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십자가형’ 대한 반감서 기원… 나치 정권땐 유대인 600만 대학살[Who, What, Why]

이현욱 기자 2023. 12. 2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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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증오'로 일컬어진다.

유대인은 제3차 유대·로마 전쟁(132∼135년)에서 패배한 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 등 살고 있던 고향 땅에서 쫓겨났다.

1099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마그데부르크·보름스 등지에서 무슬림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으로 보내진 유대인 중 약 600만 명이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희생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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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y - 역사 속 反유대주의
유럽인구 3분의 1 앗아간 흑사병
샘물에 독 탄 유대인 때문 소문도

반유대주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증오’로 일컬어진다. 유대인은 제3차 유대·로마 전쟁(132∼135년)에서 패배한 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 등 살고 있던 고향 땅에서 쫓겨났다. 그리스어로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이른바 ‘디아스포라’의 시작이다. 특히 4세기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유대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로마사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데 대한 반감이 심했던 탓이다.

11세기 십자군 전쟁이 이어지면서 유대인들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이슬람화된 성지 예루살렘의 회복이 목표였지만, 무슬림 공격 전에 반기독교 세력인 유대인들을 먼저 제거하는 게 낫다는 논리였다. 1099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마그데부르크·보름스 등지에서 무슬림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넘겼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1215년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해 유대인에게 노란색 별 마크 착용을 의무화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 기간 유럽 곳곳에서도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다. 십자군은 라인강 인근 유대인 마을을 약탈하고 회당을 불태웠는데, 이때 무려 3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중세 후기 유대인들이 기독교도들이 종교상 기피하던 대부업에 종사하면서 차별은 더 심해졌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은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대표 사례다. 유대인은 “돈만 밝힌다”는 편견을 굳힌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1347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에 대한 책임도 유대인에게 묻는 사태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이 우물이나 샘의 근원에 독을 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혁명 이후 인권과 평등을 중시하던 프랑스에도 반유대주의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프랑스가 유대인 혈통의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종신유형을 선고한 ‘드레퓌스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유대인들이 겪은 역사상 최악의 가해자는 단연 나치 독일이다. 나치는 1942년 7월 22일부터 유대인 강제격리지역(게토) 중 가장 규모가 큰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으로 보내진 유대인 중 약 600만 명이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희생자가 됐다. 이러한 끔찍한 학살은 이스라엘 재건국을 위한 시오니즘을 확산시킨 원동력이 됐다.

이현욱 기자 dlgus300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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