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들이 먼저 찾는 ‘믿고 보는 송섬별’ [2023 행복한 책꽂이]
문학 교사 아버지는 어릴 적 섬에서 별을 바라보던 밤을 떠올리며 첫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명함 속 길벗체로 쓰인 ‘송섬별’이라는 이름 아래 점자가 도드라졌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이 글씨체가 마음에 안 들고, ‘점자는 또 뭐지’ 싶은 분은 서로를 위해서라도 같이 일을 안 하는 게 좋으니까요.” 송섬별 번역가가 웃었다.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낭만주의 영시를 전공한 그는 곧바로 전업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 드문 케이스다. 언젠가는, 남들처럼 40~50대쯤에 번역가가 될 줄 알았는데 기회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20대의 마지막 해에 첫 계약서를 썼는데 올해가 30대의 마지막 해다. 딱 10년 만에 출판인들이 꼽은 올해의 번역가가 되었다. 출판계 사람들은 ‘또렷한 기준을 세우고 그에 부합하는 책들을 신중히 선정해 번역하는 번역가’ ‘자기만의 고유한 시선과 스타일을 지닌 귀한 번역가’라고 그를 평가했다. 올해는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의 책 〈자미〉로 시작하고,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밝힌 배우 엘리엇 페이지의 〈페이지 보이〉 번역으로 마무리했다.
그는 성실한 번역가다. 여느 직장인처럼 오전 9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하는 일과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물론 출근하는 곳도, 퇴근하는 곳도 집이다. 두 고양이 물루와 올리버가 유일한 직장 동료다. “사람들이 그 시간에 출퇴근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밥을 한술 한술 떠먹듯이 해요.” 10년 차 프리랜서가 출근 시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퇴근 시간이다. “할 일이 있으면 출근은 어떻게든 하게 돼요. 그런데 퇴근은 누가 시키는 사람이 없으니까 번역이 좀 잘되는 날에는 밤새워서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다음 날에 지장이 없도록 제때 퇴근하는 습관을 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2023년에는 열세 권을 번역했다. 송섬별 번역가는 너무 많이 번역해서 부끄럽다고 말했다. “이상적으로는 1년에 한 서너 권 하는 게 좋은 것 같은데, 출판사의 일정도 있고 사정도 있으니까요. 전업이다 보니 번역료 지급이 좀 늦어지면 그 부분을 메워야 하기도 하고요. 좀 안타까운 일이죠.” 무리한 탓인지 작년부터 건강이 나빠져 종종 마감을 제대로 못 지키기도 했다. 그래서 가까운 편집자를 통해 〈시사IN〉 '올해의 번역가'로 뽑혔다는 소식을 문자로 전해 들었을 때, 처음 보낸 답장은 ‘띠용?’이었다.
“사실 번역가가 주목받는 경우는 잘 없잖아요. 해마다 〈시사IN〉에서 뽑는 올해의 번역가 기사를 찾아봤거든요. 20대에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도 인터뷰를 보면서 ‘이 선생님처럼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 몇 권을 번역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보곤 했어요. 그런데 최근 몸이 안 좋아서 편집자 선생님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잦았는데도 좋게 봐주셨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네요.”
10년 전에는 ‘여성, 성소수자, 노인, 청소년이 등장하는 책’이 더욱 팔리지 않았다. 출판사에 ‘여기 이렇게 좋은 책이 있다’고 기획서를 쓰고 기다릴 때가 많았지만 이제는 편집자들이 먼저 송섬별 번역가를 찾는다. “한 3~4년 전부터 ‘책을 보고 연락을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어요. 다루는 분야가 좀 확실해지니까 그런 책을 작업할 때 저를 먼저 떠올려주는 것 같아요. 성덕(성공한 덕후)이죠. ‘내가 감히 이런 작품을 번역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아요.”
10년 차 전업 번역가의 현실적 조언
올해 마지막으로 작업한 〈페이지 보이〉 역시 제안받은 책 중 하나다. 해외판이 나오기 전부터 미완성 원고를 한 챕터씩 받아서 번역했다. “편집자와 정말 즐겁게 작업했어요. ‘지금 16장 번역하고 있는데 아직도 엘리엇은 불행해 보여요. 언제쯤 행복해질까요?’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요. 사실 번역가는 원고만 넘기면 되지만 표지는 어떻게 될지, 제목은 뭐로 정해질지 너무 궁금해서 여쭤봤는데 출판사에서도 흔쾌히 함께 상의해주었고요.”
책을 만든 기억은 행복했지만 정작 책이 나온 뒤의 반응이 견디기 힘들었다. “작업하는 중에 해외에서 책이 나왔는데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가 엄청나게 심해진 거예요. 국내에서도 책이 나오기 전에 다른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잠깐 언급했는데, 거기에도 끔찍한 댓글이 많이 달렸고요. 이 책을 만든다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하는 반응이 괴로웠어요.”
그럼에도 10년 동안 꿋꿋하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은 책을 번역해온 이유는 단순하다. “누군가는 정말 이런 책을 읽고 안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말 그대로 목숨을 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싶은 책이 있어요.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을 〈사라지지 않는 여름〉이라는 작품이 그랬고요, 여성들의 분노를 다룬 작품 〈불태워라〉도 그랬어요.” 독자들이 그를 일컬어 ‘믿고 보는 송섬별’이라 말하는 이유다.
내년에도 그의 작품은 이어진다. 시각장애인의 회고록을 공들여 준비 중이다. 동영상으로 점자 읽는 법 강의를 듣고 있고, 점자도서관 견학도 신청해두었다. “좋은 번역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아직 어려운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틀리지 않아야 해요. 내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에게 가르치는 것과 비슷하니까요. 번역은 독서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행위인 것 같아요.”
송섬별 번역가는 앞으로 번역을 조금 줄이는 대신 읽거나 쓰는 양을 늘리고 싶다고 말했다. 계속 이렇게 하기에는 책을 너무 사랑해서, 지치지 않고 사랑하고 싶어서다. 후배들에게도 번역이 꼭 젊을 때 해야 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해주고 싶다고 했다. “물론 젊은 감각이 필요한 번역도 있지만 그건 극히 일부예요. 번역은 오히려 연륜이 쌓일수록 잘 되거든요. 수영 같은 거죠. 수영은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운동이지만 꼭 20대 때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젊을 때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먼저 권해보고 싶어요.”
동시에 현실적 조언도 잊지 않았다. “첫 3~4년 동안 내용증명 쓰는 법과 법률 상담 받는 과정을 너무 잘 알게 됐어요. 외주 번역가는 회사에서 지급을 미룰 때 제일 끝에 있는 사람이거든요. 먼저 번역료를 올려주겠다고 말하는 출판사는 없었어요. 자신의 능력에 맞춰 제안해서 조금씩, 몇백 원씩 올려야 해요.” 산전수전을 다 겪은 10년 차 전업 번역가 송섬별씨는 후배들에게 ‘어떤 번역가’라는 평가보다 ‘도움되는 출판 노동자 선배’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슬프고도 현실적인 ‘수상 소감’이었다.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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