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막 찢을 듯했던 그 겨울의 지리산 서북릉 칼바람

황소영 여행작가, 등산 유튜버 2023. 12. 27.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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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 검은별'의 지리산 이야기] (6) 서북릉
첫눈 내린 어느 해 11월의 바래봉 가는 길.

처음 지리산을 올랐던 1997년부터 그 산은 내게, 아니 나는 산에게서 떼어질 수 없는 하나의 조각이었다. 과거의 나는 지리산에서 떨어진 생명 조각이며, 그 생명은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뜯긴 자리를 찾아 지리산 깊은 곳을 헤집고 다닐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정작 나이가 들고 보니 그때의 감성과 열정은 절반도 남아 있지 않다. 막힌 길들에 흥미를 잃었고, 뒤늦게 두 아이를 기르느라 바빴고, 무엇보다 만사가 귀찮아지기도 했다.

출구가 보이지 않던 20대의 나는 높은 산의 혹독한 바람에 스스로를 괴롭히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지독히 추웠던 지리산 속에서 따뜻하기만을, 눈이 내리지 않기만을, 산행이 빨리 끝나기만을, 더 나아가 민박집의 뜨거운 방에 눕기만을 바라며 억지로 걷고 있었다. 지리산 서북능선에서였다. 정말 추웠고, 정말 힘들었던 그해 겨울 산행.

지리산 주능선을 기준으로 왼쪽, 그러니까 노고단에서 성삼재 도로를 건너 만복대(1,433m)~정령치(1,172m)~바래봉(1,186m)으로 이어진 약 20km의 능선을 그 방향에 따라 '서북릉'이라고 부르는데, 이 길을 한 번에 이어서 종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래봉 임도로 오르는 게 지겹다면 산덕마을을 기점으로 삼는 것도 좋다.

지리산 서북릉을 아시나요

바래봉, 세동치, 정령치, 만복대, 성삼재에 물이 있지만 (일부는 음용 금지) 중간에 하룻밤 묵어갈 대피소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 보통은 정령치를 기준으로 반반씩 나눠 산행하는 편이다. 서북릉 북쪽 끝 바래봉은 철쭉 피는 봄과 눈 내린 겨울에, 남원과 구례의 경계인 만복대는 억새 일렁이는 가을에 찾는 사람이 많다.

서북릉만을 따로 떼 종주한 적도 있지만, 여름과 겨울에도 '태극종주'를 하려고 새벽부터 덕두봉(1,151m)을 올랐었다. 여름은 더워서 힘들었고, 겨울은 해가 짧고 추워서 고생했다. 그해 겨울이 왜 유독 더 힘들었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구입 후 처음 멘 배낭이 불편해서라고, 겨울 태극종주 산행을 중도 포기한 이유를 배낭 탓으로 돌리고 말았지만.

중간에 야영해야 했기에, 남원역에서 만난 일행들의 배낭은 겁이 날 만큼 거대했다. 4박5일의 긴 일정이었다. 그래도 나는 건방지게 "첫날은 노고단까지 가고, 둘째 날은 주릉이니까 장터목까지 빼고요. 동부능선은 상황 봐서 결정하지요"라며 능청 떨며 얘길 했는데, 우리의 일정과 나의 생각은 산행 내내 몇 번씩 바뀌고 말았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더 하얘질 바래봉 전나무 숲길.

혹독했던 20년 전 겨울 지리산

지금은 철거된 바래봉 산불감시초소를 출발할 땐 이미 낮 12시가 넘어 있었다. 떠나기 전 각자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두었다. 이렇게 추운 날엔 찬물보단 따뜻한 물이 좋았다. 인원이 아홉이었는데, 보온병 소지자는 나까지 넷뿐이었다.

"겨울 산행을 하면서 어떻게 보온병도 안 갖고 와요? 조그만 거라도 갖고 오면 중간중간 뜨거운 물 보충해서 몇 시간씩 마실 수 있는데 사람들하고는, 쯧쯧."

바래봉에서 돌아본 지리산 서북능선. 만복대, 종석대, 반야봉 등이 보인다.

나는 큰소릴 치고 0.4리터 보온병을 꺼냈다. 코펠 안에서 후끈한 김이 올라왔다. "사람들 말이야. 이렇게 보온병을 갖고 왔어야지"라고 말하며 당당하게 스테인리스 은색 뚜껑을 열었는데, 밀폐 용도의 속뚜껑을 두고 왔다. 아무리 꽉꽉 닫아도 보온 효과가 없을뿐더러 물이 샐 게 뻔했다. 아, 무안해라. 일행들이 "버리고 가라!"고 구박하는 걸 꿋꿋이 버텨내고 배낭 속에 보온병을 넣어 두었다. 결국 짐만 늘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나와 후미의 불쌍한 일행들은 칼바람 몰아치는 능선을 휘청이듯 올랐다. 사방에서 밀려든 겨울바람에 정신이 아찔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강풍이 오른쪽 귓속을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옷깃을 잔뜩 올리지만 그깟 헝겊으로 막을 바람이 아니었다. 고막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아아" 괜히 목소리를 내볼 정도였다. 세걸산부터 정령치까진 혼자였다. 선두의 여섯은 어느 곳을 걷고 있는지, 뒤의 둘은 어디쯤 오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지난 겨울 첫눈 내린 지리산 서북릉.

눈 위에 떨어진 지도가 보였다. K의 것이었다. 1:5만 지도를 도엽명 별로 코팅해 둥글게 말아 넣었는데, 아마도 배낭에서 빠진 모양이었다. 접힌 게 아니어서 나도 마땅히 넣어둘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손에 쥐고 갔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사실 배낭을 내릴 힘이 없었다. 아니, 코앞의 정령치가 그렇게 멀어질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잤다고?

능선에 붉은 노을이 지고 마을의 불빛이 조금씩 반짝였다. 도로가 통제되었는데도 나는 그저 저 불빛이 정령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빛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 위의 발자국도 더 이상 길잡이가 되어 주질 못했고, 하늘엔 손톱만큼의 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발이 헛돌 때마다 열량이 쭉쭉 빠지는데도 도저히 배낭을 내릴 수 없었다.

'아, 이래서 사람이 죽나보다.'

종종 산에서 발견된 사체의 배낭 속엔 먹을 것도 침낭도 있다던데, 판단력이 흐려지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정신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선 선두와의 거리를 좁히는 게 급선무였다.

한때는 억새능선으로 유명했던 만복대.

선두의 발자국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것은 양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쏜살같이 덮여 버렸다. 제대로 걷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저 이런 생각만 들었다.

'혹시 바래봉 쪽으로 되돌아가는 건 아닐까. 이상하다. 왜 고리봉(1,304m)이 안 나오지? 발자국의 방향은 앞사람과 일치하는데… 저건 왠지 꼭 고리봉 같다. 힘을 내 올라서면 어둠 속 저편에 다시 봉우리로 이어진 능선이 보일 거야. 이번엔 정말 고리봉일 거야. 아니, 능선은 더 이어져 있다. 잡목 사이로 보이는 별과 가지에 얼어붙은 상고대가 반짝인다. 꼭 랜턴 불빛 같다. 앞에 일행이 있는 걸까. 누군가 나를 기다려 주는 걸까. 다시 보니 아니군. 아무것도 아니야. 다들 만복대를 넘었을까? 노고단까지 가기로 했는데….'

나무를 짚고 바위를 오르느라 몇 번씩 코팅된 지도를 떨어뜨렸다. 장갑 낀 손에 다 쥐어지지도 않는 둥근 지도.

'나쁜 녀석, 버리고 갈까? 자기 지도가 이렇게 떨어진 줄은 알까. 설마 거추장스러워 일부러 버렸나?'

바람이 몰아치는 봉우리 끝에 흐릿한 이정표가 보였다.

'고리봉'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제야 힘이 났다. 어딘가로 떠났던 정신이 돌아왔다. 마지막 힘을 짜내 정령치 휴게소로 내려섰다.

붉은 꽃을 맺었던 철쭉나무에 하얀 눈꽃이 피었다.

그날 우리는 정령치 여자 화장실에서 밤을 보냈다. 다행히 형광등은 켜졌고 코펠 안에선 뜨거운 물이 끓고 있었다. 선두는 오후 5시에 도착했단다. 바래봉 출발은 거의 같았는데 무려 3시간 30분이나 먼저 도착한 것이었다. 후미는 나보다도 1시간이 늦었으니, 발이 빠른 죄로 선두는 이 화장실에서 4시간 30분을 버틴 셈이었다. 다행히 냄새는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지긋지긋한 서북릉은 처음이었다. 누런 콧물이 그대로 인중에 얼어붙었다.

노고단까지 가려 했던 일정은 첫날부터 무산됐다. 겨울 태극종주를 하겠다고 집을 나섰지만 우리는 결국 2박3일 동안 연하천까지밖에 못 갔고, 다행히(?) 폭설로 입산통제가 되는 바람에 아쉬운 척 그러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함양 음정으로 하산했다. 그날 밤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민박집에서 따뜻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스님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과 같다 하여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 바래봉.

그후에도 서북능선 산행을 몇 번 더 했는데, 20년 전 겨울처럼 힘든 적은 없었다. 아니, 그렇게 산행하라고 해도 이제는 못 할 체력이 되었다. 어쩌면 나의 젊음을 고스란히 받아낸 지리산은 살집 붙은 중년의 나를, 여전히 그윽하고 인자한 눈길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다시 등산화 끈을 조여 볼까!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으니까. '멀리, 높이, 빨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안전 산행을 기원하며, 건강하고 행복할 2024년 화이팅!

겨울엔 정령치와 성삼재 도로를 통제할 때가 많아서 산행 코스가 한정돼 있다. 바래봉은 설경이 유명한 데다 교통편도 좋아 겨울에 특히 인기가 많다. 용산리 임도에서 출발해 바래봉을 오가는 길이 가장 무난한데, 정상 부근까지 임도가 뚫려 초등학생도 오를 수 있는 산행지다. 왕복 약 10km에 4시간쯤 걸린다. 그밖에 팔랑마을, 산덕마을, 구인월마을, 전북학생수련원 등에서도 오를 수 있다. 도로가 통제되면 만복대 산행은 쉽지 않다. 구례 상위마을에서 묘봉치를 거치거나 남원 고기리에서 고리봉~정령치를 지나야 한다. 서북능선 종주는 봄이나 가을이 좋다. 정령치 도로 입구(육모정)에서 시작하는 구룡폭포 산행도 쉬엄쉬엄 다녀오기 좋다.

교통

바래봉에 오르려면 남원으로 가야 한다. 전라선이 남원역을 지난다. 서울, 부산, 대구 등에서 남원을 오가는 버스가 있다. 이후 운봉행 버스로 갈아탄다. 겨울엔 운행을 중단하지만 그 외의 계절엔 (월요일 제외) 역과 터미널에서 정령치행 버스를 탈 수 있다. 요금은 1,000원. 이 버스가 겨울에도 운봉까진 가는데, 운봉에서 산행 초입까지 걷기엔 조금 멀다. 용산리 지리산허브밸리는 무료 주차가 가능하다.

맛집(지역번호 063)

남원까지 왔다면 추어탕을 빼놓을 수 없다. 추어탕거리를 중심으로 새집추어탕(625-2443), 부산집(632-7823), 현식당(626-5163) 등이 밀집돼 있는데, 새집추어탕은 브레이크타임이 없어서 언제든 들러 먹기 편하다. 1인분 1만2,000원. 운봉에는 집밥을 먹을 수 있는 유미네(634-0313), 카페를 겸하는 오헤브데이호텔(0507-1382-8005) 등이 있고, 남원예촌이 잘 보이는 시내에 대형카페 빈타이(636-4376)가 있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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