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섭외 1순위' 촬영감독이 만든 명품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 아카데미상은 24개 부문(공로상 포함)에서 오스카 트로피를 수여한다. 해마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시상식은 장편 다큐멘터리상, 주제가상, 분장상처럼 대중의 관심이 덜한 부문서부터 수상자 발표를 시작해 대상에 해당하는 작품상을 제일 마지막에 발표하면서 시상식의 절정에 이른다.
일반 대중은 대개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남우주연상·여우조연상·남우조연상 정도까지 관심을 두게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관계자나 전문가, 또 열성 팬과 마니아들은 각본상과 편집상 등에도 흥미를 갖는다.
영화 제작자와 감독들이 특히 눈여겨보는 분야가 바로 아카데미 촬영상Academy Award for Best Cinematography이다. 말 그대로 가장 뛰어난 촬영을 한 인물 및 작품에 수여하는 상이다. 우리말 '촬영'으로 번역된 '시네마토그라피cinematography'는 '움직임'을 뜻하는 그리스어 'kinma'와 '쓰다'[書]를 뜻하는 그리스어 'graphein'에서 파생된 말로, 움직이는 영상을 스크린 위에 영사映寫하는 장치를 뜻한다.
이 단어가 줄어 지금의 영화를 뜻하는 '시네마cinema'가 되었으니 예술의 한 장르인 영화에서 촬영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영화제작에는 감독director 외에 촬영감독이 따로 필요하다.
코엔 형제와 협업으로 유명
영화의 연출 방식은 당연히 감독의 몫이다. 가령 감독이 "롱테이크로 찍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면, 촬영감독이 동선이나 렌즈 등 어떤 식으로 찍을지 결정한 뒤 촬영하는 식이다. 연출하는 감독이 '머리'라면 촬영감독은 '손'인 셈이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에 촬영감독이 끼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제작진은 출연 배우 못지않게 일급 촬영감독을 잡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일례로 영국 출신의 로저 디킨스Roger Deakins(1949~)는 할리우드의 여러 감독이 1순위로 찾는 촬영감독 중 한 명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쿤둔>(1997), 샘 멘데스의 <007 스카이폴>(2012),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등 거장들과 작업을 해왔으며, 특히 작가주의 경향의 코엔 형제와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2000),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7) 등 무려 12작품을 함께해 코엔 형제의 페르소나로 불린다. <블레이드 러너 2049>(감독 드니 빌뇌브, 2018), <1917>(감독 샘 멘데스, 2020)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2차례나 받았다.
카메라를 도구로 가공된 영상을 만드는 작업인 촬영은 카메라 기종, 렌즈, 필터, 조명, 화면 구도, 카메라 위치, 촬영 기법 등에 따라 전혀 다른 영상이 나오기에 촬영감독이 이를 책임지고 통제한다. 한 영화의 영상미는 전적으로 촬영감독의 역량인 것이다.
영국 다큐멘터리 <우리의 지구: 끝나지 않은 여정Our Planet: Behind the Scenes>(감독 휴 코디, 2019)은 바로 그 촬영과 촬영감독에 대한 영화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우리의 지구>(2019) 시리즈는 자연 다큐멘터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 수작이다. 총 8부작으로 구성돼 세렝게티 평원·남극과 북극·열대우림·천해淺海와 심해·사막과 초원·수림樹林 등에서의 모습을 담았다. 시청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올해 초 <우리의 지구> 시즌 2가 공개되기도 했다.
촬영기간 10년… 동물들을 위한 끝없는 인내
<우리의 지구: 끝나지 않은 여정>은 시즌 1 제작에 얽힌 스토리들을 화면에 담은 작품이다. 우선, 이 시리즈에 투여된 시간과 물량, 제작진의 노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60개국 3,375일 촬영, 무인 카메라 녹화 40만 시간, 드론 비행 촬영 6,600회, 항해 기간 911일, 잠수 2,000시간, 600명의 제작진이 함께한 200곳의 촬영지.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연 다큐멘터리 촬영감독들의 가장 큰 고민은 '배우'들이 감독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수아크 보호구역. 독특하고 희귀한 동물들이 서식하는 이곳은 동물생태학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 오랑우탄은 야생 오랑우탄으로서는 유일하게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
열대우림 정글의 늪은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고, 뒤엉킨 나무뿌리가 마치 갈고리처럼 표면으로 솟아 있어 제작진이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게다가 이곳 오랑우탄은 아예 땅에 내려오지 않고 나뭇가지로 이동하면서 나무 위에서만 생활한다.
커다란 카메라와 삼각대를 나눠 들고 서식지를 찾아 헤매다 어렵사리 오랑우탄을 발견, 삼각대를 설치하고 카메라를 올려놓으면 오랑우탄은 이미 사라진 뒤이다. "오랑우탄이 너무 빨리 이동하는 탓에 카메라 설치 후 촬영 성공 비율은 25대 1쯤 됩니다. 나뭇잎이 무성해 그 사이로 깔끔한 장면을 찍기도 힘들지요."
옻나무에 긁혀 정강이 알레르기 발진이 시뻘겋게 오른 촬영감독은 허탈하게 웃는다. 그러나 이들은 이 모든 것을 무릅쓰고 수마트라 오랑우탄이 나뭇가지를 구멍에 집어넣어 거기 붙은 개미들을 훑어 먹는 장면을 천신만고 끝에 촬영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칠 '배우'가 대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적잖다. 개체 수가 얼마 남지 않은 시베리아 호랑이를 촬영하기 위해 제작진은 러시아 동부로 향한다. 이들은 800시간 동안 머물며 혹시 지나갈 호랑이를 촬영할 1인용 오두막을 설치한다. 주방 도구, 방한 장비, 호랑이 퇴치용품, 심지어 간이 변기까지 설치된 이곳에서 촬영감독은 먹고 자고 배설하면서 6일에 한 번꼴로 문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는 시베리아 호랑이가 고양이과科 동물 중 가장 넓은 영역 활동을 하면서도 극도로 조심스러운 동물이기 때문이다. 촬영진은 바위, 나무 기둥 등 곳곳에 무인 카메라를 설치해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카메라가 작동하게끔 해놓고 수시로 장비 체크를 해야 했다.
15일째, 39일째, 무엇 하나 지나가거나 찍히는 게 없다. 62일째, 스라소니가 무인 카메라에 잡혔고 75일째 밤, 호랑이 2마리의 울음소리가 들려 제작진을 설레게 했으나 다음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2개월째, 호랑이 발자국을 확인했으나 실물 촬영에 실패했다.
결국 촬영진은 처음 카메라 설치 후 꼬박 2년이 되던 때에 무인 카메라에 잡힌 시베리아 호랑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클로즈업close-up 화면처럼 거대한 호랑이가 카메라 바로 앞을 보무도 당당하게 지나가는 영상이었다. "정말 완벽한 배경이에요. 능선이며 뒷배경의 눈 덮인 산이며, 날이 좋아 빛도 적절하고. 호랑이가 정말 멋지게 찍혔잖아요."
자연 다큐멘터리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사실 빛은 촬영에서 생명과 같다. 빛의 밝기 정도에 따라 영화 표현이 달라지며, 빛에 따라 영화가 전달하는 의미도 달라진다. 2년 만에 호랑이 모습이 제대로 담기면서 자연광까지 완벽하게 협조해 줬으니 촬영감독으로선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기술 발전으로 촬영 기법도 획기적으로 변화한다. 멕시코 칼리포르니아만灣은 지구상에서 대왕고래를 가장 잘 목격할 수 있는 곳이다. 예전에는 먼바다에서 생명체를 만날 경우 헬기로 촬영하는데, 연료 문제와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 등의 이유로 육지와 너무 먼 곳은 촬영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드론이 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큰 동물인 대왕고래는 15분간 잠수하고 2~3분 호흡을 위해 수면으로 떠오른다. 촬영팀은 1명이 드론을 조종하고, 1명은 드론에 설치한 카메라를 원격 작동한다. 앵글과 빛, 화면 구도를 한꺼번에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조절해야 한다. 대왕고래 어미와 새끼가 함께 유유히 바다를 가르는 이들의 공중 숏aerial shot은 형언키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이외에도 남태평양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밤바다에서 상어 떼에 섞여 촬영한 먹이 사냥 장면, 러시아 북극해 섬을 빈틈없이 메운 8만여 바다코끼리, 그린란드 서부 스토어 지역에서 극적으로 촬영한 거대한 빙하 더미의 붕락崩落 등이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촬영진의 눈물과 피땀을 목도하노라면, 자연도 살아 있고, 인간도 엄연히 살아 있음을 분명히 알겠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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