돼요. 그때 선배의 표정이 강렬하더라고요. 제 정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들도 재미있었고요.
"직장인처럼 나와 '혁수’를 분리했다"
그동안 캐릭터를 연기할 때 '만약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로부터 시작했어요. 그런데 혁수는 저 자신으로 출발해서는 답이 안 나왔죠.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사이코패스나 범죄자의 인터뷰를 찾아보고 무통각을 겪는 사람들 자료를 조사하면서 그들이 어떤 특징이 있는지, 실제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답을 알아갔던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 무통각은 슈퍼맨 같은 능력치 같아서 혁수가 대담해지는 계기가 되지만, 실제로 무통각을 겪는 환자들은 굉장히 조심하면서 살더라고요. 통증은 몸에서 주는 경고 같은 건데 알람이 꺼진 상태다 보니 운동하다가 뼈가 부러져도 모르거든요. 또 매운맛도 못 느낀다고 해요. 매운맛도 통각이거든요. 그 부분에서 작가님께 아이디어를 냈고, 혁수가 매운 핫바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장면으로 들어갔죠.
보는 사람도 힘들었지만, 연기하는 사람은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캐릭터와 저를 최대한 분리해야 했어요. 직장인들처럼요(웃음). 출근해서 연기하고 퇴근하면 또 제 삶으로 돌아오는 식이었죠.
‘이건 내가 봐도 무서웠다’ 싶은 장면이 있나요.
싸우는 장면이었는데, 혁수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니까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도 계속 웃으며 맞아요. 그 모습을 모니터링하면서 '이렇게 기괴해도 되나?’ 할 정도로 섬뜩하더라고요. 다행히 리뷰는 좋았던 것 같아요.
‘택시’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연기해야 했습니다.
택시 안에서의 연기가 가장 어려웠어요. 그 안에서 혁수 캐릭터가 만들어져요. 살인담을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거든요. 오택과 미묘한 신경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디테일하게 표현해야 했어요. 택시에 탑승해서 고속도로를 달리기 전까지는 선하고 친절한 승객이었다가, 고속도로 쉼터에서 캠핑남을 살해한 뒤에는 본모습을 드러내요. 실제로 사이코패스는 살인하고 나면 마치 성욕을 해소한 것 같은 극강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선에서 악으로의 도전
그동안 악역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당시 주목도는 크지 않았습니다. 이번 드라마를 통해 악역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요
그건 아니었어요. 부드럽고 댄디한 캐릭터들을 하다 보니까 갈증이 생기더군요.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는 강렬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타이밍에 만난 혁수는 근래에 했던 캐릭터와는 상반돼서 관심이 간 것 같아요. 그전 캐릭터는 악역이라 해도 허술함이나 코미디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랬기에 제겐 새로운 도전이었고, 시기가 굉장히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이 역할을 어떻게 연기할까?’ 호기심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그렇게 해야 배우로서의 힘이 생기는 것 같거든요. 선한 역할을 했다가 악역을 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변주해가면서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싶었어요. 또 낙차가 큰 역할을 맡았을 때 느껴지는 반향을 기대했죠.
작품을 선택할 때 조언을 구하는 멘토가 있나요.
회사 분들과 의견을 나누지만, 결정은 배우가 해야 해요.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거든요. 감사하게도 그동안 좋은 동료들과 함께하면서 많은 캐릭터와 작품으로 사랑받았죠. 기억해주시는 캐릭터가 여러 개인 것도 배우로서는 행운인 것 같아요
이 드라마에서 고등학생 시절 연기도 직접 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촬영하면서 고등학생 시절과 강아지가 나올 때, 2가지 연기가 가장 힘들었어요(웃음). 대본을 처음 봤을 때는 제가 고등학생 연기를 직접 할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당연히 아역이 하겠지 했는데, 감독님이 진지한 얼굴로 "혁수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내용이니 배우 본인이 해야 캐릭터에 힘이 실릴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다른 배우들도 과거 장면을 직접 촬영하니 혁수만 배우가 바뀌면 이상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다른 어떤 신을 준비하는 것보다 심적인 부담이 있었어요. 어려 보일 수 있게끔 스태프가 헤어스타일 분장을 해줬고, 디에이징(배우들이 화면상 젊어 보이게 하는 컴퓨터그래픽 작업) 기술도 썼죠.
강아지를 해하는 장면에서 마음이 쓰였나 봐요.
제가 유기견을 입양해서 키우다 보니까 그 장면 찍을 때 가장 힘들더라고요. 극 중에서 강아지를 쳐다만 보고 가는데, 나중에 편집을 어떻게 할지 걱정됐어요. 소리를 넣으면 시청자들이 상상할 테니까 감독님한테 편집 좀 잘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드라마에서는 웹툰 속 혁수의 외양과 다릅니다. 어떤 이미지로 혁수를 표현하고 싶었나요.
웹툰의 이미지를 어디까지 가져올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웹툰에서는 개구리처럼 기괴한 얼굴을 한 인물이거든요. 그걸 그대로 표현하기는 힘들고 대신 빠글빠글한 파마는 갖고 오자고 생각했어요. 기괴한 얼굴을 설정하기 위해서 주근깨도 그렸죠. 또 신분 세탁을 하고 다른 인물이 됐을 때는 주근깨 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설정했죠.
이성민 배우와의 호흡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성민 선배님과는 둘이 농담으로 "지겹도록 붙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래서 정이 많이 쌓였고 어느새 특별히 약속하지 않아도 호흡이 잘 맞게 되더라고요. 선배님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기대를 크게 했는데, 정말 옆에서 연기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점이 많았어요. 선배님은 에너지가 정말 대단하세요. 자기 딸이 죽었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 처절하게 오열하셨거든요. 너무 오열해서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연기하시더군요. 선배님의 연기에 감탄하면서 촬영했던 것 같아요. 또 제가 특별히 액션을 크게 하지 않더라도 긴장감과 공포감을 잘 연기해주셔서 공포심이 잘 표현된 것 같아요.
앵글 밖 취미 부자
닭발라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굉장히 안타까웠고 억울했어요. 제 지인들을 초대해서 그걸 끓여줬는데 정반대의 반응이 나왔거든요. 그땐 굉장히 맛있게 먹었어요. 언젠간 해명 방송을 할 겁니다(웃음).
유튜브 활동은 배우로서 어떤 의미인가요.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만들진 않는데 꾸준히 올리고는 있어요. 작품 외에 저라는 배우를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저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사진, 캠핑, 커피 등 취미가 다양한데 최근 어떤 취미에 몰두하고 있나요.
여유가 생길 때마다 반려견 리타와 최근 입양한 강아지와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사진전 계획은 없다 보니 전시회용 사진은 안 찍고 대신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 배우들과 폴라로이드 사진을 함께 찍어요. 작품 끝나고 선물로 줄 때도 있는데, 사진은 사진대로 의미가 있더라고요. "선배님과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2개예요(두 작품 같이 했어요)" "3개예요"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죠.
선배뿐 아니라 동료 배우, 스태프와 두루 잘 지내는 비결이 있나요.
사소한 것을 공유할 때 '세심한 친구’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촬영장에 음료수라도 챙겨와서 함께 나눠 먹는다든가(웃음). 저 역시도 후배들이 거리감을 두고 어려워하기보다는 현장에서 배우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사소한 것들을 배려할 때 감동하게 되는 것 같거든요.
김혜수 배우의 마지막 청룡영화상 MC 무대를 함께했습니다.
그 자체가 감격스러웠어요. 저도 MC로 무대에 서게 돼 영광이었죠. 저는 6년 했지만 매회 MC로 설 때마다 떨리고 힘들고 긴장됐는데,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30년 간 영화인들을 아우르면서 진심 어린 멘트를 하실 때마다 존경스러웠어요. 축하드리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그런 자리였던 것 같아요.
데뷔 20주년이기도 합니다. 2023년은 어떤 해로 기억될 것 같나요.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린 것 같아서 뿌듯해요. 지난 20년을 돌아보니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 주저 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했던 게 좋은 경험으로 남았어요. 좋은 반응도, 나쁜 반응도 들었지만 제가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하고 싶은 것에 도전했던 것이 의미 있었죠. 앞으로도 가지고 있는 도전 정신을 가져가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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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다음영화 티빙 tvN
두경아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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