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산증인’ 김종원 시인, 회고록 『시 정신과 영화의 길』, 시집 『시네마 천국』 동시에 펴내

홍윤표 2023. 12. 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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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홍윤표 선임기자] “한 해가 저무는/ 도시의 불빛 속에서/ 바람에도 쓸리는 한 사나이를 만난다./ 찬 서리 이승의 들녘에/ 한 줄 금으로 남는/ 빈 수레/ 나의 세월./ 나이 들어 터득된/ 덧없는 시간 앞에서/ 전에 닿지 않던/ 인생의 바닥이 보인다.”(김종원의 시 ‘세밑에’ 전문)

자연의 나이 아흔을 저만치 앞둔 한국 영화평론의 개척자인 김종원(86) 원로 시인 겸 영화평론가가 회고록 『시 정신과 영화의 길』과 시집 『시네마 천국』을 한꺼번에 펴냈다.

한상언 영화연구소에서 최근 발행한 이 두 책은, 저자가 60년을 훌쩍 넘긴 영화평론의 뒤안길을 찬찬히 돌아본, 한국영화계의 귀중한 증언이자 삶의 황혼길에 서 있는 시인의 회상록이다.

비록 장르는 다르나 책 제목이 상징하듯 ‘영화’를 매개로 한 시인이 걸어온 길을 담담하게 서술해놓은 회고록과 시집을 통해 저자는 자신의 삶과 끈끈하게 연계된 한국 현대영화사의 참모습을 진솔하게 펼쳐놓았다. 그가 스스로 밝혔듯이 회고록 집필에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사실에 입각한 진술”이었다. 다행히도 시인에게는 “구술의 진실을 뒷받침해 줄 만한 적잖은 기록이나 메모가 남아” 있었다.

사실의 끈으로 진실을 추구한 회고록 『시 정신과 영화의 길』은 유년기와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중년기, 노년기로 나누어 놓은 연대기다. 영화연구가 한상언 영화연구소장에게 구술한, ‘타임머신을 타고 행복한 추억 여행’이기도 하다. 그가 고향 제주도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과 시인으로 등단해 문인들과의 교유, 영화인들과 얽히고설킨 사연들이 이 회고록에서 흥미롭게 종횡으로 전개된다. 시대적으로는 8·15해방 전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가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김종원 시인은 1947년 제주 3.1절 행사를 비롯해 6.25 전쟁, 4.19 혁명, 유신과 1980년 서울의 봄 등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을 몸으로 겪었다. 회고록에는 제주 4.3 당시 제주민전 위원장 안세훈을 만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부터 목포에서 겪은 6.25 당시 상황, 시위대의 한복판에서 활약했던 4.19 혁명 전후의 이야기,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자유를 부르짖다 해직된 ‘조선투위’ 활동, 1980년 태창문화사에 근무하던 당시 재야의 거두 김대중의 자서전을 출판하려던 일, 절대권력 박정희를 등에 업고 위세를 떨쳤으나 김재규의 총탄에 스러진 차지철의 결혼식 등 우리 현대사의 흥미진진한 일들이 그려져 있다.

그는 1959년 영화평론을 시작,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설립을 주도했고, 아직도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영화평론계의 산증인이자 『우리 영화 100년』과 같은 저서를 쓴 한국영화사 연구의 한 획을 그은 권위 있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김종원의 삶에 새겨진 흔적과 그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편린을 살펴볼 수 있다.

『시네마 천국』 은 시인이 『강냉이 사설』(1970)과『광화문행』(1988) 이후 35년 만에 내놓은 세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영화에의 헌사’ 등 영화 관련 시편과 영화감독 유현목, 홍성기, 배우 신성일, 제주 출신 탤런트 고두심 등 영화인들과의 인연을 소재 삼은 것들, 고향 제주가 바탕에 깔린 ‘자연과의 교감’ 등 모두 다섯 묶음, 73편으로 짜여 있다.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1937년 제주에서 태어나 1957년『문학예술』과 1959년『사상계』의 추천을 받은 ‘제주 출신 1호’ 등단 시인이다. 학생 잡지로 유명했던『학원』을 통해 소년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제주의 대표적인 학생문예지『별무리』편집과 제주 최초의 시 전문지『시작업』발간을 주도하는 등 전후 제주의 문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발자취도 남겼다.

‘영원한 현역’을 자처하는 시인은 회고록 머리글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남아 있다면 이상의 문제를 포함한 한국영화사의 공백을 메우는 일에 매진하고 싶다”면서 “한상언 씨와 같은 성실한 한국영화사 연구가를 만난 것은 다행이다. 백지로 남을 뻔했던 나의 생애가 어느새 이렇게 정리돼 되살아나게 됐으니 감개가 무량하다”고 술회했다.

그의 한국영화사 정리 작업은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사진) 김종원 시인(맨 오른쪽)이 김규동, 김남조 시인과 함께 자리한 모습(제공=한상언영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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