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소극장이 사라진다…자본·스타 없는 ‘작은 연극’의 눈물
2010년대 1000석 이상 대극장으로 중심 이동
시장논리만 적용 땐 다양성 잃고 획일화 우려
극장이 암전되자 급류처럼 휘몰아치는 록 음악에 빨려들었다. 관객들이 객석 194석을 전부 채웠다. 음악 박자에 맞춰 짝짝 박수를 치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기자는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전블루소극장에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관람했다. ‘아침 이슬’ ‘상록수’로 유명한 가수 김민기가 극단 학전을 창단하고 독일 원작을 한국 현실에 맞춰 재창작한 대표작이다. 현재 톱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도 젊은 시절 출연해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불렸다.
<지하철 1호선>이 끝나자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지하에서 지상까지 이어지는 계단에 일렬로 서서 관객들에게 일일이 “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넸다. 이 작품은 오는 31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더는 학전블루소극장에선 볼 수 없다. 학전이 경영난에 시달린 끝에 개관일인 내년 3월15일 폐관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폐관 소식에 관객이 몰려 <지하철 1호선>은 현재 모든 회차가 매진됐다. 하지만 오랫동안 학전의 객석은 빈자리가 많았다. 김민기 학전 대표는 ‘어린이에게는 어린이극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주로 어린이극을 무대에 올려왔다.
김성민 학전 총무팀장은 1993년 학전 매표소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현재까지 스태프로 일했다. 김 팀장은 “대학로에서 아예 연극문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불편한 소극장에서 소자본 연극을 보려는 관객은 줄어들고 있어요. 제작자도 스타 배우의 출연료를 맞추려고 자본을 끌어오는 데 집중하죠. 저희는 어린이극 하나를 올리려고 배우부터 스태프까지 20여명이 수개월 달라붙는데 어떤 관객께선 1만~2만원 티켓값도 ‘비싸다’고 하세요. 그러면 할 말이 없어요.”
소극장 보호한다며 밀어냈다
대학로는 혜화동 로터리에서부터 이화동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약 1㎞ 직선도로의 양쪽 거리를 뜻한다. 대학로에 예술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시기는 1975년 서울대가 관악구로 이전하고 1976년 마로니에 공원이 조성되면서부터이다. 1979년 대학로 최초 민간 소극장인 샘터파랑새극장에 이어 1981년 문화예술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이 개관했다. 1981년 공연법 개정으로 소극장 설치가 자유로워지자 대학로에 연극인과 소극장이 모여들었다.
이후 대학로에 외부 자본이 유입되고 땅값이 치솟으면서 대학로를 활성화한 소극장들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났다. 2001년 종로구가 혜화동사무소에서 창경궁로까지 대명거리를 ‘차 없는 거리’로 조성하자 상업시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김미영 부산연구원 연구위원과 고진수 광운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2020년 논문 ‘대학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전개와 특성’에서 “차 없는 거리 조성은 대학로 일대 상업화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며 “대학로의 핵심 지역인 동숭동조차 노래방, 비디오방, 카페 등으로 채워지고 소극장을 비롯한 문화시설은 주변으로 이탈해 문화예술 공간으로서 대학로의 정체성은 점차 퇴색됐다”고 적었다.
서울시와 종로구는 2004년 대학로 소극장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해 대학로를 ‘문화지구’로 지정했다. 하지만 문화지구 지정은 소극장을 대학로 밖으로 더욱 밀어내는 역효과를 불렀다. 기업과 대학이 앞다퉈 뛰어들면서 대학로는 거대한 상권으로 변했다. 대학은 대관업에 나섰고 기업은 상업시설을 세웠다. 문화지구 정책은 건물주의 조세 감면 등에 국한돼 예술 현장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소극장 임대료와 대관료가 가파르게 동반 상승하면서 일부 소극장과 극단은 한성대 주변으로 옮겨 갔다.
임정혁 한국소극장협회 이사장은 “문화지구 지정 이후 건물주가 세액을 감면받으려고 극장에 임대하되 월세를 굉장히 많이 올렸다”며 “기업이 아닌 예술인이 운영하는 소극장의 매출은 계속 ‘마이너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건물주가 바뀌면서 극장에 ‘나가라’고 통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건물주가 나가라고 하면 극장은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하죠. 올해도 서울시 임차료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지만 건물주가 나가라고 해서 지원도 반납하고 쫓겨나는 소극장들이 있었어요.”
대학로 소극장 대부분은 건물을 임차한 세입자들이다. 현재 임대료는 200석 이하 기준으로 보증금 1억원에 월세 500만원 수준이다. 위치에 따라 월세 1000만원짜리 소극장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통상 건물 임대료는 지하보다 지상이 비싸지만 대학로는 지하가 지상보다 비싼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 극장에 지하를 임대하면서 지상보다 비싼 임대료를 받기 때문이다. 소극장이 건물주에게 내는 임차료가 오르면 소극장이 극단에 받는 대관료도 오를 수밖에 없다. 현재 소극장 대관료는 하루 50만~80만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극단이 높은 대관료를 감당하느라 제작비를 낮추면 좋은 작품을 만들기 어렵다는 지적도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극단의 열악한 사정은 배우와 스태프에 대한 ‘열정페이’ 압박으로 이어지기 쉽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1 예술인 실태조사’를 보면 1년 기준 연극 분야의 계약금액은 평균 518만원이다. 정부는 2013년부터 공연예술 분야에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했지만, 연극 분야에서 실제로 표준계약서를 사용하는 비율은 약 75%로 나타났다. 약 7.8%는 부당한 계약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공연시장은 호황, 소극장은 침체
공연시장은 올해 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맞았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을 보면 올해 3분기까지 국내 공연시장의 티켓 판매액은 8295억원에 달한다. 연말 매출까지 합하면 역대 최고를 기록한 지난해(9725억원)를 무난히 넘어 매출 1조원을 처음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공연시장을 이끄는 주역은 뮤지컬이다. 전체 시장의 절반에 이르는 매출을 차지한다. <오페라의 유령> <레베카> <베토벤> 등 매출 상위 20개 공연은 모두 1000석 이상의 대극장 뮤지컬이다. 조승우, 옥주현, 박효신 등 스타 배우들이 출연했다. 티켓 가격은 VIP석 기준 최고 19만원이었다.
2010년대 공연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옮겨가며 대학로 소극장은 점점 외면받았다. 무기한 진행하는 일부 ‘오픈런 공연’을 제외하면 좀체 수익을 내지 못했다. 서울문화재단의 ‘2013 대학로 연극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연극 종사자들은 대학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환경 요인으로 ‘대형 뮤지컬의 급속한 성장과 영향력 증대’(44.0%)를 1순위로 꼽았다. 2012년 배우세상소극장·대학로우리극장·바다씨어터, 2013년 학전그린소극장·창작극장·가변무대, 2015년 대학로극장·상상아트홀·김동수플레이하우스, 2017년 게릴라극장, 2019년 설치극장 정미소 등이 폐관했다.
특히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이어진 코로나19 팬데믹은 대학로 소극장들에 치명상을 입혔다. 방역지침에 따라 공연이 강제 취소되면서 공연단체의 대관은 없는데 건물주에게 임차료만 내는 시간이 계속됐다. 2020년 종로예술극장과 나무와물이 문을 닫았다. 올해는 학전뿐 아니라 한얼소극장도 건물주가 재계약을 거부해 폐관을 결정했다. 한얼소극장은 2002년부터 21년 동안 대사가 없는 연극인 무언극을 창작해 공연해왔다.
대학로에 소극장이 얼마나 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한국소극장협회는 대학로 소극장을 130~140개로 파악한다. KOPIS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대학로 공연시설은 101개다. 문체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 조사에선 2009년 94개에서 2013년 139개까지 늘어났다.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2021년 94개로 돌아왔다가 2022년 103개로 다시 늘었다. 다만 전수조사가 아니라 표본조사이기 때문에 공연시설 특성에 부적합하거나 운영을 일시 중단한 소극장 등은 모집단에서 빠졌다.
문화예술데이터연구소는 KOPIS를 분석해 실제 공연이 이뤄진 대학로 공연시설의 수를 집계했다. KOPIS로의 공연 정보 전송이 의무화된 이후부터 따져보면 2019년 92개, 2020년 81개, 2021년 82개, 2022년 86개였다. 한국소극장협회 기준으로는 전체 소극장의 절반 가까이, 예술경영지원센터 기준으로는 소극장 10개 중 1개 이상에서 1년 내내 공연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도준태 문화예술데이터연구소 대표는 “데이터에 약간 오차가 있겠지만 실제 폐업 신고만 안 했을 뿐이지 공연이 없는 공연장이 다수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공연시장이 굉장히 호황이라지만 대학로 공연장의 절반은 전혀 호황기를 못 누리고 있어요. 대학로 공연 수가 분명 늘어났지만 막상 공연을 유치했다는 극장은 전체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거예요. 일부 공연장에만 관객이 몰리고 다수 소극장은 어려움을 겪는 양극화 현상이 심해졌다고 봅니다.”
소극장 살릴 방법 있나
많은 소극장과 예술인이 정부 차원에서 대학로의 창작 환경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한다. 시장 경쟁력을 잃은 예술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반론도 있지만, 시장논리만 적용하면 대중에게 인기가 많지 않은 어린이극, 무언극, 실험극 등 소수 장르를 선보이는 극단과 소극장부터 사라진다. 일부러 보호하고 육성하지 않으면 한국 공연예술이 다양성을 잃고 상업적으로 획일화될 수 있다.
김준희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는 “문화적 가치의 대부분은 당장 돈이 되진 않는다”며 “수학 같은 기초학문처럼 기초예술의 고유한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적 논리로만 연극이나 소극장을 보면 ‘낡고 밑 빠진 독’이겠지만 문화적 논리는 달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전통 국악을 어떻게든 전승하려 노력했기 때문에 퓨전 음악에도 큰 영향을 주고 이자람이나 김준수 같은 국악 스타가 나오기도 하잖아요. 결국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 것이죠. 기초예술이 단절되지 않도록 보존해야 이를 토양 삼아 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대학로 소극장 문제에 대해선 여러 해법이 논의돼왔다. 정부가 대학로를 ‘문화특구’로 지정해 행정적 지원을 확대하자는 제안이 있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문화지구’는 지원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신영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교수는 2016년 ‘대학로 연극의 진단과 활성화 방안 연구’에서 “연극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육성 규제에 관한 조례안 마련”과 “대학로의 창작과 문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공공사업 추진”을 제시했다.
극단이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려면 가장 절박한 재정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소극장협회가 제안하는 ‘상주단체’ 제도는 공연시설마다 2~3개 공연단체를 상주단체로 지정하는 내용이다. 공연시설에는 임차료와 인력운영비를, 상주단체에는 대관료와 창작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일각에선 서울 명동 삼일로창고극장 사례처럼 문화적 가치가 높은 소극장을 정부나 공공기관이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 최초의 민간 소극장인 삼일로창고극장은 1975년 개관해 2015년 폐관했지만 서울문화재단이 운영을 맡아 2018년 재개관했다.
연극인 출신인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지난달 학전 폐관 소식에 “연극계에서 학전의 역사적·상징적 의미와 대학로 소극장들이 겪는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며 “소극장을 활성화하고 연극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다양한 지원사업 계획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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