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가 대통령 입만 쳐다봐야 하나? 민주화된 건지 의문”
실체 없는 ‘약탈적 이권 카르텔’이라는 표현 가장 모욕적
소부장·감염병, 재난상황 응급수혈…중소기업 퍼주기는 관료주의 병폐
2023년은 대한민국 과학기술계뿐 아니라 산업계에도 부정적 의미에서 역사에 남을 한해였다. 본격적인 경제 개발을 시작한 1960년대 이래 사상 처음으로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하루아침에 ‘카르텔’로 몰린 과학자들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곳곳에서 진행 중인 연구를 중단하게 됐다는 탄식이 나왔다.
내년 국가 예산안이 지난주 국회를 통과한 뒤, 정부와 대다수 언론은 연구개발 예산이 애초 정부 안보다 6천억원 순증했다며 마치 늘어난 것인 양 홍보하지만, 실은 삭감률이 16.6%에서 14.7%로 조금 줄어든 데 그친 수준이다. 올해 31조1천억원에서 내년엔 4조6천억원 줄어든 26조5천억원이 연구개발 예산으로 배정됐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통령 한 사람의 말로 국가의 백년대계가 뿌리째 흔들릴 만큼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 구조가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지난 6월 말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연구개발 예산에 대한 제로베이스 검토’를 지시한 이후 벌어진 일련의 과정은 독재시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제1차 국가연구개발 중장기 투자전략(2023~2027)’을 비롯하여 애초 증액하는 것으로 짜였던 내년 예산안이 완전히 뒤집혔다.
과학기술계에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는데, 노동조합이나 학생단체를 제외하면 발언하는 지식인을 찾기 어려웠다. 검찰 정권이 무서워서일까, 다들 몸을 사렸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예외적인 경우다. 대한화학회 회장을 지낸 화학자로서 대학에서 화학과 과학커뮤니케이션을 가르쳤던 이 교수는 ‘동아사이언스’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오랫동안 칼럼을 쓰며 현실 참여 발언을 해 왔다. 그의 비판은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지난 20일 서울 성동구 문진탄소문화원 연구실에서 이 교수를 만나 연구개발 예산 논란에 대한 과학계의 목소리를 들었다.
―과학계 원로로서 정부의 내년 연구개발(R&D) 예산 대폭 삭감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삭감 자체보다 과정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야말로 폭탄처럼 터졌는데 그 과정에서 과학기술계에 굉장히 모욕적인 표현이 나왔죠. 여전히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약탈적 카르텔’ ‘이권 카르텔’이라고 하는 고약한 명칭을 썼어요. 교육은 그냥 카르텔이라고 하더니, 과학기술은 약탈적 이권이라고 아주 심하게 표현했죠.”
―정부가 소부장(소재·부품·장비)과 감염병, 중소기업 지원이 카르텔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지 않나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차관이 소부장과 감염병, 중소기업 지원을 카르텔 사례로 밝혔어요. 그런데 소부장과 감염병은 국가 재난 상황에서 응급 수혈을 했던 거고, 액수가 한정돼 있어서 사실 다 소진됐습니다. 과학기술을 진흥하기 위한 투자라기보다는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투자였죠. 중소기업 지원은 산업통상자원부와 중소벤처기업부로 넘겼어야 할 예산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료들이 틀어쥐고 있었던 겁니다. 액수도 얼마 안 되고요. 관료주의가 만들어낸 병폐로, 연구자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연구개발 역량이 없는 중소기업에다 그야말로 퍼주기를 하는 예산이거든요. 이것 때문에 과학자들이 전체적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니 용납이 안 되는 일이죠. 정부 예산을 줄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주 많이 잘못됐습니다. 과학기술계를 모욕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한 순간에 변방으로 내쳐져…인력 유출 가속화할 것
―가장 심각하고 우려스런 문제는 연구 생태계 붕괴인 것 같습니다. 젊은 과학도들의 이직이나 유학 등 현재 인력의 유출은 물론이고 앞으로 우수인재가 과학기술계를 지망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습니다.
“반세기 이상 과학기술은 정부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핵심 과제로 인식되어 왔어요. 근데 한순간에 아무 근거도 없이 한꺼번에 내쳐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이 확인됐죠. 젊은 사람들은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어요. 세상이 바뀌었구나, 과학기술이 국정의 중심이 아닐 수도 있는 거구나, 상황이 어려워지면 언제든지 변방으로 밀려날 수 있는 분야로구나. 우리 과학기술계가 처음 경험한 겁니다.”
―우수 인력들이 외국으로 유출되기도 할 것 같은데요.
“가속화할 겁니다. 인력 유출 문제는 항상 골칫거리였어요. 정부에서 신경을 안 써서 그렇지 연구 현장에서 우수 두뇌 유출은 지난 30년 이상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외국에 나가는 인력을 다시 끌고 들어올 수 있는 유인책이 기존에도 마땅치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에 더 불안해지는 경험을 확실하게 한 거죠. 앞으로 인력 유출은 점점 더 심해질 거라고 봅니다.”
―과학자들에 대한 처우나 연구 환경이 미국 등 선진국은 압도적으로 좋죠.
“굉장히 안정적이죠. 불안 요소가 거의 없고 한눈을 팔거나 관심사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거의 없습니다. 연구가 좋아서 연구만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도 할 수 있고 가족도 챙길 수 있고 모든 게 다 보장이 되는 거죠. 근데 우리는 지금 정말 대통령의 입을 쳐다봐야 하는 상황이 돼버린 거죠. 연구자들한테는 굉장히 불편한 상황입니다.”
국제협력 예산 대폭증액 굉장히 걱정
―내년에 신진연구자가 1200명 감소할 것이다, 이미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다는 박사후연구원이나 젊은 연구자들이 있다는 건 소문일 뿐인가요?
“1200명이라는 숫자가 어디서 나온 숫자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는데, 정부 출연연구기관에 계약직 연구원들이 있습니다. 박사학위를 하고 나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 전에 출연연에 가서 잠시 일하는 거죠. 그 친구들의 일자리가 불안해졌다는 사실은 거의 확인이 됐고요. 대학에 있는 박사후연구원들은 아직 불확실합니다. 정해지지 않았으니까요. 서울대만 몇백명이 일자리를 잃을 거라는 등의 얘기가 나오는데 그거는 내년 돼 봐야 알 겁니다. 예산이 줄었으니까 일자리 상실로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과제가 없어지면 인력을 유지할 수 없는 거죠. 내년이 되면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릴 겁니다.”
―갑자기 많이 늘어난 국제협력 연구에 대한 우려가 큽니다.
“굉장히 걱정스럽습니다. 국제공동연구 좋아요. 그런데 이렇게 정부가 주도해서 한꺼번에 아무 대책 없이 밀어붙이면 부작용이 말도 못하게 큽니다. 지금 나사(NASA)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하고 있는 아르테미스 달 탐사 프로젝트는 국제공동연구 아닌가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라고 세계 최대 규모의 핵융합실험장치가 있는데요. 거기서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사무총장도 하고 그랬어요. 이런 게 아주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국제협력이죠. 근데 5천억원밖에 안 되던 예산을 1조8천억원(국회 통과 뒤 1조1445억원으로 줄었다)까지 늘려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지금 기초과학연구원에 외국인 연구자들이 단장으로 와 있어요. 우리가 국제 공동연구를 안 한다는 얘기를 저는 정말 놀랍게 들었어요. 우리나라 상황에서 국제 협력은 참 애매합니다. 우리가 60년대, 70년대는 국제협력을 하지 말라고 해도 할 수밖에 없었죠. 국내에서 자가발전이 안 되니까. 저도 미국 가서 공부하고 왔으니까 그 세대인 셈이죠. 근데 지금은 미국 가서 공부하는 학생 수가 확 줄었습니다.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미국 가서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잠깐하고 오는 게 일반적이고, 그런 상태로도 미국 유수 대학교수로 뽑혀 나가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아냐…국내파도 미국 유수 대학 교수로
―국내파인데도요?
“그럼요. 옛날 우리나라 아닙니다. 제일 걱정스러운 게 이거죠. 정부가 선진국 따라가는 추격형 하지 말고 우리가 자가 발전하는 선진창조형으로 연구개발 프레임을 바꾸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추격형 국제협력을 요구하고 있어요. 조성경 과기부 차관이 취임사에서 ‘국제공동협력이라는 것은 젊은 연구자가 세계 일류를 만들어내는 현장을 체화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선진국에서 일류를 만들어내는 연구개발 현장을 체화한다는 얘기는 가서 배우라는 거 아니에요? 추격하라는 겁니다. 선진창조형을 요구하는 정부가 추격형 국제협력을 요구하고 있어요. 이게 앞뒤가 맞는 얘기인가요?”
―흥청망청 퍼주는 ‘봉’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표현도 하셨습니다.
“정부가 한국연구재단을 통해서 박사후연구원 지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돈도 얼마 안 되는 아주 작은 사업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한국 학생들이 미국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일자리를 찾으려고 했더니, 그 박사 연구원을 뽑아주는 미국 교수가 ‘너 한국에서 왔냐? 다른 애들 보니까 한국 정부에서 돈 받아 갖고 오던데 너도 돈 받아 갖고 와라. 그러면 내가 채용해줄게’라고 말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정상적으로 공부한 학생들이 일자리 찾는 데 갑자기 아주 큰 어려움을 겪었어요.
이명박 정부 때는 ‘월드클래스 유니버스티’ ‘월드클래스 육성 사업’이란 게 있었어요. 그것도 완전히 퍼주기 사업이었죠. 중국이 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중국의 ‘천인계획’이라고 미국이나 유럽의 연구자들한테 10만달러, 100만달러씩 연봉을 주면서 데려갔거든요. 그 과정에서 미국 하버드대학의 화학과 학과장이었던 사람이 스파이 혐의로 미국에서 실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요새 세상에 돈 있다고 함부로 나눠주는 거 아닙니다.”
―칼럼에서 지적하셨듯이 이류, 삼류 수준의 학자가 모일 수도 있죠.
“국제협력을 정부 차원에서 밀어붙일 때 한국계 과학자를 통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정부도 한국계 과학자를 염두에 두고 얘기를 하던데 이거 정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국계 과학자들은 그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을 해야지, 한국의 달콤한 예산에 맛 들이는 사람 중에 성공한 사람 못 봤어요. 한국계 중에서도 거기서 제대로 뿌리 박고 정말 활발하게 톱 수준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국 정부 예산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죠. 관심 갖는 사람들은 일류일 수가 없습니다. 규모도 작고, 관리도 합리적이지 않고, 인맥 관리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로 불편한데 정말 바쁜 사람들이 그런 거 왜 하겠습니까?”
상대평가 도입하면 부정부패 극심해질 것
―국제협력도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대통령의 한마디로 시작된 것 아닙니까? 대통령 말 한마디로 국가 백년대계가 흔들리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참 안타까운 겁니다. 민주화 이후에 대통령이 과학기술계에서 나와야 한다 또는 과학기술을 아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이런 얘기를 과학기술계에서 많이 했거든요. 예를 들어서 메르켈 독일 총리가 물리학과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영국의 대처 총리도 화학과 출신이었고, 시진핑 중국 주석도 이공계 출신입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권위주의 사회 얘기고 우리처럼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과학기술계가 국민을 바라봐야 한다. 국민을 감동시키는 노력을 해야지 대통령을 감동시키려고 해서는 희망이 없다, 그랬는데 이번에 보니까 제가 잘못 생각했던 거예요. 대통령을 감동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대통령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핵심인 거예요.”
―다시 권위주의로 돌아간 거죠.
“예, 이건 매우 심각한 일이죠. 우리가 80년대에 민주화가 됐다고 믿고 있었는데 정말 민주화가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정부는 앞으로 연구과제를 상대평가해서 하위 20%를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이렇게 되면 소위 될만한 연구, 안전한 연구만 하게 될 거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평가에는 반드시 주관적인 요소가 들어가고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평가의 숙명 같은 거거든요. 하위 20%를 잘라낸다고 하면 하위 20%에 안 들어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져요. 쉽게 얘기해서 로비가 극성을 부리게 되는 거죠. 로비 안 하면 잘리는데 어떡할 거예요? 부정부패가 오히려 더 극대화할 가능성이 매우 크죠.
창조적인 성과를 내게 하려면 우선 몰입할 수 있어야 하고, 그다음에 쉴 수 있는 여유를 줘야 합니다. 이게 교육학에서 나온 얘기인데 과학기술 연구개발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미친 듯이 몰아붙인다고 창조적인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쉴 때는 무한정 상상을 하고 한가롭게 지낼 수 있는, 방종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으면 진짜 창의적인 연구는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노벨상 관련 기자 전화 한통도 안받은 건 처음
―혁신기술과 스타트업으로 유명한 이스라엘의 경우 성공 가능성이 큰 연구개발 과제는 오히려 지원 대상에서 탈락시킨다고 하던데요.
“탈락시키는 게 아니고요. 성공 가능성이 커지면 지원 주체가 정부에서 기업으로 바뀌는 겁니다. 사업화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정부 연구개발에서 빠지는 거죠. 근데 우리는 그 연결이 제대로 안 되는 겁니다.”
―올해 노벨상 수상 소식은 정말 조용히 지나간 것 같습니다.
“제가 한 20여 년 동안 칼럼을 썼는데, 기자들한테 노벨상에 대해서 전화를 한 통도 안 받은 건 올해가 처음입니다.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 전엔 전화를 수없이 받았거든요. 이번 연구개발 예산 삭감으로 인해 우리 과학계가 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거 아닌가, 국민의 관심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 아닌가 걱정입니다. 상당히 큰 변화입니다. 이번 사태가 과학자들에게 과학기술이 국정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 거라면, 국민한테는 우리가 생각하던 과학기술 아니라는 메시지를 줬을 것 같아요. 그동안 과학기술은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정직하고 윤리적인 분야라고 얘기해 왔었는데, 이번 카르텔 발언으로 그 주장이 설득력을 잃어버린 거죠. 이 친구들도 역시 한국 사람이네, 이렇게 돼버린 거예요.”
축구는 잘하는데 왜 농구 안하냐 따지는 건 패배주의
―앞으로 우리나라는 노벨상에서 더 멀어지는 것 아닌가요.
“노벨상에 대한 관심은 조금 왜곡된 측면이 있습니다. 현대 과학기술은 두 가지가 있어요. 지식 창출과 기술 개발이에요. 우리는 지식 창출에 투자해본 적이 없습니다. 기술 개발에 올인해왔죠.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산업 강국으로 올라서게 된 게 가장 큰 성과죠. 노벨상은 지식 창출에 주는 겁니다. 우리는 1960년대에 선택을 한 겁니다. 지식 창출은 모르겠고, 일단 먹고 살아야 하니까 기술 개발하자고 선택을 한 겁니다. 그리고 엄청난 성공을 했죠. 그러니까 우리는 60년대에 이미 노벨상을 포기한 겁니다. 우리는 축구만 한 거예요. 축구만 했는데 갑자기 축구에서 잘 나가니까 넌 왜 농구를 안 하느냐, 젬병이네 이렇게 따지는 거예요. 노벨상에 대한 관심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술 개발 성과와 과학 지식 창출 성과를 대비해서 비판하는 건 패배주의예요. 우리가 특허 5대 강국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조선, 반도체 이거 다 어디서 온 건가요?”
―이제 지식 창출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식 창출을 하면 좋은데 국민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기술은 온전하게 그 소득을 우리가 챙기는데, 지식은 공공입니다. 우리가 정말 세계 시민을 위해서 인류 공영을 위해서 투자할 생각이 있느냐. 100만원을 투자했으면 100만원 이상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조급함에서 벗어나야죠. 100만원 쓰고 그냥 잊어버릴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한테는 그게 없는 것 같아요. 가뜩이나 투자가 적었는데 이제 더 적어진 거죠.”
대통령 유감 표명 필요…반도체가 과학기술의 전부는 아니다
―애초 정부 안보다 6천억원 증액하는 수준으로 내년 연구개발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 필요합니다. 제한적인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했었다, 표현이 거칠고 원만하게 추진하지 못했다고요. 역시 과학기술은 포기할 수 없는 거라는 메시지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은 곧 반도체인 것 같아요. 영국 가서도 그렇고 네덜란드 가서도 그렇고 만날 반도체 웨이퍼 들고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게 과학기술의 전부는 아니거든요. 과학 기술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건데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의심이 듭니다.”
―사상 초유의 예산 삭감이 이뤄졌는데 연구노조나 학생들을 제외하면 너무 조용합니다. 특히 현직 교수나 원로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발언하지 않습니다.
“이상하죠. 2008년에도 위기가 있었어요. 과기부가 해체되면서 교육과학기술부가 생겼죠. 그때는 원로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엉망진창을 만들 정도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을 비판했어요. 근데 이번에는 정말 조용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럴 만하다고 보는 건가요?
“아니요. 2008년에 목소리를 높이셨던 그 당시의 원로들은 대부분 다 운명하셨거나 뒤로 물러나셨어요. 세대교체가 된 셈이죠. 그다음이 저희 세대인데요. 저희 세대가 관료들한테 굉장히 잘 길들여진 세대입니다. 저희가 교수가 된 뒤에 연구재단이나 대학의 평가가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저희는 평생을 평가 속에서 지내왔죠. 관료들의 영향력을 실감하게 되죠. 현실 타협적이 됐고 순한 양 떼들이 돼버렸죠. 무기력증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결과 아닌가 싶어요.”
이재성 논설위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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