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총수 '채찍' 마련하려던 공정위…외려 국내기업에 '당근'(종합)
논의 시발점 된 김범석은 사실상 제외…대기업 규제 사각지대 우려도
(세종=연합뉴스) 민경락 박재현 기자 = 공정거래위원회가 27일 발표한 동일인(총수) 규정 개정안의 초점은 그간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동일인'의 기준을 구체화하는 쪽에 맞춰졌다.
내·외국인 구분 없이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되, '자연인' 총수가 있어도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는 예외 조항도 뒀다.
개정안 내용대로라면 제도 개선 논의의 시발점이 됐던 쿠팡 김범석 의장은 동일인 지정을 피할 가능성이 커졌다.
오히려 기존에 동일인으로 지정돼있던 국내 재벌 총수들마저 동일인 지정을 피할 길이 열리면서 당초 기대와 달리 '채찍'이 아닌 '당근'만 주는 제도 개선이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내·외국인 불문한 동일인 판단 기준 구체화
공정위가 이날 발표한 동일인 판단 기준에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이었던 동일인의 판단 기준을 구체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동일인은 집단 현황 자료 제출 등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서 부여된 의무 사항을 이행하는 최종 책임자로 일반적으로 기업집단의 총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
동일인이 누구냐에 따라 기업집단 범위가 달라질 수 있고 의무적으로 공정위에 제출해야 하는 자료 범위도 달라진다. 대기업들이 매년 공정위의 동일인 지정 절차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하지만 학계 등을 중심으로 '사실상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자연인'을 동일인으로 본다는 지정 기준 자체가 모호하고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쿠팡 사례처럼 외국인 국적의 총수나 친족이 있을 경우 명확한 기준이 없어 법적 예측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의견도 제기돼왔다.
이번 공정위 지침에는 '사실상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자연인'을 동일인으로 하는 원칙은 그대로 두되 자연인 특정이 어려울 때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추가로 명시하는 내용이 담겼다.
기업집단 최상단회사의 최다출자자, 최고 직위자, 기업집단을 대표해 활동하는 자 등 5가지 구체적인 동일인 유형도 제시해 동일인 선정 근거도 명확히 했다.
이 기준은 동일인의 국적과 무관하게 적용하도록 함으로써 외국인 총수 논란도 피했다. 동일인 선정 결과에 대해 기업집단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도 마련했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동일인 판단의 객관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고 수범자들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지침 제정을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자연인 총수 지정 예외 조건도 마련…쿠팡, 사실상 제외
공정위는 동일인의 판단 기준을 구체화하면서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자연인 총수가 있더라도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는 '예외 조건'도 마련했다.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해도 기업집단 범위에서 자연인이 지배하는 국내 법인이 빠지지 않고 친족 등 특수관계인의 경영 참여·출자 등도 단절돼있는 경우 법인 동일인을 지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공정위는 예외 조항으로 ▲ 동일인을 자연인으로 보든 법인으로 보든 기업집단의 범위가 동일할 것 ▲ 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연인이 최상단 회사를 제외한 국내 계열회사에 출자하지 않을 것 ▲ 해당 자연인의 친족이 국내 계열회사에 출자하거나 임원으로 재직하는 등 경영에 참여하지 않을 것 ▲ 자연인 및 친족과 국내 계열사 간 채무 보증이나 자금 대차가 없을 것 등 4가지를 제시했다.
이 기준대로라면 쿠팡 김범석 의장은 개정안 시행 이후에도 동일인 지정을 피할 것으로 보인다. 동일인 기준 개정 논의의 불을 지폈던 당사자가 정작 개정된 제도의 제재 망을 벗어난 셈이다.
다만 향후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친족의 경영 참여가 새롭게 드러나거나, 지분 구조가 변경된다면 김 의장이 동일인으로 새롭게 지정될 여지도 있다.
공정위가 최근 입법 추진 의사를 밝힌 '플랫폼 공정경쟁촉진법'을 통해 쿠팡과 김 의장에 대한 간접적인 규율이 이뤄질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기존 총수도 동일인 지정 회피 길 열려…규제 사각지대 우려
일각에서는 이번 공정위의 기준 변경으로 대기업집단의 사익편취 규제에 사각지대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동일인이 법인인 기업집단은 공정거래법상 대기업집단의 사익편취 규제를 받지 않게 된다. 사익편취는 동일인이 자연인인 경우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연인 총수가 기업집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고 해도 총수 본인이나 친족 관련된 출자·자금거래 등 지정자료 제출 의무도 없다.
따라서 개정안이 시행되면 자연인에서 법인으로 동일인을 변경해줄 것을 신청하거나 중장기적으로 지배구조 등을 바꿔 동일인 변경을 시도하는 대기업들이 다수 나올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현재 상황에서 법인 동일인 변경 요건을 충족하는 대기업 집단은 많지 않다는 것이 공정위의 판단이다. 지난해 5월 기준 82개 대기업집단의 동일인 중 자연인은 72명, 법인 10개다
한 위원장은 "2023년 현황에 맞춰 예외 요건에 해당하는 대기업 수를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숫자가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roc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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