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역할하는 한국인·한국어로 연기하는 일본인...'액팅 노마드'를 아십니까

김소연 2023. 12. 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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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인지도 낮은 무명·신인도 해외 무대서 기회
SNS로 공연예술 지역성 깨지고 문화다양성 가치 높아져
K뮤지컬 인기에 외국인 배우, 한국 무대 도전도
"극작가 해외 진출로 아시아인 배역 한계 넘어야"

‘한국 뮤지컬 배우, 런던 웨스트엔드 최초 진출!’

2014년 홍광호가 뮤지컬 '미스 사이공' 25주년 기념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공연의 '투이' 역을 맡은 것은 '한국인 최초'로 수식되는 기념비적 성과였다. 이듬해 김수하가 같은 작품의 주인공 '킴'의 커버(주연 배우 부재 시 투입되는 배우)로 캐스팅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춤, 음악과 달리 연극, 뮤지컬 무대에는 '언어와 인종의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와 인종이 다른 배우들이 한 무대에 함께 서는 건 드문 일이었다.

최근엔 달라졌다. '액팅 노마드'(국경을 넘나들며 연기하는 배우)가 늘고 있다. 한국 배우들은 적극적으로 해외 무대의 문을 두드리고, 경쟁력이 높아진 한국 공연계 관심을 보이는 외국인 배우도 많아졌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덕분에 공연예술의 지역성이 흐려지고 다양성이 각광받는 덕분이다.


오스트리아 초연 뮤지컬로 데뷔한 한국 신인

뮤지컬 배우 황지호가 지난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공연된 '미스 사이공'에서 투이를 연기하고 있다. 황지호 제공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드류 사리치라는 배우를 유튜브로 접하게 된 게 계기였어요. 오스트리아의 뮤지컬 교육 환경은 어떨지 궁금했거든요."

황지호(28)의 말이다. 그는 지난해 뮤지컬 '미스 사이공' 오스트리아 빈 초연 앙상블로 뮤지컬에 데뷔했다. 내년 3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시작하는 '미스 사이공' 아시아 투어 공연에도 참여한다. 그는 한국에서는 뮤지컬에 출연한 적이 없다. 성악 전공으로 1년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내년 2월 현지 대학의 뮤지컬 전공 학과 졸업을 앞뒀다.

영국과 미국 작품 위주였던 국내 라이선스 뮤지컬 시장의 판도가 달라진 게 황지호의 진로를 바꿨다. 그는 '엘리자벳' 등 오스트리아 뮤지컬이 인기를 끌 때 "왜 오스트리아로는 뮤지컬 유학을 안 갈까"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해외 공연계가 중요시하는 '문화 다양성'도 그의 오스트리아 데뷔를 도왔다. 그는 "인종과 국적에 얽매이지 않는 '컬러 블라인드 캐스팅'이 늘어 기회가 많아졌다"며 "오스트리아, 한국, 런던을 오가며 꾸준히 활동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뮤지컬 배우 황지호. 황지호 제공

"K뮤지컬에 반해"… 일본 국적 배우의 한국 무대 데뷔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에포닌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루미나(오른쪽). 레미제라블코리아 제공

일본 국적 배우 루미나(23)는 서울 블루스퀘어에서 공연 중인 '레미제라블' 한국어 공연의 '에포닌' 역으로 뮤지컬에 데뷔했다. 아버지가 인도인, 어머니가 일본인인 그의 연기 경력은 일본에서 뮤지컬 '킹 앤 아이'의 아역인 '출라롱콘'을 맡은 게 전부다.

어머니를 따라 어려서부터 뮤지컬을 관람한 루미나는 한국 원작을 일본어로 옮긴 뮤지컬 '셜록 홈즈'를 보고 한국 뮤지컬에 빠졌다. 한국 공연 특유의 강렬한 느낌에 끌려 중학생 시절 한국어 과외를 받았고 2019년 서울대 성악과에 외국인 전형으로 입학했다. "한국 무대에 서고 싶어서 발음과 억양을 집중적으로 익혔다"고 말했다. 루미나는 한국 뮤지컬 무대에 서면서 "국경 없이 활동하는 배우가 되는 게 꿈"이다. 그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마그리드, '렌트'의 미미 등 강인하고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루미나처럼 한국 뮤지컬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한국 대학의 뮤지컬 학과에 진학하는 외국인 학생이 늘어나는 추세다.

뮤지컬 배우 루미나. 포킥스엔터테인먼트 제공

"아시아 극작가 더 나와야"…런던 활동 16년의 교훈

국립극단 연극 '이 불안한 집'에 출연한 여승희. 국립극단 제공

한국의 '액팅 노마드'들이 인종·언어의 한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다. 김소향이 2017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백인이 주로 맡는 '시스터 액트'의 '메리 수녀' 역을 따낸 사례 등을 빼면 런던, 뉴욕 등에서 활동하는 한국 배우들의 역할은 여전히 아시아인 캐릭터로 한정돼 있다.

국립극단 시즌 단원으로 지난 9월 연극 '이 불안한 집'의 '클리템네스트라'를 연기한 여승희는 런던에서 16년간 무대에 섰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졸업 후 한국에서 짧게 배우로 일하다 영국 마운트뷰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과 스웨덴에서 연극 '원 데이, 메이비' '더 보트'와 뮤지컬 '킹 앤 아이' '히어 라이즈 러브' '미스 사이공' 등에 출연했다.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 중인 여승희는 "언론은 문화 다양성을 부각하지만 아시아인이 백인 배우가 맡던 역할에 캐스팅되는 사례는 아직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국경 없는 배우'의 필요조건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작품과 극작가의 더 많은 해외 진출이다. 그는 "아시아계 배우들이 무대에서 도드라지는 존재로 보이지 않을 더 많은 작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15년 영국 런던에서 연극 '더 보트'에 출연한 여승희. 맨 뒷줄 왼쪽 다섯 번째. 여승희 제공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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