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판 바꿀 파괴적 혁신 양자기술서 터진다 韓은 어떤 카드 쥐고 있나
◆ Big Picture ◆
2016년 어느 봄날, 듀크대 공과대학 행사에서 키가 2m가 넘는 거구의 클레이턴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 교수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독실한 몰몬교 신도이자 젊은 시절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으로 한국어에도 능통한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크리스텐슨 교수님은 1997년 발간한 '혁신가의 딜레마(Innovator's Dilemma)'라는 명저를 통해서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전파하신 분입니다.
한국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 2000년대 초반 듀크대 공과대학에서 수학하면서 미국 대학 농구 챔피언에 올랐던 큰아드님 이야기를 나눈 후에 제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영감을 제공해주신 교수님의 업적에 대해서 직접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릴 수 있는 뜻깊은 기회였습니다. 아쉽게도 몇 년 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교수님은 그날, 제가 전념하고 있던 양자컴퓨터 기술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도록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혁신가의 딜레마는 성능이 월등하지는 않지만 파괴적인 잠재력을 가진 신기술을 보유한 신규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작지만 급속도의 성장동력이 있는 새로운 시장을 통해 성장하면서 발전을 거듭해 기존 기술이 선점하고 있는 대규모 시장을 잠식해가는 파괴적 혁신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이 책에서 소개된 많은 예제들 이후에도 인터넷이라는 신기술로 무장하고, 각각 초기 검색엔진과 책 판매를 토대로 20년 내에 거대한 광고시장과 유통업계를 장악한 구글과 아마존, 디지털 카메라와 아이팟에서 시작해서 스마트폰을 거쳐 컴퓨터 저장기기(하드디스크) 시장을 장악한 플래시 메모리 기술 등, 우리는 주변에서 파괴적 혁신의 많은 예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자컴퓨터 기술은 이러한 파괴적 혁신의 길을 걷게 될까요?
1994년 양자컴퓨터의 잠재력이 기존 컴퓨터로는 수십억 년이 걸려야 깰 수 있는 암호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 당시 벨 연구소 연구원이었던 피터 쇼어(Peter Shor) 박사님에 의해 밝혀진 이후, 양자컴퓨터의 원리를 탐구하는 다양한 기초 연구과제가 물리학계를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양자컴퓨터의 기본 단위인 큐비트, 그 큐비트 사이의 연산을 가능하게 하는 논리 게이트 등을 구현하는 소자 단위의 연구가 초기 연구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5여 년이 지난 2010년대 초반부터는 그간의 기초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수많은 큐비트로의 확장성이 있는 양자컴퓨터를 설계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기술 개발이 진행됩니다. 이는 마치 1947년 벨 연구소에서 반도체 소자인 트랜지스터가 처음 발명된 이후, 1960년대를 거치면서 반도체 기판 위에 전자회로의 기초가 되는 다양한 기능을 결합하는 집적회로 기술이 개발되면서 현재 널리 사용되는 디지털 컴퓨터가 발전돼온 상황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응용 분야에 쓰일 수 있는 유용한 컴퓨터가 만들어지려면, 최고의 성능을 갖춘 소자 기술 외에도 그 소자들을 활용해서 확장성이 있는 중앙연산장치(Central Processing Unit·CPU) 등 고도의 전자회로를 설계·제작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운영체제(Operating System·OS)를 갖추어야 하는 점과 같습니다.
이런 양자컴퓨터의 개발 과정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공학자 등 폭넓은 전문가들의 참여로 가속화해 2020년대에는 누구나 인터넷과 클라우드를 이용해서 다양한 방식의 양자컴퓨터에 접속하고 사용하는 경험을 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암호체계의 예에서 보듯이 양자컴퓨터는 단순히 진일보한 일반 컴퓨터가 아니라 기존 컴퓨터로 접근이 불가능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근원적으로 차원이 다른 첨단 기술입니다.
따라서 암호 문제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연구, 산업 등 각 응용 분야에서 양자컴퓨터를 활용해서 기존 방식과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개발해 현재 다루기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자컴퓨터가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응용 가능성은 어떤 분야에서 언제 현실화될까요?
아이온큐를 비롯한 여러 양자컴퓨터 개발 업체들의 기술적 로드맵을 보면 이르면 2~3년 내에, 늦어도 2030년대 초까지는 양자컴퓨터가 기존 컴퓨터로 모사(simulate)할 수 없는 연산을 할 수 있는 기술적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엄청난 기술적 진전이지만, 그러한 기술 수준의 양자컴퓨터는 암호 해독이나 복잡한 분자의 화학반응 예측 등 기존 컴퓨터로 범접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알려진 양자 알고리즘으로 풀기에는 아직 성능이 한참 부족합니다. 이는 마치 디지털 데이터 저장기기인 플래시 메모리 기술이 초기에는 용량이나 비용 면에서 컴퓨터에 필요한 하드디스크의 성능에 한참 미치지 못했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플래시 메모리 기술은 컴퓨터 대신 디지털 카메라와 아이팟이라는 새로운 응용 분야에서 아날로그 필름과 콤팩트디스크(CD) 매체를 대체하면서 시장에 안착하고, 지속적인 기술 개발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를 통해서 저비용·대용량 제품 개발을 달성해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드디스크 등 컴퓨터 저장기기 시장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양자컴퓨터 기술은 전형적인 파괴적 혁신의 일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지털 카메라에 해당하는 양자컴퓨터의 응용 사례는 어떤 것일까요? 플래시 메모리가 개발되기 전에는 디지털 카메라 시장이 형성될 수 없었던 것처럼, 현재 초기 양자컴퓨터로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문제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무척 큽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초기 양자컴퓨터가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응용 사례를 먼저 개척하는 것은 양자컴퓨터라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혁신적인 기술로 무장하고 성공적으로 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학계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산업계의 혁신적인 선두 주자들 사이에서 이런 초기 양자컴퓨터를 활용해서 실용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경주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기존 방식으로 학습하기 어려운 데이터를 양자 기술을 적용해서 만든 인공지능 모델을 이용해 분석한다거나 알려진 성공 사례들을 활용해서 신약 개발에 쓰일 수 있는 분자들의 후보군을 양자 모델을 이용해 추려내는 문제 등에 양자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굴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양의 기술 축적이 필요해서 선행 주자의 이점이 명확한 하드웨어 개발과 달리, 성공적인 응용 사례를 발굴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창의성으로 무장한 우수 인력만으로 업계를 선도할 수 있는 블루오션의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 도전 정신을 가진 국내 연구진과 기업들이 뛰어들어서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수 있는 분야라 생각합니다.
그럼, 국내 양자컴퓨터 하드웨어 기술이 소위 말하는 양자 선진국들에 비해 많이 뒤처져 있는 현실은 극복할 수 있을까요? 현재 양자컴퓨터의 기술이 1960년대 초기 컴퓨터 산업과 비슷한 시기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10년, 20년을 내다보았을 때 양자컴퓨터 산업의 방향을 예측해볼 수 있습니다. 과학자가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다양한 기술 개발의 역사를 유추해보면 앞으로 십수 년간 몇 가지 중요한 방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현재 기술 개발의 선두 주자들이 새로운 파괴적 혁신에 의해서 바뀌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현재 개발 중인 다양한 양자컴퓨터의 구현 방식과 구체적인 실현 기술은 성능의 확장과 대량생산, 그리고 비용 절감을 가져오는 기술적 혁신에 의해서 지속적인 변화를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들이 끊임없이 탄생해서 성장하고, 현재 한국의 반도체·자동차·통신 기술 등에서 보듯이 국내에서도 세계를 선도하는 양자 기술의 핵심 기업들이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양자컴퓨터 기술 개발의 후발 주자인 한국으로서는 기존 양자 선진국에서 개발한 기술을 답습하기보다 5년, 10년 후의 양자컴퓨터를 가능하게 하는 차세대 기술에 대한 비전을 세우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핵심 원천 기술 개발에 투자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국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는 반도체 생산 공정, 휴대폰이나 평면 TV, 자동차 등 집적도가 높은 시스템의 설계와 대량생산, 통신망 설계와 운영 등에서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내일의 양자 기술 산업을 주도할 수 있는 기술과 기업들을 육성해 나가야 합니다.
이 과정이 위험 부담(리스크)을 수반하는, 쉽지 않은 과정이겠지만 미래 양자 기술의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임을 인식하고 인력, 기술, 시장을 개발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2030년대에 한국이 양자컴퓨터 개발의 선진국이 되어 있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김정상 아이온큐 창업자·듀크대 교수 매경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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