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가습기 참사 기획 1편] "일상 지운 참사, 계속되는 고통"…생존 피해자 30% 아동·청소년
[EBS 뉴스]
"아이들에게도 안심", 12년 전 팔렸던 한 가습기 살균제에 적힌 글입니다.
이 문구를 믿고 제품을 산 소비자의 상당수가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고 깨끗한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던 부모들이었을 겁니다.
사망 피해자 대부분이 어린아이들에 집중된 가습기 살균제 참사, 그 기록을 EBS 뉴스가 오늘부터 이틀에 걸쳐, 다시 들여다보려 합니다.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단독으로 입수한 피해자 현황을 분석한 결과, 생존 피해자 중에서도 아동·청소년 비중이 높았고, 누적된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피해자의 하루를 진태희 기자가 따라가 봤습니다.
[리포트]
새벽 5시 반부터 전주에서 달려온 버스가 서울로 들어옵니다.
왕복 6시간의 만만찮은 여정이지만, 언니부터 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총동원됩니다.
주변의 도움 없이는 짧은 거리조차 이동이 어려운 막내를 위해서입니다.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정신과 진료실.
사람과 만나는 게 아직 두려운 동생은, 언니를 대기시간 내내 꼭 껴안습니다.
인터뷰: 이요한 / 가습기 살균제 피해 청소년 아버지
"인생이 전부 다 망가졌으니까 그러니까 이 병도 생기고 마음의 병도 생기고 모든 게 자기는 다 무너졌다고 생각하거든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아이의 문을 언제 바깥으로 열지 그게 지금 제일 힘들거든요."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막내는 숨을 못 쉬고 쓰러지길 반복하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야 중증 피해자로 인정받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무너진 막내가, 유일하게 입을 떼는 순간은 놀이치료 선생님을 만날 때입니다.
"찾고 있는 거 있어 혹시?"
"…."
인터뷰: 류경숙 센터장 / 강남GEM아동가족상담센터
"그게 왜 가습기 살균제하고 연관이 있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학교를 자주 못 나가니까 소외가 되는 거죠. 항상 자리는 비어 있고 너 오늘은 왜 왔어, 아니면 네 목에서 내는 소리가 너무 신경 쓰여, 아니면 네가 VIP냐 이런 식으로 아이들이 이야기를 하잖아요."
특수학급에 배정돼 겨우 학교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듭니다.
인터뷰: 이요한 / 가습기 살균제 피해 청소년 아버지
"한 번은 (학교에서) 계단 올라가다가 거기서 그냥 쓰러져버린 거예요.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 이제 힘들다. 계단 올라가는 것도 힘들고 폐 기능도 점점 떨어져 있고 학교 다니기가 힘들 것 같다고…."
학교와 병원을 오가며 종일 아이를 돌보던 아빠는 결국 하던 일까지 그만뒀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여정을 이어가는 건, 그나마 이것만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요한 / 가습기 살균제 피해 청소년 아버지
"간병을 해야 되고 공부도 가르쳐야 되고 미성년자 아이들을 둔 부모님들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거든요. OO이가 막 울고 죽고 싶다고 했을 때 저도 같이 죽고 싶어가지고 그런 생각까지 들었거든요. 정말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돼…."
EBS 취재진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현황을 단독으로 입수해 전수 추적했습니다.
올해 11월까지 정부가 공식으로 인정한 피해자는 모두 5천417명.
피해자가 가장 많은 연령대는 10대로, 24%를 차지합니다.
생존자로 좁혀봐도, 10대가 1천288명으로 가장 많습니다.
지나온 삶보다 앞으로 더 긴 시간, 고통을 짊어지고 갈 아이들이 1천 명을 넘는단 얘깁니다.
연령대를 좀 더 나눠봤더니, 중학생 나이대가 542명, 고등학생 나이대는 509명이었습니다.
초등학생 나이대는 89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0대의 피해가 유독 심각한 이유는 뭘까요.
가습기 살균제가 산모와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많이 사용돼, 피해가 영유아에 집중됐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최예용 소장 / 환경보건시민센터
"방바닥에 엄마랑 같이 (누워) 있기 때문에 살균 성분이 지속적으로 땅 아래쪽으로 떨어지다 보니까 방이나 침대에 누워 있는 영유아들에게 집중적으로 노출이 되는 거고요. 똑같은 노출이 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체중당 노출량이 훨씬 더 많아요. 어른보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국 역학회의 조사 결과, 보통 아이들보다 삶의 질이 매우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수는 불면증과 우울증, 불안장애를 겪고 있었고,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는 경우가 응답자의 15.9%, 자살을 시도한 사례도 4.4%나 됐습니다.
더 큰 문제는 현재의 호흡기 질환에 그치지 않고, 각종 운동장애나 뇌심혈관 질환, 심지어는 암 등, 다른 질병으로 번질 가능성도 크다는 겁니다.
인터뷰: 홍수종 교수 /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정상 애들에 비해 폐활량이 떨어집니다. 또 20살 돼서 검사를 해보면 11살, 13살 때보다 더 떨어져 있는 거예요. 나중에 나이 들었을 때 30대, 40대, 40대 중반만 되면 만성 폐쇄성 폐질환 이런 데로 접근할 가능성이 높구나…."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피해 아동을 위해 생애주기별 지원책을 마련하라고 정부에 권고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뚜렷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인터뷰: 최성미 前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진상규명국 2과장
"(권고안을) 그러니까 사실상 거의 이행을 하지 않고 있다고, 이전 정부에서도 했던 그 지원 수준에서 조금 더 지속하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례없는 참사가 벌어진 지 12년.
하지만 고통을 온전히 개인이 떠안아야 하는 현실은 변하지 않은 채, 또다시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EBS뉴스 진태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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