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10〉남극관측탐험대 위대한 도전
1985년 11월 6일 오전 11시 한국남극관측탐험대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 삼익빌딩 강당에서 발대식을 갖고 한국 최초로 자원 보고인 남극탐험을 향한 41일 일정의 대장정에 올랐다.
“이번 탐사는 남극에 한국기지를 건설하는 데 큰 몫을 할 것입니다. 국민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무사히 귀국하겠습니다.” 탐험대 단장인 윤석순 한국해양소년단연맹 총재는 결단식에서 결연한 표정으로 이같이 다짐했다. 탐험대원들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한국 첫 남극탐험대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용기백배했다. 그동안 탐험대 지원에 소극적이거나 냉담하게 반응하던 당국과 기업 등도 전두환 대통령이 재가한 서류를 내밀자 태도가 180도 변했다. 대통령 재가 서류는 만능키였다.
탐험대는 모두 17명으로 구성했다. 단장인 윤석순 총재를 비롯해 해외 등반 경험이 있는 등반전문가 7명, 해양 과학자 2명, 연맹 대원과 취재진 7명 등이었다. 탐험대는 2개 팀으로 임무를 분담했다. 킹조지섬 해양 생태계를 탐사하는 1진과 높이 4892m 남극 최고봉인 빈슨산을 등정하는 2진이었다.
이번 탐험대의 주목적은 한국기지 설치에 필요한 자료 수집과 남극대륙 자원개발 시 남극조약 가입을 위한 사전 활동이었다.
탐험대는 이날 오전 결단식에 이어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남극으로 출국했다.
윤석순 단장의 회고. “남극관측탐험대는 다른 어느나라 팀과 비교해도 손색 없는 강팀이었다. 국가적 사명을 수행한다는 자부심으로 사기가 충천했다. 오직 한 가지 남극조약 가입 교섭을 위해 소련과 중국, 폴란드 기지를 직접 방문하고자 그들에게 수차례 방문 요청을 했으나 외교관계가 없었던 터라 끝내 확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가서 문을 두드리면 열리리라'는 마음으로 김포에서 역사적인 등정에 올랐다.”(희망의 대륙 남극에 서다)
탐험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마이애미, 칠레 산티아고와 푼타아레나스를 거쳐 김포를 출발한 지 10일 만인 11월 16일 남극 킹조지섬에 있는 칠레 마시 기지에 도착했다.
탐험대는 소련 빌링스하우젠 기지와 중국 장성 기지 중간에 위치한 바닷가에 8개 텐트로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윤석순 단장은 이어서 대원들과 함께 캠프에 태극기와 남극기지 현수막을 게양했다.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기를 향해 대원들은 애국가를 소리 높여 제창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소리는 남극 하늘로 높게 울려 퍼져 나갔다.
이튿날인 11월 17일 탐험대원들은 기지 뒷산에 올라 남극 도전 의지를 담은 동판을 암벽에 달았다. 동판에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대한 남아들이 인류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여기, 남극에 첫발을 디디다'라는 글을 새겼다.
현지에서 남극 일정은 계획대로 진행했다. 현지 외국 남극기지들과의 협조도 원활했다.
윤석순 단장의 말. “남극에서 모든 일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서울에서 제3국을 통해 기지 방문을 요청했지만 회답도 해 주지 않던 소련과 중국, 폴란드 기지들이 현지에서 칠레 마시 기지 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직접 접촉하자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극심한 이념분쟁으로 국교가 없었고, 북한 때문에 우리나라의 남극조약 가입을 반대하던 이들도 우리가 직접 기지를 방문해서 88서울올림픽을 화두로 대화를 시작하자 문제가 하나씩 풀렸다. 만나는 그곳 기지대장들이 한국의 남극조약 가입에 공감했다. 그러면서 '본국에 이를 적극 건의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국 장성 기지 대장은 우리 대원들을 기지로 초청해 성대한 오찬까지 제공하면서 '한국이 킹조지섬에 진출하면 우리가 적극 지원해 주겠다'며 구체적인 조언도 해 주었다. 88서울올림픽 유치가 우리나라 국제 지위 향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희망의 대륙, 남극에 서다)
킹조지 섬을 탐험하는 1진은 홍석하 대장이 이끌었다. 대원들은 1주일 동안 각국 기지를 방문해서 남극대륙 생태계를 조사하고, 각종 자료를 수집했다. 또 식물 생태계와 기상, 지질 등 각종 과학탐사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남극 개발에 선진국들과 공동 참여하기 위해 남극조약 가입을 추진했고, 미국과 칠레 등 우방국으로부터 적극적인 기입 지지를 받아내 민간 외교역할까지 했다. 킹조지 섬 탐험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 해양연구소(현 한국해양연구원)에서 지질학자인 장순근 박사와 기상학자인 최효 박사가 탐사 대원으로 참여했다.
장순근 박사가 밝힌 내용. “당시 우리나라는 남극기지 건설과 관련해 어떤 것도 결정한 바 없었다. 그러나 탐험대는 언제가 우리나라가 남극기지를 건설할 때 필요한 자료라고 생각해 킹조지섬에 있는 외국기지 건설과 시설물, 운영과 생활에 관한 여러가지 자료를 모았다.”(남극 탐험의 꿈)
빈슨산 정복에 나선 2진은 그해 11월 16일 오후 1시 칠레 푼타아레나스 공군기지에서 16인 경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륙 17시간 만인 17일 오전 빈슨산 아래 평지에 착륙했다. 이곳은 별도의 비행장이 없었다. 평평한 설원이어서 아무 곳이나 비행기가 착륙했다.
허욱 빈슨매시프 등반대장의 말. “신비의 대륙 남극은 혹한과 강풍뿐만 아니라 밤과 낮, 방위 감각, 고도 등 모든 점이 우리를 혼돈에 빠뜨렸다. 백야 현상 속에서 밤과 낮 개념은 무의미했다. 텐트에 산 그림자가 드리우면 우리는 밤으로 간주해 잠을 청했다. 따라서 캠프마다 자는 시간이 달랐다. 햇빛이 비칠 때는 얼굴에 선블록을 바르지 않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이곳에서 나침판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희망의 대륙 남극에 서다)
이들은 해발 2700m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해서 장비 점검을 마치고 해발 3000m에 제1 캠프, 3500m에 제2 캠프, 마지막 4100m 지점에 제3 캠프를 설치했다.
그해 11월 29일 0시 30분. 거친 악천후를 뚫고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여기는 정상, 여기는 정상!” 한국인 최초이자 세계 6번째로 빈슨산 정상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배낭에 매단 온도계가 섭씨 영하 40도를 가리켰다. 초속 30m의 폭풍설 속에 그토록 갈망하던 빈슨산 정상에 오른 대원들이 정상에 머무른 시간은 7분여에 불과했다. 추위와 강풍이 불어서 더 이상 정상에 머무를 수 없었다.
대원들은 서둘러 태극기와 해양소년단연맹 깃발을 묶어 산 정상에 세웠다. 이어 88서울올림픽 배지를 정상 만년설 속에 묻었다.
24일 동안의 남극 탐험 일정을 끝낸 탐험대 전원은 그해 12월 10일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이들은 미국을 거쳐 12월 16일 오후 7시 5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가족과 연맹관계자 등이 나와 이들을 환영했다.
윤석순 단장은 귀국 인사를 통해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남극조약에 가입,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해서 연구활동을 하고 우리 청소년들이 남극시대 주인공이 되도록 해야 한다”면서 “남극에 상설기지를 설치, 과학자들이 상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단장은 “남극대륙에 탐사활동과 남극 대륙 최고봉인 빈슨산을 정복, 우리나라의 남극 조약 가입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면서 “한국인의 개척정신과 불굴의 기상을 남극에 심고 각국 과학자들과 동등한 탐사, 그리고 자료 교환의 길을 열고 왔다”고 밝혔다.
12월 17일 오후 6시. 남극관측탐험대는 이날 연맹사무실에서 탐험단 해단식을 개최했다. 해단식에는 정연세 항만청장과 강영식 수산청장 등과 가족 등이 참석했다.
12월 20일 오전 전두환 대통령은 윤석순 총재를 비롯한 남극관측탐험대원 17명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을 함께하며 이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남극탐험에 대한 전 대통령의 열의와 의지는 강력했다.
전 대통령은 배석한 김성진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남극과학기지 건설을 적극 추진할 것과 한국인의 드높은 기상을 보여 준 17명 전 대원을 포상하라”고 지시했다.
1986년 12월 24일 노신영 국무총리는 우리나라 최초로 남극대륙을 탐험하고 남극조약 가입 토대를 마련한 윤석순 단장에게는 국민훈장 모란장, 탐험대 홍석하 대장에게는 국민훈장 동백장, 장순근 해양연구소 책임연구원과 최효 해양연구소 선임연구원 및 허유 연맹지도자 등에게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했다. 또 권오완·김진원씨 등 11명에게는 국민훈장 석류장, 김현이 씨 등 2명에게는 대통령 표장이 수여됐다.
남극탐험은 위대한 도전이었다. 남극에 가는 길은 멀고 험난했다. 그러나 남극은 우리가 꼭 가야 할 길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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