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가족 돌보는 아이, QR코드로 도움과 연결해주세요”

이지운 기자 2023. 12. 2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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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우산 ‘돌봄약봉투’ 캠페인… ‘가족돌봄아동’ 명확한 정의 없어
도움 받을 수 있어도 인지 못해… 전국 약국에 특수 제작 봉투 배포
QR코드 접속해 지원사업 신청… 약사 등 이웃이 대신 신청 가능
초록우산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가족돌봄아동을 발굴하기 위해 전국 약국 400여 곳과 함께 ‘돌봄약봉투’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연로한 할머니·할아버지 등을 대신해 약을 타러 다니는 가족돌봄아동들이 손쉽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진은 돌봄약봉투 캠페인 영상 광고의 한 장면. 초록우산 제공
“할머니가 드셔야 하는 약의 종류가 매일 다르거든요. 하나씩 제가 분류해 드려야 해요.”

조손가정에서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 중학교 1학년 민수(가명·13)는 매주 서로 다른 색의 알약 수십 개를 분류해야 한다. 민수와 동생 민철이를 길러 주신 할머니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민수는 집을 나간 부모를 대신해 할머니 병 수발을 들고 있다. 할머니 약 챙기기는 기본이고, 집 청소와 마트에서 장 본 짐 옮기기도 민수의 몫이다.

●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가족돌봄아동

민수처럼 돌봄을 받아야 할 시기에 도리어 가족을 돌봐야 하는 아동을 ‘가족돌봄아동’ 또는 ‘영 케어러(young carer)’라고 부른다. 하지만 국내에는 가족돌봄아동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민수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지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족돌봄아동에 대한 지원 체계가 없고, 서울과 부산 중구 등 4개 지방자치단체가 자체적으로 조례를 마련해 지원할 뿐이다.

반면 해외에선 일찍이 가족돌봄아동을 법적으로 명확히 정의해 지원 대책을 내놓고 있다. 영국의 경우 아동과 가족법에 따라 가족 등에게 돌봄을 제공하거나 제공할 의향이 있는 사람 중 18세 미만을 ‘영 케어러’로, 18∼24세를 ‘영 어덜트 케어러(young adult carer)’로 규정한다. 영국 정부는 이들에게 지원금을 주고, 교육훈련 프로그램과 긴급 지원도 제공한다. 호주 역시 25세 이하 ‘영 케어러’에게 연간 3000호주달러(약 265만 원)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간병부터 양육, 아르바이트까지

중학교 1학년 지혜(가명·13)도 민수와 같은 가족돌봄아동이다. 지혜는 건강이 좋지 않은 할머니를 대신해 초등학교 4학년인 동생을 돌본다. 아침에 동생을 깨워 학교에 보내는 것도, 하교 후에 주변에서 챙겨 준 반찬으로 동생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지혜가 매일 해야 하는 일이다.

아동복지전문기관 초록우산은 지난해 재단이 지원하고 있는 만 7∼24세 아동·청소년 1494명을 대상으로 가족돌봄 현황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응답자 중 46%(686명)가 가족돌봄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약계층 아동·청소년 상당수가 학업과 가족돌봄을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조사를 통해 확인된 가족돌봄아동 중 13.4%는 본인이 집에서 돌봄노동을 하는 유일한 사람인 것으로 나타났고, 돌봄노동을 할 다른 가족도 있지만 본인이 가장 많은 역할을 하는 경우도 22.4%에 이르렀다.

초록우산의 이번 조사 결과 가족돌봄아동 중 50%는 1년 이상 돌봄노동을 수행하고 있었다. 5년 이상 가족을 돌봐 온 경우도 28%에 이르렀다. 돌봄 기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이 이 시기에 해야 할 학업이나 진로 설정, 정서 발달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초록우산에 따르면 가족돌봄아동 3명 중 1명(36%)은 심리적·정서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진로·진학(24%)과 학업(12%)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도 적지 않았다.

● 만화 그려진 약 봉투로 가족돌봄아동 발굴

더 큰 문제는 가족돌봄아동의 경우 다른 취약계층에 비해 받을 수 있는 지원이 적을뿐더러,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올해 서울시 조사 결과를 보면 가족돌봄아동의 76%는 본인이 받을 수 있는 외부 지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민수나 지혜 같은 아이들 중 상당수가 ‘효자, 효녀’라고만 불릴 뿐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초록우산이 대한약사회와 함께 ‘돌봄 약 봉투’ 캠페인을 지난달 시작한 건 이렇듯 지원에서 소외돼 있는 ‘숨은 가족돌봄아동’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초록우산은 전국 약국 400여 곳에 특수 제작한 약 봉투를 배포했다. 일반적인 약 봉투라면 약국 이름이 쓰여 있을 자리에 가족돌봄아동들이 겪는 어려움을 캐리커처 형태로 그려 넣었다.

아픈 가족을 대신해 약을 타러 온 가족돌봄아동이 “내 이야기구나” 하며 쉽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초록우산 관계자는 “보통 아이들과 다르게 가족돌봄아동의 하루 동선엔 약국이 빠지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는 분석에 따라 이 같은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초록우산은 가족돌봄아동 1명이 가족을 돌보는 기간 동안 평균 4380개의 약 봉투를 수령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초록우산에서 배포한 돌봄약봉투에는 가족돌봄아동들이 매일 겪는 어려운 상황들이 그려져 있다. 스마트폰으로 약 봉투에 찍힌 QR코드를 스캔하면 가족돌봄아동 지원 신청 홈페이지로 연결된다.
돌봄 약 봉투 캠페인을 통한 가족돌봄아동 지원 신청은 내년 3월 말까지 가능하다. 돌봄 약 봉투에 인쇄된 QR코드를 통해 지원 신청 홈페이지에 접속할 수 있고, 전화로도 신청할 수 있다. 가족돌봄아동 당사자가 아닌 약사나 이웃 주민도 대신 신청할 수 있다. 황영기 초록우산 회장은 “아동들이 직면한 가족돌봄 문제는 가정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라며 “중장기적으로는 관련법 제정 등을 통해 공적인 복지 서비스 영역에서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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