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성탄절에 의식을 잃은 그 사내
성탄절엔 의식을 잃은 사람이 왔다.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어 이웃이 신고했다. 노년 남성이 잘 정돈된 거실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술병이나 유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응급실 침대에 누운 그는 아무리 깨워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도 아무리 수배해 봐야 찾을 수 없었다. 이웃 또한 그가 누군가와 함께 외출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의식을 잃어버린 무연고자였다. 의식 없는 사람을 마주하는 사건은 보통 삶에서는 드물지만, 여기서는 지나칠 정도로 많다. 의식을 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여기 맡겨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사 또한 의료진에게 맡겨진다. 우리는 치명적 질환을 우선 찾아내는 검사 순서를 마련해 두었다. 일단 머리 시티(CT)를 찍는다. 뇌출혈은 골든 타임이 있고 빨리 수술해야 한다. 다음으로 엠알아이(MRI)를 촬영한다. 뇌경색 또한 골든 타임이 있으며 빠른 처치가 필요하다. 동시에 혈액 검사로 내과 질환을 감별한다. 그 뒤 뇌간이 막히는 혈관 질환이나 뇌수막염을 의심한다. 응급실에서 의학적 근거로 마련해놓은 차례다.
그의 CT와 MRI에서는 어떤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피검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정하게 누워서 숨을 몰아쉬는 그는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신경과 의사와 처치를 논의했다. “뇌수막염일까요?” “백혈구 수치도 낮고 발열도 없어 가능성이 떨어져 보이네요. 그런데 의식 저하가 설명되지 않는군요.” 감별을 위해서는 목석 같은 환자를 옆으로 뉘고 바늘을 허리에 찔러 뇌척수액을 받아야 했다. 위험을 동반한 검사였고 무연고자라서 곤란한 점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진단을 놓치면 안 되었다. 의식 저하를 원인 파악 없이 방치하는 일은 위험했다. 검사는 필요한 절차였다. 그런데 문득 잠이 든 것 같은 그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쉰 뒤 천천히 내쉬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호흡이었다.
나는 잠시만 기다려보자고 했다. 무슨 생각이 들어 그의 옷가지를 뒤졌다. 안주머니에서 접은 종이 뭉치가 나왔다. 가로와 세로로 한 번씩 접은 채 오래 품어온 것처럼 모서리가 해져 있었다. 첫 장은 차용증이었다. 2005년에 빌린 원금 200만원이 현재 1500만원이 되어 있었다. 추심 업체도 다섯 번 바뀌었다. 추심을 당할 때마다 채권자가 5만원을 지불해야 하는 내용도 있었다. 둘째 장은 진단서였다. 아내로 보이는 노년 여성 것이었다. 중증 파킨슨병과 정신과 질환이 적혀 있었다. 무엇인가를 증명하고자 했는지 여러 의료 기관을 돌아다닌 흔적도 있었다. 종합해보면 그의 아내는 정상 생활이 불가능해 보였다. 셋째는 지방에 있는 요양원의 입원 확인서였다. 진단서 주인이 입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서류였다. 넷째는 카드 대금 청구서였다. 이런저런 생필품을 구매한 내역이었다. 청구서 아래에는 지불이 늦어질 때 발생하는 몇 가지 불이익이 건조한 문체로 기술되어 있었다. 이 서류를 정돈해서 굳이 주머니에 간직한 사람이 성탄절에 의식을 잃어버린 채 발견되었다.
“뇌척수액 검사는 중단합시다. 음독 환자 같습니다. 혈액 샘플을 약물 분석실로 보내겠습니다.”
그는 혼미한 의식으로 다른 세상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추심 업자도 없고 아내는 아프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치료하면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발견된 서류 몇 장으로 이 사람 인생을 진단하는 것이 가능한가? 당연히 가능하지 않다. 나는 이 사람의 인생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뇌염에 걸렸거나 뇌저 동맥이 막혔을 가능성보다는 약을 잔뜩 삼켰을 가능성에 더 많은 것을 걸어야 했다. 나는 이 사람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그에 근거한다. 환자의 진단은 그들이 직접 가지고 있다. CT나 MRI가 아니라 그 사람 주머니에 들어 있다. 슬프게도 이쪽이 늘 진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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