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염치(廉恥) 없는 사회

박병진 2023. 12. 27.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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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한 해 비양심 행태 자주 목격
올바른 인성 교육 근간 붕괴 탓
정치인들이 파렴치 만연 부추겨
새해 부끄러움 아는 세상 되길

성탄절 아침 모처럼 함박눈이 쏟아졌다. 지하철을 탈 요량으로 역까지 데려다 줄 택시를 호출했다. 고맙게도 택시기사가 아파트 지하주차장까지 왔다. 인사를 건네는데 “아니 이 넓은 아파트도 이중주차를 하느냐”며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한눈에 봐도 택시가 지나기 힘들 정도로 얌체 주차는 극성이다. “차량을 1대 이상 보유하고 있는 가구가 많다”고 하자 자기가 사는 아파트에는 무려 8대의 차를 보유한 세대도 있다며 목청을 높인다. 자연스럽게 “설마”가 튀어나오고, “할아버지 할머니에 부모, 자식까지 출퇴근용 법인 차량에 자가용까지…. 기본 2대 이상이니 다툼은 일상”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아파트 시설도 문제지만 공동체 규범은 아랑곳없이 자신만 편하면 된다는 비양심, 파렴치(破廉恥)가 만연한 탓이다. 올 한 해 자주 목격된 장면들이다.

지난 4일 경기 김포시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고급 외제차 차주가 주차면 3칸을 차지하고는 떡하니 ‘가로 주차’를 해 논란을 빚었다. 해당 차주는 장애인 전용구역에 몇 차례 차량을 세웠다가 불법주차 신고를 당한 데 앙심을 품고 이런 행동을 벌였다고 했다. 뻔뻔함이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강남 한복판에서 주차 시비 도중 흉기로 상대방을 협박한 20대 람보르기니 차주가 재판에 넘겨진 일이나, 약물에 취한 채 차량을 몰다가 20대 여성을 치어 숨지게 한 이른바 ‘롤스로이스 사건’ 운전자 경우가 그렇다. 이들에게서 반성의 기미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세간의 분노가 폭발했다.
박병진 논설위원
올바른 인성을 가르쳐야 할 교육의 근간이 무너진 탓이기도 하다. 지난 7월18일 발생한 서울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으로 비롯된 교육 현장에서의 교권 추락은 이런 염치없는 사회 그 자체다. 학생들 싸움을 말리다 고소를 당하는 교사가 부지기수라거나, 교사 99%가 학부모와 학생으로부터 폭행과 폭언을 경험했다는 소식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학부모의 타깃이 돼 아동학대 누명을 뒤집어쓰는 경우도 다반사다. 스승과 제자가 있어야 할 학교가 법적 다툼이 횡행하는 전쟁터로 변모했다. 한여름 뙤약볕에 전국의 교사 20만명이 길거리로 나섰다. 교권 우롱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정치판은 이런 파렴치를 부추긴다. 최근 보복운전 혐의로 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은 더불어민주당 이경 상근부대변인도 그렇다. 법원에서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대리운전 기사가 보복운전을 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조국 사태로 바닥을 드러낸 거대 야당의 도덕성은 이제 윤리 기준을 위반한 데서 벗어나 아예 윤리 기준 자체를 없애려 든다. 각종 사건에서 거짓말 의혹에 휩싸인 이재명 대표 사례를 비롯해 이런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러고도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눈 하나 깜짝 않는다. ‘개딸’ 등 민주당 지지층도 요지부동이다.

여권이라고 다를 바 없다. 대통령 부인이 개인 사무실에서 명품백을 선물받는 장면까지 보도된 마당이다. ‘함정 취재’라고 둘러대지만 대통령 부인이 수백만원짜리 선물을 스스럼없이 받았다는 건 국민 눈엔 영락없이 염치없는 행동이다. 대통령실은 입을 닫고 해외 순방 도중 수행원을 대거 대동하고 쇼핑에 나섰다가 논란이 일었을 때처럼 대충 넘어가길 바랐을 것이나 쉽지 않다. “김건희 특검법은 협상 불가”라는 입장에선 오히려 전세를 뒤집지 못하는 다급함까지 읽힌다. 이쯤 되면 진작 특별감찰관을 임명하거나, 제2부속실을 둬 관리에 나섰더라면 하고 땅을 치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야당이 ‘깽판’을 쳐도 온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불가이무치’(人不可以無恥). 맹자 ‘진심편’(盡心篇)에 나오는 구절이다. ‘염치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세밑에 자주 언급된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비일비재한데도 책임지는 이가 없어서일 게다. 2024년은 갑진년 청룡(靑龍)의 해다. 갈등과 분열을 딛고 대한민국이 다시 도약하길 기대한다. 더불어 정치인들이 여론을 호도하고 양심까지는 팔지 말았으면 한다. 그럴 수 있을까.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 있는 사회가 그 전제조건일 수 있다.

박병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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