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들의 장점만 복사 … 카피 리더십이 LG왕조의 비결"
염갈량 전화 속 메모 200개
리더십·타격이론 등 담겨
최근 2년간 틈틈이 정리해
철학 가다듬고 마음 잡아
현역 부진·과거 실패 발판
하루 3시간 자며 야구 연구
목표 의식 뚜렷한 팀은 성공
내년 우승해 더 단단해질것
'우승 감독'.
한국프로야구(KBO) LG 트윈스의 염경엽 감독은 올해 이 수식어를 달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했다.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뚜렷하게 제시한 목표였다. 부임 후 1년, 염 감독은 정말로 29년 만에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감독으로서 맛본 첫 우승, 시즌 내내 냉정함을 유지했던 그도 우승 직후에는 스스로 '우승 감독 염경엽'이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포효했다.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2023년 한국 스포츠계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뉴스였다. 우승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연말, 염 감독을 만났다. 전날까지 가족들과 미국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냈다는 그는 "하와이에서도 관광객이나 교민들 중에 LG 팬들이 많더라.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말 많은 축하를 받았다"면서 "팬들이 보낸 열정과 관심에 결과로 보답했던 것 같아 뿌듯하고 흐뭇했다"며 활짝 웃었다.
염 감독이 LG 지휘봉을 잡은 건 지난해 11월. 2020년 SK(현 SSG 랜더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2년 만의 현장 복귀였다. 기대도 있었지만 부담감도 컸다. 염 감독은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내게 마지막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감독으로서 마지막 꿈을 이룰 수 있는 팀이었다. 나를 선택한 LG에 응답하는 건 우승뿐이었다"고 말했다.
올해 KBO 리그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거둔 비결을 묻자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보여줬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메모장에는 200여 개의 문서가 담겨 있었다. 타격 이론, 작전 주루, 수비 등 야구 기술은 물론 리더십에 대한 내용도 따로 정리돼 있었다. 'Youm(염)리더십'이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는 정리된 내용만 수십 장에 달했다.
염 감독은 '메모광'이다. 틈날 때마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리더십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할 때 휴대전화 속 메모들을 읽었다. 흔들림 없는 전략으로 올 시즌 LG의 통합 우승을 이끈 비결이 여기에 담겨 있었다.
염 감독은 "시즌 내내 매주 꼭 읽어봤다. 위기 상황을 맞았을 때는 이 메모들의 문구를 보면서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SK 감독을 그만두고, 야인 시절이었던 2년 동안 메모 정리를 꾸준하게 했다. 내 리더십 방향이 정립돼야 팀의 문화, 가고자 하는 방향을 뚜렷하게 가져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다. 틈틈이 업데이트를 하면서 내 야구 철학이 무엇인지를 정리했다"고 말했다.
'두려움과 망설임을 없애라'는 올 시즌 LG의 팀 모토도 염 감독 메모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염 감독은 "두려움과 망설임은 30년 가까이 우승하지 못한 팀과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던 나를 모두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올해 우승을 통해 두려움과 망설임을 없애고, 선수단에 자신감을 키운 건 또 다른 성과"라면서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바뀌지 않도록 하는 게 내년 시즌 지향해갈 숙제"라고 밝혔다.
염 감독은 자신이 정리한 리더십을 책자로 만들어 팀에 함께 있는 스태프들과 공유할 계획이다. 그는 "나뿐 아니라 코칭스태프, 선수, 프런트 모두 각자 위치에서 역할을 훌륭히 소화한 게 좋은 결과물로 이어졌다. 내년에도 이 성과는 이어져야 한다"면서 "모든 구성원이 한 방향으로 가는 게 중요하다. 매뉴얼화한 내용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LG만의 운영 원칙을 뿌리내리도록 만드는 게 또 다른 목표"라고 말했다.
염 감독은 "30세 전후로 180도 바뀐 야구 인생을 살았다"고 표현했다. 그는 밑바닥부터 올라왔다. 선수 시절 통산 타율 1할대(0.195)에 불과했던 무명 선수 염경엽은 2000년 현역 은퇴를 했다. 그리고 은퇴 당시 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의 매니저직을 제안받고 프런트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첫 업무는 선수단 전표 관리를 하는 것. 이후 운영팀 직원과 스카우트를 거치면서 숱한 경험을 했다.
염 감독은 "결혼과 가족이 내 인생을 바꿨다"면서 "내 위치에 따라 내 가족이 나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걸 느낀 게 나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하루 3시간 잠을 자면서 야구에 대한 고민을 한 적도 많았다. 자존심이 센 편이라 자존심 상하는 일도, 무시당한 일도 많았다"고 돌아봤다.
마침내 2013년 염 감독은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에서 처음 감독을 맡았다. 그만의 야구가 세상에서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2014년에는 넥센의 첫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다. 남다른 지략을 발휘한 덕에 야구팬들에게서 제갈공명에 빗댄 '염갈량'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넥센에서 4년, SK에서 2년간 감독을 맡았던 염 감독은 차분하게 자신의 경력을 쌓았다. 2017~2018년에는 SK 단장직도 맡았다. 그러나 꼭 이뤄야 했던 게 있었다. 우승이었다. 염 감독은 "이전까지 '우승 못 한 감독'이라는 딱지를 떼어내는 게 내게는 매우 중요했다"고 전했다.
실패하며 얻은 교훈을 통해 염 감독 스스로 변화도 모색했다. 염 감독은 "난 번트를 많이 시도하는 감독이 아니었다. 그러나 올해 승부처에서 번트를 자주 댔고, 절반에 가깝게 역전승했다. 시즌 초 '뛰는 야구'를 밀어붙이고,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선발투수를 조기 강판시킨 것도 과거 실패 경험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설명했다.
'염갈량'이라는 별명이 과분하다는 염 감독은 "지장과 덕장 사이를 들어가는 초보 감독 위치에 있다"고 자평했다. 염 감독은 스스로 자신의 리더십을 '카피(copy) 리더십'이라고 표현했다. 기존 야구계에서 성과를 낸 다른 감독들의 장점들을 자신에게 맞게 바꾼 것이다. 그는 "김경문 감독의 '운동장을 이용하는 야구', 제리 로이스터 전 감독의 '두려움 없는 야구', 김성근 감독의 '노력을 통한 결과를 만드는 야구' 등을 모두 분석했다. 여기서 '엑기스'만 뽑아 '염경엽식'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염 감독은 자신이 추구하는 야구로 '하고자 하는 마음'과 '특별함' 두 가지를 강조했다.
그는 "가장 첫 번째로 강조하는 게 조직 구성원 모두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다. 야구를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면 피나는 노력도 즐겁게 할 수 있다. 그다음에는 특별함을 갖춰야 한다. 주전 선수로만 만족할 게 아니라 자신의 포지션에서 전 구단 통틀어 1등을 할 수 있는, 개인별로 특별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염 감독은 "팀에서 이런 마음가짐을 60% 갖춘 조직이라면 그 팀은 분명히 성공한다"며 "선수들에게 방향 제시를 분명하게 하는 게 나의 가장 큰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LG 트윈스도, 나도 이제 시작"이라는 염 감독은 다음 그림을 그린다. 이른바 'LG 왕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염 감독은 "우리의 다음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다. 좀 더 나아간다면, 구단 한 시즌 최다승 기록(87승)도 넘고 싶다"면서 "왕조를 만들려면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올해 우승했어도 부족했던 부분을 좀 더 채워 내년에는 더 단단해진 팀을 만들겠다"고 힘줘 말했다.
[김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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