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장 쓰는 일[유희경의 시:선(詩: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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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서점에 들렀다가, 즐비한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에 새삼 놀라며 깨닫는 세밑은 즐겁다.
머릿속 명단에 따라 넣고 빼고 하느라 고민 깊다 보니 예상했던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버튼 몇 개만 누르면 통화를 할 수 있고 문자 메시지를 통해 손쉽게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에 새삼 전할 말이 따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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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편지가 오네 오고 있네 내가 그것을 소리 내어 읽으면 당신의 혀가 내 귓불에 닿고 당신의 부드러운 혀가 내 귀 안에 이미 있네 당신 편지는 오고 있네 오네 동구 밖까지 왔을까 잡화점 앞을 무사히 지났을까’
- 장이지 ‘기대’(시집 ‘편지의 시대’)
대형 서점에 들렀다가, 즐비한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에 새삼 놀라며 깨닫는 세밑은 즐겁다. 아직도 사람과 사람 사이가 있다. 그사이 차곡차곡 손 글씨로 눌러 담는 안부와 바람의 인사들이 가득할 수 있다니. 어쩐지 안심이다.
덕분에 몇 장 카드를 마련했다. 나도 카드를 써야지. 근사한 선물은 힘들지만 카드 정도의 사치쯤은 호기롭게 누려 보기로 한다. 이 사람 저 사람 떠올리며 고르다 보니 손에 쥐게 된 카드의 수가 너무 많다. 어떤 식으로든 신세 지며 살아온 탓일 것이다. 욕심을 덜어내기로 한다. 올해만 날인가. 내년에는 보다 살뜰하게 챙겨 보리라. 머릿속 명단에 따라 넣고 빼고 하느라 고민 깊다 보니 예상했던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책상 앞에 잔뜩 카드를 놓아두고 마주하니 사람 부자가 된 것 같다.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막상 카드를 쓰려 하니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망설여졌다. 버튼 몇 개만 누르면 통화를 할 수 있고 문자 메시지를 통해 손쉽게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에 새삼 전할 말이 따로 있을까. 명색이 시인인데 아무 말이나 적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지간한 청탁 원고보다 더 애를 쓰게 되는 거였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카드를 쓰다 보니 어느덧 깜깜한 밤.
카드의 내용이야 예사로운 인사말이 대부분이다. 다만, 그런 내용을 적어가는 동안 내내 카드 받을 ‘그이’를 생각하는 일이, 그 느리게 지속되는 마음이 은근하게 좋았다. 오래 잊고 있던 편지의 매력, 어쩌면 마력. 어느덧 내 마음은 벌써 답장받을 기대에 부풀어 있다.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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