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bye 2023 | 경이로운 마스크로 영광 얻은 염혜란

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2023. 12. 2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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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사진=에이스팩토리

2023년의 미친 존재감을 꼽으라면 절대 빠질 수 없는 얼굴이 있다.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라며 웃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며 새로운 삶을 다짐하던 얼굴, "일어난다, 우리 소문이. 반드시!"를 되뇌던 강인한 믿음의 얼굴, "우리 아들만 아니면 돼야 부렸어"라며 비뚤어진 모성이 철철 비어져 나오던 얼굴. 한국의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며 '염바르뎀'이란 별명을 부여받은 염혜란의 얼굴이다. 

염혜란이 연기 잘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아는 주지의 사실이지만, 2023년의 염혜란은 누구보다도 경이로웠다. '더 글로리'의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인 이모님 강현남으로 2023년의 시작부터 강렬한 시선을 모았고, '경이로운 소문2: 카운터 펀치'로 3년 만에 돌아와 새빨간 추리닝을 입고 백발을 휘날리며 동료 카운터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었으며, '마스크걸'의 김경자가 되어 그야말로 작품을 찢는 미친 존재감을 발휘했다. '흥행 요정'이란 수식어가 나왔고, '염혜란의 시대가 왔다'는 언론의 찬사도 전혀 호들갑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더 글로리', 사진=넷플릭스

사실 '더 글로리'의 강현남과 '마스크걸'의 김경자는 자식을 위해 복수에 나선다는 점, 집요하게 타깃을 쫓는다는 점을 제외하곤 천양지차로 다르다. 강현남은 딸을 지키기 위해 문동은(송혜교)의 복수에 참여하며 남편을 죽여달란 조건을 내걸었고, 김경자는 아들의 죽음에 책임을 묻기 위해 일평생을 아들의 살인자를 추적해 나선다. 강현남은 자기 자식이 소중한 만큼 남의 자식도 귀함을 아는 인물이지만, 김경자는 자기 자식이 아닌 남의 자식은 자식의 손톱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모성의 색깔도 다르다. 강현남은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인고의 엄마다. 자기 딸을 두고 협박하던 박연진(임지연)의 싸대기를 쳤을 때 시청자들이 후련함을 느꼈던 건 박연진이 빌런이기도 하지만 엄마 강현남에 진심으로 감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스크걸'의 김경자는 아들이 중하지만 어떤 면에선 그 아들을 중하게 키운 자신에 대한 보상이 더 커 보이는 인물. 아들의 시체를 확인하고 오열하다가 대뜸 "그년 때문이여!"를 부르짖고, 광기에 사로잡힌 눈빛으로 "너는 나의 군사로다!"를 외치며 간증하는 모습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고지순한 모성은 찾아볼 수 없다. 

'마스크걸'의 김경자는 비뚤어진 광기의 엄마라는 캐릭터 설정 자체로 돋보일 만한 인물이지만, '김경자가 주인공'이란 말이 나올 만큼 김경자에 시선을 모은 건 염혜란의 연기 내공에 공을 돌려야 마땅하다. 주인공 김모미는 이한별, 나나, 고현정으로 옮겨가지만 김경자는 20대부터 60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염혜란이 맡아 세월의 흐름과 아들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축적되는 김경자의 괴이함과 기묘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장총을 휘두르는 전무후무한 엄마를 이토록 이질감없이 그려낼 수 있는 배우가 어디 그리 흔할까. 

'마스크걸', 사진=넷플릭스

소위 센 역할이나 주조연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올해 염혜란이 특별출연으로 모습을 비췄던 영화 '달짝지근해: 7510'의 약사로 분했을 때를 보라. 약국에서 차치호(유해진)와 '티카타카' 넘치는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들은 확실한 폭소를 자아냈다. 염혜란은 그 짧은 장면장면에서 영혼 없는 약사의 모습였다가 어느덧 차치호의 카운슬러처럼 변화하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분량은 작았지만 나올 때마다 현실감 넘치는 모습으로 무거웠던 극의 분위기를 경감시켰던 '소년들'의 황준철(설경구)의 아내 김경미는 또 어떻고. 흔하디 흔한 형사의 아내로 남을 수 있었던 김경미를, 염혜란은 입체적인 연기로 진정성을 불어넣었다. 

염혜란의 얼굴은 작품에서 또렷이 각인되면서도 작품마다 완연히 다른 결과 다른 분위기로 그 전의 얼굴이 잊히는 특징이 있다. 물론 이는 작품마다 변검처럼 얼굴을 갈아 끼우고 그를 소화하는 염혜란의 빼어난 연기력 덕분이다. TV 데뷔작인 '디어 마이 프렌즈'(2016)에서 교수인 남편에게 지속적인 가정폭력을 당하면서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상처를 온몸으로 그러안는 김순영이 '도깨비'(2016)에서 조실부모한 조카 지은탁의 사망보험금을 노리며 악령이 되어서까지 괴롭히던 이모 지연숙이 되었을 때 그 둘이 같은 인물임을 누구도 쉽게 눈치채지 못했다. '도깨비'로 대중에게 염혜란의 얼굴이 확연이 각인된 이후에도 마찬가지. 영화 '아이 캔 스피크'(2017)에서 나옥분에게 "서운해서 그랬어요, 서운해서!"라며 울던 진주댁이 영화 '증인'(2019)에선 증인으로 나온 어린 지우(김향기)의 증언을 또박또박 흉내내며 웃는 섬뜩한 얼굴이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러다가도 전 남편을 위해 서슴없이 드리프트를 하는 쿨한 언니 홍자영(동백꽃 필 무렵)이 되고,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감정과 내면의 변화를 보였던 아내 영남(빛과 철)이 되기도 한다. 나이보다 높은 연령대를 소화하곤 하는 다소 노회한 염혜란의 얼굴은 평범한 얼굴이지만, 그만큼 변화에 최적화된 얼굴이 아닐 수 없다. 

염혜란은 2024년에도 분주할 예정이다. 이미 2023년의 연말을 2024년 1월 24일 개봉할 '시민덕희'의 홍보로 바쁘게 보내고 있다. '시민덕희'의 주연인 라미란과 함께 '충무로의 쌍란'이 되어 또 한 번 흥행 요정에 도전한다. '폭싹 속았수다' '아마존 활명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등 범상치 않은 타이틀의 차기작도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염혜란의 시대는 만개가 아니라 이제 시작인 셈이다. 염혜란이 보여줄 천의 마스크를 즐겁게 기다리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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