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인 사람

구둘래 기자 2023. 12. 2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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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반항하는 노예> ('묶인 사람'이라고도 한다)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알다시피 서경식의 형 서승과 서준식은 1971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서경식 선생은 관찰력도 뛰어나지만, 형의 의지와 어머니의 희생에 자신의 슬픔을 포갤 줄 알았기 때문에 좋은 작가가 됐습니다.

서준식 선생의 인권운동사랑방과 '인권영화제'에 더해, 한국은 이 형제의 희생에 빚진 바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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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서경식의 책 <나의 서양미술순례>, 창비 펴냄.

“노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형에게 보낼 그림엽서에 적을 소감을 정리해보려고 하지만, 마음속에는 뭐라 이름하기 어려운 광풍이 소용돌이쳐 도무지 진정할 줄을 모른다. ‘지상의 숙명에 묶인 인간의 고뇌’라느니, ‘육체의 어두운 뇌옥에서 벗어나 영원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혼’이라느니, 그럴싸한 수사학이야 왜 없으랴. 하지만 그런 것을 쓰고 있겠는가. ‘노예’는 나의 형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서경식, <나의 서양미술 순례>)

서경식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반항하는 노예>(‘묶인 사람’이라고도 한다)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알다시피 서경식의 형 서승과 서준식은 1971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7년을 복역하지만 둘 다 사상전향에 저항함으로써 보호감호처분을 네 번씩 갱신해 1988년까지 감옥에 있어야 했습니다. 17년의 세월입니다. 서승은 고문에 못 이겨 난로를 껴안고 분신을 시도하다가 큰 화상을 입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일가는, 조국과의 인연을 이으려 한국에 아들을 보냈습니다. 자랑스러운 유학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아래서 가족이 풍비박산되는 결과로 변합니다. 어머니는 보따리를 싸갖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가며 옥바라지했고, 부모는 두 아들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뜹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책이 되는 것이 미술서 <나의 서양미술 순례>이고 독서편력기 <소년의 눈물>입니다. 서경식 선생은 관찰력도 뛰어나지만, 형의 의지와 어머니의 희생에 자신의 슬픔을 포갤 줄 알았기 때문에 좋은 작가가 됐습니다. 이후에는 자신의 이런 이력을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으로 형상화했고 한-일 교류에 헌신적이었습니다. 서준식 선생의 인권운동사랑방과 ‘인권영화제’에 더해, 한국은 이 형제의 희생에 빚진 바가 큽니다. 서경식 선생의 부고를 듣고, 급하게 그의 책을 들춰보며 가족의 비극에 엉엉 울던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선생의 영면을 빕니다.

복잡한 사정이긴 하지만 <서준식 옥중서한>이 편집에 이름이 걸린 첫 책이 된 것도 큰 영광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경식 선생은 <한겨레>에 18년간 글을 썼다고 부고를 정리하는 글에서 봤습니다. 그만큼 긴 인연을 이어나갔으면 싶은 필자들의 글을 2024년 신년호에 맞아들였습니다. 여러 철학서로 알려진 안광복 서울 중동교 철학교사이자 철학박사가 오십 대를 겨냥한 철학을 집필합니다. ‘반백철학’은 50이면 희끗해지는 반백의 머리와 100의 반인 반백을 모두 상징합니다. <나의 초록 목록>을 통해 배려 있는 글을 써온 허태임 식물분류학자의 ‘산들산들’은 제목처럼 산들산들합니다. 딱딱한 분류학 이야기를 할머니와 이웃들의 이야기로 만들어 귀에 속삭이듯 알기 쉽고 다정하게 들려줍니다. ‘정신병동에서도 아이는 자라요’는 12살에 소아조현병을 진단받은 ‘나무씨’의 어머니가 16년의 체험을 풀어놓습니다. “세상에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되어 복잡한 마음입니다만, 정신질환을 겪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그리고 저희 가족에게 좋은 ‘말걸기'가 되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힙니다. 오랜 고통을 겪어온 환자 가족분들이 많은 이야기를 꺼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구둘래 편집장 anyone@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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