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아픈 배 달래던 공공야간약국, 내년에도 시민 곁 지킨다
“여보세요. 네, 약국 1시까지 합니다.”
지난 25일 오후 9시50분 서울 용산구 수복약국에 전화벨이 울리자 약사 김모씨(76)가 전화를 받고 약국 영업시간을 안내했다. “약국 1시까지 하는 것 맞냐는 전화가 하루에도 대여섯번씩 오곤 한다.” 김씨가 말한 지 3분 만에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코감기가 심한데 본인이 갖고 있는 약을 써도 되냐는 문의 전화였다. “이부펜하고 있는 거 두 가지 쓰면 코감기에 잘 들 거예요.” 김씨가 전화에 대고 설명했다.
성탄절이던 이날 인근 8개 약국 중 문을 연 곳은 수복약국 한 곳뿐이었다. 김씨는 이튿날 오전 1시까지 문을 열어둘 것이라고 했다. “약속한 것인데 당연히 열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김씨 등 뒤로 ‘공공야간약국, 365일 새벽 1시까지 문여는 약국’이라고 적힌 LED 간판등이 반짝였다.
수복약국은 서울시가 2020년부터 지정·운영 중인 33개 공공야간약국 중 한 곳이다. 김씨는 4년 전 서울시로부터 매일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1시까지 문을 여는 야간약국 지원사업에 참여하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약국과 한 건물에 살고 있어 평소에도 밤 12시까지 약국 문을 열어두곤 했지만 시와 매일 문을 열겠다고 약속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김씨는 오랜 고민 끝에 ‘한번 해보자’ 다짐했다고 했다.
김씨가 고심 끝에 한 다짐은 연말 뜻하지 않은 위기를 겪었다. 지난 18일 서울시가 내년도 예산 미확보를 이유로 새해부터 공공야간약국 사업을 종료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서울시는 공공야간약국 외에도 밤 10시 이후 문을 여는 약국이 144개 있으며 편의점에서도 안전상비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다고 해명했지만, 지난 4년간 시민들의 일상 필수 시설로 거듭난 공공야간약국을 중단해선 안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자 서울시가 입장을 급선회했다. 서울시는 27일 “공공야간약국 운영을 2024년에도 지원한다”고 밝혔다. 약국별 지원 규모도 올해와 동일한 수준을 유지하기로 했다.
지난 25일 밤 10시부터 3시간 동안 수복약국을 직접 찾은 사람은 7명이었다. 문 연 약국을 찾아 휴대전화의 지도어플을 켜고 찾은 사람도, 택시를 타고 멀리서 급히 약국을 찾은 사람도 있었다. 이날 오후 10시53분쯤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젊은 남성이 약국으로 들어왔다. “자극적인 음식 먹고 위가 쓰리다는데 어떡하죠? 그냥 타이레놀 먹어도 되나요?” 지인 대신 약을 사러 온 남성이 다급하게 묻자 김씨가 무엇을 먹고 아픈 것인지 확인한 뒤 진경제를 내어줬다. 진통제를 먹으면 속이 더 쓰릴 수 있으니 못 먹게 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약을 받아 나가는 남성 뒤로 택시에서 내린 젊은 여성이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들어왔다. 낙지를 먹고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는 여성은 약을 구매한 뒤 같은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약국을 찾은 사람들의 증상은 대부분 몸살감기나 급한 위경련이었다. 이날은 없었지만 한밤중 어린 자녀가 고열이 난다며 전화로 증상을 설명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야간에 아이가 열이 나서 급했는데 해열제를 구할 수 있었다’ ‘급할 때 덕분에 살았다’는 후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씨는 “이런 비응급 환자들이 모두 119에 전화하거나 응급실로 가게 되면 정작 응급환자들 처치가 어려울 만큼 응급실이 바빠질 것”이라며 “일상적인 처치를 위해 야간약국이 생각보다 큰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이날 오후 11시26분 목감기와 코감기가 심하다는 젊은 남성을 끝으로 수복약국을 찾는 발길이 끊겼다. 자정이 되자 주변 주택가는 더욱 조용해졌지만 김씨는 서울시, 그리고 시민들과의 약속이라며 한기 드는 약국 안에서 오전 1시까지 불을 켜고 기다렸다. 오전 1시5분, 수복약국만 불이 켜져 있던 골목길에 셔터 닫는 소리가 들렸다.
https://www.khan.co.kr/national/health-welfare/article/202312242012025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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