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실적 없으면 심사서 탈락···"성장성·기술력 보고 지원해야"
<상> 정책지원 체감 못하는 기업
중견기업 77% "보증신청 퇴짜 경험"
'해외에 본사뒀다' 이유로 거절도
ICT·첨단소재·바이오 등 혁신산업
글로벌 교역환경 변화 기조 맞춰
단계별 금융지원 정책 추진 필요 상>
올 8월 정부는 고금리와 글로벌 경기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내 수출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23조 원 규모의 ‘수출금융 종합지원 방안’을 내놓았다. 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기존 61조 원의 수출금융 지원 규모가 부족하다고 판단해 추가 자금을 수혈하기로 한 것이다. 시중은행도 이 지원책에 5조 4000억 원을 보태며 정부와 정책금융기관에 더해 ‘구원투수’로 함께했다. 하지만 서울경제신문이 27일 국내 중견 수출기업 110곳을 대상으로 ‘중견기업들이 바라본 수출 및 기업금융의 개선과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중견기업들은 이번 지원안의 수혜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담보와 수출 실적 위주의 지원 기준이라는 문턱을 넘지 못해 효과를 체감하지 못하는 수출 중견기업이 90%에 달한 것이다.
우선 수출이나 해외 진출 시 금융기관으로부터 금융 지원을 받기 위해 정책보증기관에 보증을 신청했지만 발급 받지 못한 경험이 있는 중견기업이 85곳(77%)에 달했다. 보증 거절의 이유는 다양했지만 대체로 ‘보수적인 심사’가 발목을 잡았다. 기존 대출이 많거나 담보가 될 만한 특허가 부족하다는 식이다. 보증기관들은 기본적으로 기업이 수출 거래를 할 때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수출보험과 수출 (예정) 실적을 토대로 자금 조달에 필요한 신용보증을 제공하는데 수출 실적이 없거나 미미한 곳에는 필요한 금융 지원이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정책금융기관들의 수출 관련 대출 문턱도 여전히 높다는 지적이다. 수출 실적이 있는 기업에 80~90%를 지원하고 있어 수출 실적이 없는 기업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출이 어렵다. 이뿐 아니라 수출 실적이 있는 기업의 경우에도 10~20%의 여신이 부족한 사례가 나타났다. 수출 관련 금융 지원이 담보 내지는 기업 자체의 신용도와 연계된 심사 과정을 거치면서 필요한 만큼의 자금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해외에 본사를 뒀다는 이유로 거절 당한 곳도 있었다. 중견기업의 한 관계자는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현지에 본사를 두고 한국에 자회사를 운영하고 있어 정책자금 이용이 어렵다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수출기업의 이 같은 고민은 정책금융 지원을 받을 때 애로 사항을 묻는 설문 조사 결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절반이 넘는 52.4%가 ‘정책이 중소기업 중심이라 중견기업의 기회가 적다’고 했다. 기업 규모별로 차별화된 금융 상품이 부재하다는 지적이다. 접근성 자체가 떨어진다는 의견도 많았다. ‘복잡한 절차(23.8%)’와 ‘낮은 정보 접근성(19%)’ ‘기관마다 상이한 서류 요구 사항(14.3%)’이 대표적이다. 이밖에 ‘높은 담보 요구 수준(23.8%)’과 ‘예산 조기 소진(19%)’도 문제점으로 꼽혔다. 중견기업의 한 관계자는 “수출금융 지원 기관 간의 통합 및 유기적 관리가 미흡하다”며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수출금융 지원 내역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고금리 장기화 국면에서 시기적절한 수출금융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중견기업들의 자금 사정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응답 기업의 36.4%가 올 초와 비교해 자금 사정이 ‘다소 악화됐다’고 했고 큰 변화가 없다는 응답은 31.8%였다. 22.7%만이 ‘다소 호전됐다’고 했으며 ‘매우 개선됐다’는 기업은 9.1%에 그쳤다. 자금 사정이 나빠진 기업들은 1·2금융권 대출(65%)과 경비 축소(60%)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내년 전망은 비관론보다는 낙관론이 우세했다. 59.1%가 ‘비슷할 것’이라고 답한 가운데 31.8%가 ‘다소 나아질 것’이라고 봤다. 더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한 곳은 9.1%에 그쳤다.
본지는 수출금융 지원 개선 방안으로 △신청 절차의 간소화 및 디지털화 △정책금융 지원 규모 확대 △실적 위주가 아닌 미래 성장성 및 기술력 평가를 통한 지원 확대 △손쉬운 정책 금융 정보 파악 △적기 지원이 가능하도록 지원 시기 분산 △정책금융 신청 창구 일원화 △중복 신청 허용 등 7가지를 제시하고 어느 부분이 시급한지를 물었다. 응답 기업 중 50개사가 미래 성장성 및 기술력 평가를 통한 지원 확대가 시급하다고 답했으며 정책금융 지원 규모 자체를 확대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50명이 추진할 만하다고 했다. 절차 간소화(45곳)와 손쉬운 정보 파악(30곳) 등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답한 곳도 적지 않았다. 신청 창구 일원화(9.1%)나 중복 신청 허용(9.1%)을 꼽은 기업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수출금융 지원 체계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개선돼왔지만 최근 4차 산업의 발달과 디지털화에 따른 교역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지원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수출 동력인 정보통신기술(ICT) 융복합, 첨단 소재·부품·장비, 서비스 부문 등 글로벌 플레이어로 부상한 우리 수출기업의 역량에 상응하는 금융 지원 정책이 제공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재성 영남대 무역학과 교수는 “디지털·바이오 등 혁신 산업에 대한 선별적 금융 지원 제도의 도입 등 수출 지향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기존의 수출 실적에 연계한 수출금융 지원 정책에서 탈피해 기업의 수출 연관 활동을 측정, 단계별 금융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 정책의 개선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동희 기자 dwise@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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