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 전 송구영신 소회 "세상은 너무도 무정합디다"

2023. 12. 2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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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각계 인사들 눈에 비친 천태만상 세상 "범죄는 문명이 가져다준 폐단이지요" "한 달에 30원 벌기가 정말 힘 듭니다" "이해와 물질이 최고가 된 사회입니다"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다가온다.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이 교차했던 지난 한 해를 소회하며 각오를 다진다. 100년 전 이맘 때도 다름이 없었다. 당시 각각의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떠했을까? 그 때 그 모습을 찾아 한번 떠나보자.

1924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그림과 함께 지난 한 해를 정리하는 '화사'(畵史)가 실렸다. 지나간 1923년의 주요한 사건이 월별로 실려 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23년의 1월은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으로 시작했다. 2월에는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물산장려운동이, 5월에는 경남 진주의 백정(白丁)들의 신분 철폐 운동인 형평사(衡平社) 운동이 각각 일어났다. 7월에는 포와(布蛙, 하와이) 학생들의 고국 방문이 있었다. 8월에는 평양 지방이 수재(水災)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9월에는 칸토(關東) 대지진이 발생했다. 10월에는 부업공진회(副業共進會)가 개최됐다. 11월에는 평양 대동강에 인도교인 대동교(大同橋) 도교식(渡橋式)이 있었다.

이어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직업을 가진 이들이 본 세상에 대한 소회가 소개되어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다음은 같았다. 경성지방법원 판사 백윤화(白允和)의 '판사(判事)가 본 세상'이다. "지능의 범죄가 점점 늘어가는 세상입디다. 이러한 범죄는 현대 문명이 가져온 폐단이지요! 문명이라는 것은 우리 인류에게 적지 아니한 폐단을 가져오는 줄 압니다."

경성지방법원 검사 정구영(鄭求瑛)의 '검사(檢事)가 본 세상'이다. "명리(名利)의 관념만 극도로 팽창하고 도덕의 관념은 나날이 퇴패(頹敗)되어 가는 세상이더이다. 아마 이것이 근일에 빈빈히 발생하는 범죄의 가장 큰 원인인가 합니다." 서대문형무소 간수 김동순(金東淳)의 '간수(看守)가 본 세상'이다. "죄로써 뭉친 세상이요! 죄로써 사는 세상이라구요! 사람은 신성한 동물은 아니고 남을 속이고 때리고 죽이고 하는 간사한 동물이지요! 짐승의 사회보다 별로 더 나은 것이 없지요!"

식산은행 김오춘(金梧春)의 '은행원(銀行員)이 본 세상'이다. "세상은 힘이 없는 곳에는 실패뿐이요, 돈이 없는 곳에는 죽음 뿐이지요! 나의 생각으로는 모든 사람아, 모든 이해를 떠나 서로 단합하라. 힘써 일하여 돈을 모으라! 이러한 말을 하고 싶소." 국일관 뽀이 김복기(金福基)의 '뽀이가 본 세상'이다. "무엇보다도 완연히 변한 것은 부모의 속을 태워가며 화류계에 침혹(沈惑)하신 손님과 시골 손님이 줄어든 것이올시다. 따라서 요리집에서 일어나는 싸움도 줄게 되었습니다."

종로조 인력거부 황인선(黃仁善)의 '인력거부(人力車夫)가 본 세상'이다. "인력거꾼은 점점 죽을 지경이올시다. 도무지 인력거 찾는 손님이 있어야지요. 요사이 같아서는 한 달에 30원 벌기가 극난(極難)이올시다." 지게꾼 김학춘(金學春)의 '지게꾼이 본 세상'이다. "세상은 너무도 무정합디다. 저밖에 모르는 세상입디다.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며 무엇을 운반해 주어도 그저 자기의 욕심만 채우려고 그 품값까지 깍고 깍고 또 깍습디다."

안국동 정숙자(鄭淑子)의 '옆집 부인(婦人)이 본 세상'이다. "집안에 들어앉았으니까 세상이 어떤지 모르지마는 때때로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이 놈의 세상이 망해야지'하는 것을 보니까 세상 지내기가 꽤 어려운가 봅디다." 거지 백문수(白文洙)의 '거지가 본 세상'이다. "참말 아니올시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어느 길가에서든지 의복이나 얌전히 입으신 어른이면 얼마 아니 졸라서 돈냥이나 주시더니, 이제는 막무가내올시다."

경성지방법원 집달리 홍원표(洪元杓)의 '집달리(執達吏)가 본 세상'이다. "사회는 너무도 용서가 없는 사회이며, 자기의 이해에 조금만 관계가 되면 직접 행동을 취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사회입니다." 제중원 간호부 조이덕미(趙以德美)의 '간호사(看護士)가 본 세상'이다. "밤을 새워가며 간호할 때에는 다소간 괴로운 때도 많으나 중병환자가 차차 정신을 차려가며 야윈 낯에 웃음이라도 보일 때에는 다시 없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 올시다."

휘문고보 교원 김진목(金鎭穆)의 '중학교 교원(敎員)이 본 세상'이다. "조선 사회는 모든 것이 거짓이요 성실(誠實)이 없는가 합니다. 가장 참되어야 할 공부까지도 이리하니 우리 사회는 한심하다 할 수밖에는 딴말이 없습니다." 안태호(安泰號)·최홍구(崔弘九)의 '전당업자(典當業者)가 본 세상'이다. "돈 꾸러 오는 사람은 작년보다도 부쩍 늘어갑니다마는 갚아주는 사람은 바짝 줄어듭니다. 세상에 돈이 귀하니까 무슨 기부니 동정금이니 하고 돈 달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도 많습니까?"

신극좌 여배우 최성해(崔星海)의 '여배우(女俳優)가 본 세상'이다. "오늘날 조선 극계를 통하여 여배우라고는 단 열 명이 못 되고 그 열 사람 중에서 능히 자기 예술만으로 자기 몸을 지켜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죄일까요?" 인경전 앞 엿장수 최우철(崔禹澈)의 '엿장수가 본 세상'이다. "엿장수도 한참 세월이지 요사이 같아서는 죽을 지경이올시다. 왜떡이니 사탕이니 별별 군것질거리가 다 나온 뒤로는 말이 아니올시다. 씨앗에게 밀린 본 마누라 격이지요."

대동권번 기생 이금선(李錦仙)의 '기생(妓生)이 본 세상'이다. "기생에게도 차차 사람이라는 자각이 깊어가게 되었습니다. 소리 시키는 손님보다 재미있게 노시는 손님을, 돈 많은 손님보다 독신으로 계신 손님을 따르게 된 줄로 믿습니다." 여학생 안정자(安貞子)의 '여학생이 본 세상'이다. "세상은 죽도록 배우는 세상이지요! 배우지 아니하면 살지 못하는 세상이지요! 그러나 우리 여자들은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의미 있게 살지를 못하였습니다. 배워야 하겠습니다."

100년 전 사람들의 눈에 비친 세상이나, 지금의 세상이나 달라진게 별로 없는 듯 하다. 새해의 소망을 물으면 누구나 한결같이 "작년만 같았으면 좋겠어요"하는 말이 언제쯤 나올까. 한겨울의 추위가 매서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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