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퇴행 속에서도 등불처럼 빛난 올해의 책들 [2023 행복한 책꽂이]
“출판부터 결과까지 그 모든 과정이 출판계에 던진 하나의 문제 같다.” 〈세이노의 가르침〉을 올해의 책으로 뽑은 한 응답자의 답변이다. 최근 몇 년간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책 목록 가운데 자기계발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세이노의 가르침〉이 그 기록을 깼다. 1955년생 1000억원대 자산가가 자수성가하면서 경험한 바를 담은 자기계발서로, 2000년부터 세이노(SayNo, 현재까지 믿어온 것들에 대해 ‘노’라고 말하라는 의미)라는 필명으로 써왔던 글을 엮은 것이다. 출간 9개월 만에 75만 부를 돌파하며 교보문고·예스24 등에서 올 한 해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선정되었다.
자기계발서의 인기가 새삼스럽진 않지만 〈세이노의 가르침〉은 독특한 구석이 있다. 그의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제본집이 2019년부터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2023년 3월 정식 출간을 하며 700쪽 넘는 분량의 책값을 7200원으로, 전자책은 무료로 판매한 점이 눈길을 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보고 힘을 얻길 바란다는 저자의 뜻이다. ‘주5일제 근무 좋아하지 마라’ ‘젊을수록 돈을 아껴라’ ‘나는 평등주의가 싫다’ 같은 60대 남성의 조언이 이토록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출판인들이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이유는 달랐다. “이보다 구체적인 조언(혹은 꾸지람)은 들어보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파격적인 가격정책으로 출판 생태계를 파괴했다. 한편으론 자기계발서 시장에 대한 여러 고민을 하게 만든다”라는 지적도 나왔다.
지난해와 유사하게 소설의 강세는 여전했으나 압도적 한 권은 없었다.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책(국내서) 상위 9권 중 4권이 소설이다. 모두 여성 작가다. 등단 27년을 맞는 권여선 작가의 일곱 번째 소설집 〈각각의 계절〉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도서출판 위고의 이재현 편집자의 추천 사유는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를 가늠케 한다. “우아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 편안함 속에서 불편함을 들춰내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1980년대생 여성 소설가의 활약이 돋보였던 한 해다. 여성주의 서사로 두꺼운 팬층을 보유해온 작가들이 신작으로 돌아왔다. 최진영 작가의 장편소설 〈단 한 사람〉은 수천 년 무성한 나무의 생 가운데 나뭇잎 한 장만큼의 시간을 빌려 죽을 위기에 처한 단 한 명만을 살릴 수 있는 ‘수명 중개인’에 관한 이야기다. “매번 한 발짝씩 앞으로 더 나아가는 성실한 작가를 지켜보는 즐거움”이라는 평이 눈에 띈다. 2년 만에 신작으로 돌아온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도 순위권에 올랐다. 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는 “그의 이번 소설을 읽고 울지 않았다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를 울린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이 시대에도 그는 여전히 세상을 활자로 울린다”라고 말했다.
첫 역사 추리소설에 도전한 정세랑 작가의 신작도 주목받았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통일신라시대 왕실의 서기로 일하는 설자은이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해나가는 이야기다. “어떤 장르든 어떤 분야든 그는 잘 쓸 게 분명하니까 읽었는데 정말 단 한순간도 예상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 성경책의 새 챕터를 쓴다고 해도 재밌게 쓸 것이다” 등 작가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응답이 많았다.
화제의 베스트셀러, ‘집중맞은 도둑력’?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에이징 솔로〉가 올해의 책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6년 전 〈이상한 정상가족〉으로 아동인권과 가족주의 문제를 살핀 김희경 작가가 이번에는 1인 가구 논의에서 공백이었던 비혼 중년의 삶을 조명했다.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결국은 삶에서 ‘혼자’의 시간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책” “중년 비혼들이 선택한 다양한 삶의 양식이 두고두고 참고가 된다” 등 호평이 많았다. 한 출판인은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를 가족에 둔 전통을 이제 깰 때도 되었다”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한국 사회의 ‘공백’을 채우는 기록은 또 있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교사 출신인 저자가 빈곤가정에서 자란 학생 여덟 명과 10년 넘게 교류하며 쓴 책이다. “슬프고 치열한 가난의 르포”이면서 “현장성과 인터뷰이에 대한 다면적 포착”이라는 점에서 출판인들의 추천을 받았다.
2023년 올해의 책 목록에는 언론인이 두각을 나타냈다.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는 김인정 작가의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는 ‘놀랍다’는 호평이 잇따랐다. 을유문화사 최원호 편집자는 “피아 식별에 몰두하지 않고 ‘고통-구경하기’에 연관된 시스템 전체를 조망하는 시점만으로도 올해의 책에 꼽힐 만하지만, 거기서 섬세하게 단련된 문체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시사IN〉 기자인 장일호 작가의 에세이 〈슬픔의 방문〉도 마찬가지다. 올해의 책(국내서) 가운데 유일한 에세이다. “슬픔을 껴안는 태도가 이토록 열정적이고, 성숙하고, 따뜻하고, 심지어 웃기기까지 하다는 걸 알려준다”라는 평가가 나왔다. ‘올해의 필자’를 묻는 질문에도 작가로서 두 언론인의 가능성에 주목한 출판인이 여럿 있었다.
출판인들의 압도적 추천을 받은 책은 번역서에서 나왔다. 화제의 베스트셀러,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다. 한 출판인은 “〈도둑맞은 집중력〉을 빼놓고 올해 출판계를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평했다. 현대인의 집중력 저하를 개인의 실패로 바라보는 시선을 넘어서서 수면 부족, 독서 붕괴, 테크기업들의 주의력 조종과 약탈 같은 배후를 좇는다. ‘산만한 시대에 시의적절했다’는 의견이 〈도둑맞은 집중력〉의 인기를 한 줄로 요약해준다. 이 외에도 “사람들의 혼돈과 결핍감을 콕 집어준 책”이자 “마음의 헛헛함을 채우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해주는 책” 등 출판인들의 상찬이 이어졌다.
단순히 주제 때문만은 아니다. 책을 읽고 디지털 디톡스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후기가 이어지면서 ‘화제를 몰고 다니는 올해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SNS상에서 ‘도둑맞은 집중력’은 ‘집중맞은 도둑력’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이다. 출판사 어크로스가 ‘집중맞은 도둑력’으로 페이크 커버를 특별 제작했다. 책 한 권의 인기가 ‘밈’이 되는 과정이다. “도둑맞은 집중력을 콘셉트와 홍보의 메시지에 집중했나” “뭘 어찌해도 ‘집중맞은 도둑력’ 아니, ‘도둑맞은 집중력’ 밈을 이길 수 있는 책이 없었다”라는 위트 섞인 출판인들의 후기가 눈길을 끌었다. ‘마케팅의 좋은 사례’라는 점에서도 출판계가 눈여겨보고 있다. 오렌지디 김영훈 편집자는 “누군가 출판기획과 마케팅의 가능성을 묻거든 고개를 들어 어크로스를 보게 하라. 출판이 카지노가 되어버린 지금도 매번 기획과 마케팅으로 베스트셀러라는 결실을 만드는 그들의 역량이 놀랍다”라고 말했다. 어크로스는 2023년 올해의 출판사로 선정되었다.
올해도 과학 서적의 인기가 주요하게 포착된다. 〈암컷들〉과 〈세계 끝의 버섯〉 모두 여성 저자이면서 ‘치밀한 조사와 과학을 바탕으로 우리의 인식을 뒤집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자연계 암컷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암컷들〉은 ‘인간의 편견에 가득한 성 관념을 깨부수는 책’이다. 송이버섯 탐구를 통해 인류 생존이라는 화두를 꺼내든 〈세계 끝의 버섯〉에도 찬사가 이어졌다. “후기 자본주의가 막바지에 다다른 이 시대에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버섯이라는 작은 존재로 증명한다” “책의 시작도, 사고의 전개도 모두 좋다. 버섯처럼 희망이 돋기를 바라는 마음까지”라는 추천 평이 인상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올해의 책(번역서) 가운데 유일한 소설이다. 한 출판인은 “‘하루키’라는 청춘의 아이콘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한 역작”이라고 평했다. 할리우드 유명 배우이자 트랜스젠더인 저자의 회고록도 화제를 모았다. 엘리엇 페이지는 〈페이지보이〉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연기를 시작하면서의 경험,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아냈다. 올해의 출판계 이슈로 “트랜스젠더와 퀴어, 해외에서의 활력이 국내에서 터지기 직전이라는 느낌”을 언급한 한 출판인의 평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페이지보이〉를 번역한 송섬별 번역가는 올해의 번역가로 꼽혔다.
“정부가 벌인 또 하나의 퇴행”
인문학 분야의 강세는 1인, 소규모 출판사가 이끌었다. 소규모 출판사 카라칼이 만든 〈에세이즘〉은 “‘에세이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시대를 분석하는 유일무이한 책”이란 찬사를 받았다. 마음산책 이동근 편집자는 “학문적 야심이나 비평가로서의 자의식을 동력으로 삼은 글이 아니라, 에세이라는 장르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 애정을 내밀하게 들려주는 방식이라서 더욱 깊이 와닿는다”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서양 학술용어 번역과 근대어의 탄생을 다룬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는 “지금 우리의 일상을 인식하게 하는 핵심 개념어를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라는 점에서 호평이 이어졌다.
출판인 설문에서는 올해 주목한 출판계 이슈에 대해서도 묻는다. 어느 해보다 출판계가 크게 들썩였던 한 해다. 출판인들에 따르면, 플랫폼P 용도변경, 구청의 도서관 예산 삭감을 공론화한 서울 마포중앙도서관장의 파면으로 논란을 빚은 “마포구청의 횡포”는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책과 독자가 만나는 공간으로서 도서관의 의미는 일관되게 정책적으로 존중될 거라는 믿음을 흔든 사건”이다. 서울국제도서전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서도 “정부가 벌인 또 하나의 퇴행”이란 평가가 나왔다. 그후 이어진 출판 지원 예산 삭감은 “출판사들이 전반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측면”을 만들고 있다.
낮은산 강설애 편집자는 “올해 출판 관계자 둘 이상이 모이면 빠지지 않고 나왔던 이야기는 심각한 매출 하락과 정부의 독서·출판 지원 예산이 삭감 이슈였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안 그래도 독서 인구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작가·화가·번역가·출판인·서점인 등 출판 및 독서 문화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해가 갈수록 힘들어지는데, 관련 예산을 뭉텅이로 삭감하고 있으니 2024년이 어떠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K콘텐츠며 K컬처는 오랜 시간 축적된 독서 문화가 다양한 분야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문화의 뿌리를 잘라내는 현 정부의 정책이 방향을 바꾸길 바란다. 이제 막 세계로 뻗어 나가려는 한국 문화가 성장을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퇴행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알라딘 전자책 불법 유출 사건을 눈여겨보는 시선도 많았다. 올해 한 고교생에게 알라딘의 시스템이 해킹돼 전자책 72만 권이 유출되었고 5000권이 텔레그램에 유포되었다. 알라딘은 2023년 12월7일 피해를 입은 출판사에 위로금을 지급하기로 했으나 출판인들의 실망이 이어졌다. “최근에 발표된 알라딘의 보상책은 한국의 대표적 온라인 서점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저급한 것이어서 앞으로 출판사들의 대응과 추이에 주목하고자 함” “출판저작권에 대한 유통사의 인식 수준을 알 수 있었던 사건으로 대책 및 피해 보상, 시스템 보완이 적극적으로 논의, 마련되어 공론화되어야 한다”라는 지적이 주를 이뤘다. 그 외에도 도서정가제 합헌 결정, 챗지피티 대중화 원년 등이 2023년을 달군 출판계 이슈로 거론되었다.
김영화 기자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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