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불혹의 김정은
경제난에 令은 안 서고 딸 등장에 “아들은?” 수군
김정은의 40회 생일(1월 8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북이 중시하는 ‘꺾어지는 해’이지만 경축 동향은 감지되지 않는다. 김일성·김정일 생일을 ‘민족 최대 명절’로 성대히 기념하는 것과 딴판이다. 김정은 생일은 집권 12년이 지나도록 명절 지정은커녕 공개도 하지 않고 있다. 2020년엔 ‘명절 언급, 행사 진행 엄금’ 지시까지 내렸다. 알더라도 입 다물란 것이다.
북 주민들은 김일성이 태어난 평양 만경대와 김정일 생가로 날조된 백두산 밀영을 성지로 떠받든다. 탁아소 때부터 그러라고 배운다. 각급 학교에선 이른바 ‘백두산 4대 장군’ 일대기가 각각 별도 교과목이다. 총 수업시수의 30% 정도다. 조작의 산물이지만 김일성·김정숙·김정일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가 상세히 기술돼 있다. ‘4대 장군’ 중 김정은만 출생에 관한 기술이 없다. 순례할 성지도 없다. 이상하지만 아무도 내색은 못 한다.
김정은 탄생설화가 미완인 것은 모친 고용희 때문이다. 북은 김정은 집권을 즈음해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님’이란 간부용 기록영화를 만들어 고용희 우상화를 시도하다 돌연 중단했다. 영상이 유출돼 고용희의 출신 성분이 구설에 오른 직후였다. 아무리 수령이라도 북송 재일교포 출신의 기쁨조 무용수를 국모로 내세울 수 없는 게 북한 현실이다. 그랬다간 ‘백두혈통이 후지산 줄기에 오염됐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이모 고용숙 부부와 외삼촌 고동훈은 서방에 망명했다. 외조부 고경택은 일제 부역 의혹이 있다. 외가 전체가 북이 경멸하는 ‘적대계층’이다. 날조와 창작에도 한계가 있다. 조작에 도가 튼 노동당 선전 전문가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2019년 3월 김정은이 “수령의 혁명 활동과 풍모를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게 된다”며 신격화 중단을 공개 지시한 배경이 짐작된다.
김일성은 고용희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김정은은 안 만나주면서 이복형 김정남은 손자로 인정했다. 살의(殺意)는 그때부터 품었을 것이다. 고용희는 유선암을 앓다 2004년 파리에서 숨졌다. 스위스에 있던 김정은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2012년 집권하자마자 평양산원에 유선종양연구소를 세우고, 어머니날(11월 16일)을 기념일로 지정하고, 전국어머니대회를 부활시킨 건 우연이 아니다.
이달 초 김정은은 전국어머니대회를 소집했다. 11년 만이다. 살아있다면 70세일 고용희를 추모하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개회사 낭독 때부터 흐느낀 김정은은 부하의 보고를 듣다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라의 대들보로 자라는 자식의 성장을 보는 것보다 어머니에게 큰 낙은 없다’는 대목이었다. 그리움과 콤플렉스, 절대권력을 쥐고도 고용희를 내세울 수 없는 무력감이 뒤섞였을 것이다.
김정은 생일을 쉬쉬하고 우상화를 중단한 것을 북한은 ‘애민주의’로 포장했다. 진짜 ‘애민’을 했다면 인민들 형편이 조금은 나아졌어야 한다. 핵에 집착하니 ‘이밥에 고깃국’에선 외려 멀어졌다.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던 약속은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로 슬그머니 바꿨다. 장마당뿐 아니라 권부 핵심에서도 볼멘소리가 나온다. 영(令)이 설 리가 없다.
지난 1년간 김정은은 열 살짜리 딸을 무력시위 현장에 계속 대동했다. 극심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파격을 넘어 기행이다. 핵무력 고도화란 업적을 부각해 4대 세습을 기정사실화하려고 무리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세자 책봉은 서두르지 않는 법이다. 왕의 권력은 줄고 후계자는 표적이 된다.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긴 것이다.
정보 당국이 존재를 확신했던 장남의 행방이 묘연하다. 스위스 유학 때부터 사귄 현송월의 소생이란 설, 지능이 낮아 후계 구도에서 밀렸다는 설이 나돈다. 평양의 수군거림이 광화문에 닿고 있다. 마흔도 안 된 김정은의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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