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과유불급 이순신, 무자비한 음파 공격으로 천만 벽 뚫을까, 영화 ‘노량’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35번째 레터는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통해 본 연말 극장가 얘깁니다. ‘노량’ 리뷰는 개봉 직후에 백수진 기자가 보내드렸죠. 저는 개봉 이후 반응, 특히 천만영화 기대 위주로 말씀드릴게요. 저는 시사회 때 못 보고 지난주, 즉 개봉 첫 주말에 봤습니다. 보고난 첫 소감? “음, 천만은 어렵겠다.” 그 이유는 아래에 말씀드릴게요.
우선 데이터부터 보실까요. ‘노량’은 개봉 첫 주에 168만명을 기록했습니다. 많은 거 아니냐고요? 아뇨, 코로나 분위기가 이어졌던 작년 여름 개봉한 전작 ‘한산’이 개봉 첫 주에 227만이었습니다. 26일 현재 좌석판매율 1위는 어느 영화일까요? 개봉 한 달이 지난 ‘서울의 봄’입니다. ‘노량’은 4위네요.
저보다 ‘노량’을 먼저 본 친구가 그러더군요. “너, 노량에서 왜장이 음파 공격 받고 죽은 거 알아?” “응? 노량이 무슨 우뢰매도 아니고.” “봐. 보면 알아.” 제 친구는 그 장면에서 푸하 웃었다고 했습니다. “거기 북소리 진짜. 백윤식이 그만 좀 하라던데 내말이 계란말이.”
친구 말대로였습니다.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가 음파 공격(?)을 받고 절규하더군요. 문제의 이순신 북소리 장면입니다. 저는 북소리 장면 같은 ‘노량’의 과유불급이 천만영화 기대를 낮추는 이유 중 하나라고 봅니다. 해전(海戰) 장면, 잘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길어요. 무조건 길게, 오래, 쏟아붓는다고 느낌이 배가되던가요. 관객의 기억에 ‘노량 해전 너무 멋있더라’가 아니라 ‘노량 해전 너무 길더라’는 기억만 남죠.
발레리나의 32회전 푸에테는 언제 봐도 감탄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백조의 호수' 4막 내내 푸에테만 보여준다고 생각해보세요. 과연 푸에테가 기억 속에 감탄으로 남을까요, 지겨움으로 남을까요. 관객의 기억이 바로 입소문입니다. “노량 어땠어?”라는 지인의 물음에 “해전이 너무 길었어”가 답이 되면 천만 가기 힘듭니다. 그런데 노량이 딱 그렇더군요.
북소리 과유불급도 마찬가지입니다. 길기도 하거니와 그 장면에서 보여지는 이순신의 모습이 저는 리더답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리더. 저는 전쟁 영화를 볼 때 전투 장면보다 리더십을 주로 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어떤 가치를 위주로 판단하는지.
전쟁을 끝내야 한다며 전투를 고집하는 이순신은 왜구에 살해당한 아들과 먼저 전사한 이들의 환영에 자주 시달리죠. 밥 먹다 혹은 세수하다가도 아니고 전투 한가운데서도 환영에 사로잡혀 휘청거리는 묘사는 누구보다 차갑고 냉정해야 할 리더로서는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보였네요. 그가 북을 죽어라 칠 때는 전쟁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아니라 환영에 시달리는 심인성 질환자 같더군요. 이런 이순신으로, ‘서울의 봄'이 건재한 극장가에서 천만이라.
등장인물들이 말끝마다 분하다는 듯이 “리순신!” “리순신!” “리순신!” 부르짖는 장면도 지나치게 잦아요. 그렇게 반복해서 밑줄을 그어주지 않아도 그의 존재가 주는 무게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텐데요. 반복이라 하니 장군별도 생각나네요. 자꾸 강조 또 강조하는 건 3부작을 마무리하는 김한민 감독의 아쉬움 때문이었을까요.
요즘 같은 영화가에서 천만영화가 되려면 흔히 말하는 대세감이 중요합니다. ‘그 영화는 봐야된다'는 쏠림이 필요하다는 거죠. ‘서울의 봄'은 겨울 대작 나오기 전 숨고르기 위주였던 11월 영화가에서 단독 드리블로 대세감을 만드는데 성공해서 12월 성수기까지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노량’이 홀로 대단해도 ‘서울의 봄' 때문에 관객이 나뉠 상황이죠.
‘서울의 봄' 시사회 때가 기억나네요. 엔딩크레딧 올라가자마자 (저쪽 자리에서 떨어져 보던) 백수진 기자에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지금 다시 확인해보니 이 문장이네요. “이거 너무 재밌네.” (백수진 기자의 답은 “그러게욬 ㅋㅋㅋ” 였네요. 예쁘죠?) 저는 급하게 그날 저녁 약속 뒤로 미루고 저녁에 있던 VIP시사회 때 자리를 부탁해 바로 한 번 더 봤습니다. 네, 천만영화는 이런 영화입니다. 담당기자가 ‘어머, 이건 당장 또 봐야해'라고 생각하게 만들죠.
다시 리더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북소리 지나치다, 해전 너무 길다는 말을 김한민 감독 주변에서 아무도 안 했을까요? 아뇨, 저는 했을 거라고 봅니다. 사람 생각 비슷해요. 그런데 지금처럼 나온 건 왜일까요. 감독의 판단일 거에요. 해전의 퀄리티는 VFX 회사에서 올릴 수 있지만, 어디에 얼만큼 어떻게 넣을지는 최종적으로 감독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감독은 대단하면서도 외롭고 괴로운 자리인 것 같습니다. 모든 리더가 그렇듯.
물론 재밌다고 전부 천만영화가 되거나, 천만영화라고 다 재밌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그때의 시장 상황이 크게 좌우하죠. ‘노량'이 ‘서울의 봄' 기세를 잠재우고 천만이 되려면 아주아주아주 잘 나왔어야 합니다. 이순신의 음파 공격으로 왜장은 무릎 꿇렸지만 전두광은 어려울 듯 합니다. 이러다 천만 되면? 함께 박수쳐야죠. 한국영화가 잘 되는 건 담당기자에게도 반가운 소식입니다. 기꺼이 틀리고 싶습니다.
이번 레터가 올해 마지막 보내드리는 레터입니다. 올 한 해 레터를 읽어봐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신문 말고 다른 플랫폼으로 독자를 만나보려는 실험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저 멀리 뉴욕과 도쿄에서 레터를 잘 읽었다며 이메일을 보내주신 독자도 있었고, 고등학교 동창에게 수년 만에 반가운 카톡도 받았네요. (”이런 걸 쓰는 기자는 도대체 누구야?”라며 이름을 확인해봤더니 저였다고 합니다.) 내년엔 더 읽을 만한 레터로 찾아뵙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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