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 김이듬 “랜턴을 비추며 걸어 나온 그 시간, 시는 숨비소리였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양성 나왔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이가 긴 줄이 그어진 진단 키트를 그의 눈앞에 대고 흔들면서 사무적으로 말했다. 머릿속이 천천히 하얗게 변해 갔고, 모든 것은 배경으로 사라졌다. 대법원 결정 같은 판단 앞에 한 나약한 인간이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네덜란드 국제 시 축제에 이어서 독일 국제 시 축제까지 참여한 그는, 귀국을 앞두고 받은 진단검사에서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너무 무리했던 것일까. 축제 기간 한복을 입고 벽안의 사람들 앞에서 시를 낭송했다. 한국 시인의 대표로서 많은 한국 시인들의 시도 소개한 그였다.
팬데믹이 아직 맹위를 떨치던 2022년 7월, 시인 김이듬은 독일 호텔에 열흘 동안 격리돼 있었다. 사람을 만날 수도, 여행을 할 수도 없었다. 귀국 일정을 늦추면서 적지 않는 추가 경비도 들었다. 식사는 배달 음식으로. 센 치료약을 먹을 때마다 정신도 왔다갔다 했다. 일주일쯤 지나니 팔까지 말라가는 것 같았다. 완벽한 고통.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코드를 뽑지 않았던 냉장고, 익산시가 주최하는 작가 투어. 익산 미륵사지도 보고 싶었는데. SNS도 끊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가 어디 있는지도,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절대적 고독. 세상에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그는 독일에서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돌아가서 뭐 하겠어? 다시 생각해 보니, 굳이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뾰족한 수도 없어 보였다. 허무한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살 수도 없겠고. 살아온 삶이 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태어남도, 삶도, 죽음도 모두.
이게 도대체 뭐야! 호텔의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노트북을 치기 시작했다. 시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시를 쓰고 또 썼다. 격리 열흘째 코로나 해지 통지를 받을 때까지, 그는 독일의 호텔에서 시를 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 「너는 여기에 없었다」였다.
“혼자 옮길 수 있는 짐만 가지고 이동한다. 오늘은 한 달째 되는 날, 아무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병자가 벙커에 있어도 하천에 버려졌어도 모르는 전쟁터 같다. 굳이 만나야 할 사람이 없다는 건 행운일까. 냉장고 코드를 뽑아놓고 올걸. 우편함에는 연체료 붙은 고지서들이 쌓여 있겠지. 익산에 가기로 한 날짜가 지나버렸다. 미안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아무도 관심 없지만 존재하고 있다. 병이 나으면 귀국하려고 비행기 티켓을 바꾸는 데만 천칠백 유로를 더 지불해야 했다. 굳이 돌아가야 할까, 가지 않으면 어디서 살 수 있는가, 나는 있었지만 존재하지 않았다. 곤경을 기회로 바꾸세요, 지껄이는 소리라도 듣고 싶다.”(「너는 여기에 없었다」 전문)
김이듬 시인이 팬데믹 시기 이국에서 마주한 삶의 누추한 진실을 그린 시편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비롯해 68편을 모은 신작 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문학동네)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8번째 시집으로, 『마르지 않는 티셔츠를 입고』(현대문학) 이후 4년 만이다.
김 시인은 이번 신작 시집에 국제 시 축제 참가 등 해외에서 겪은 여러 경험이나 사유를 비롯해 부조리한 현대 사회 비판 및 문명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투명한 것’이 결코 ‘없는 것’이 아니라고, 가시처럼 세계와 본질에 파고들면서 노래한다. 짜장면을 먹다 말고 서로의 정치적 입장이 다름을 알게 된 두 친구(「적도 될 수 없는 사이」) 같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뿐만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몸으로만 밀고 가야하는 삶과 창작 과정에서 부닥친 고민이나 실존적 깨달음 역시. 발표되지 않는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시집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해외에서 만난 다양한 경험이나 사유. 확실히 세계적이고, 글로벌하다. 해외에서 만난, 자신만의 색깔을 내는 수많은 사람이 담겨 있다. 시편 「도로시아」 역시 가난하고 늙었지만 자신의 향기를 잃지 않는 노인들이⋯.
“이 그림이 팔리면 맥주를 살게 우리는 루트비히성당 앞 광장에서 그림을 팔았다 광장에는 돌로 만든 탁구대가 있었고 탁구를 치려는 주민들로 붐볐다 플라타너스 열매가 떨어졌다 밤에는 탁구대에 빵과 커피, 싸구려 와인을 놓고 저녁을 먹었다/ 그러는 사이 선의와 열정을 지닌 세 사람은 백발이 되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은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그림 속에 암시했다/⋯끝이 좌절이기도 하다면 사랑이 완벽한 결합으로 완성된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사람들은 울부짖을 때 위선을 드러낸다/ 하지만 나의 지루한 경험이 말한다 모든 평범한 인간들도 위대한 순간이 있었다”(「도로시아」 부문)
―‘모든 평범한 인간들도 위대한 순간이 있었다’는 엘리엇의 문장으로 끝맺는 시인데, 세상의 모든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2022년 여름 독일 국제 시축제 당시 일정이 비면 여행을 가거나 사람을 만나곤 했다. 그때 베를린자유대에서 만난 지인의 초대로 도로시아의 한 로컬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이때 탁구대가 있는 성당 앞 광장이 보였는데, 거리의 악사와 그림을 파는 사람 등이 탁구를 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들과 친해진 뒤, 일정이 빈 날 다시 찾아갔다. 함께 그림을 파는 등 이들과 하루를 온전히 보냈다. 탁구대 위에 싸구려 와인 한 병을 올려놓고 이야기도 하고. 그때 독일에서 일기처럼 쓴 미발표 작품이다. 아무리 곤궁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도 특별한 빛나는 시간이 있었고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저도 알아가고 있다.”
해외 경험이나 사유는 그 자체에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로도 과감하게 육박한다. 한국을 찾는 미국 친구에게 입국장에서 한국을 어떻게 소개할까 고민하는 장면을 그린 시편 「입국장」을 읽어보라. 부조리한 현실이 가슴 아프지만, 두 사람이 부조리의 보편성에 공감하는 장면에선 전율할 지도.
“미국 국적 친구를 기다린다/ 심야 공항 터미널은 지나치게 환하다// 그녀에게 이 도시를 어떻게 소개할까// 순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잡하고 불안정하며/ 폐허가 된 건물들의 더미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파무크처럼 고백할 수 있을까//⋯알려줄 것들이 조각케이크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기만 하다면/ 이즈음 나는 어두운 방에 나를 가둔 채 발작하지 않았겠지/ 신경안정제 부작용인지 부은 얼굴로 너를 마중하러 나오지는 않았겠지// 네가 예민한 건 아니야/ 친구가 와서 나를 안아주면/ 환영한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지”(「입국장」 부문)
―이 시는 어떻게 태어나게 됐는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고 일주일쯤 됐을 때,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친구가 온다고 했다. 케이 팝을 좋아하고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친구를 밤에 공항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비행기가 조금 연착했다. 이때 친구에게 한국을 어떻게 소개할지 되게 난감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더라. 평택의 제빵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배합기에 끼여 숨졌고, 이태원에선 사람들에게 떠밀려 압사당하는 참사가 벌어졌으니까. 멋있는 고궁 등 한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은데, 이미 SNS에도 많이 거론이 됐을 텐데. 일단 화장실에서 몰카 같은 게 있는지 확인도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것 자체가 압박이 되더라. 공항에서 수첩에 끄적끄적했다가 나중에 마무리를 했다.”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과 분석 역시 날이 서 있다. 「적도 될 수 없는 사이」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갈등 혐오 구조가 얼마나 가까운 이웃과 친구, 가족 속으로 파고들고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묘파한 시편이다. 여전한 것은 하나도 없을 것 같다.
“극장에서 나왔을 땐 이월이었다/ 저녁이었다/ 홍대 앞이었다/ 청년들이 많았다/ 리어카에 막걸리를 가득 싣고 가는 아저씨가 있었다/ 여전한 것은 안도감을 주었다/ 콜센터로 현장 실습 나갔다가 자살한 여고생의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며 걸었다/ 근로기준법과 정치에 관해서도/ 나는 배두나가 좋았다/ 우리는 비슷한 검정 외투를 입고 있었다/ 밥을 주문하고는 대통령에 대해 얘기했다/ 서로를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지만/ 낱낱이 보지 않고 대충 얼버무려 짐작했을 뿐/ 그 사이 우리는 정치적 입장을 말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차이 때문에 서로를 죽이는 어리석은 어른처럼 굴었다/ 짜장면 소스에서 바퀴벌레 반쪽을 발견했다/ 한 그릇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찌그러진 양동이만한 마음의 검은 소스를 휘저어보면 컴컴한 심연 도처에 우글거리는/ 안에서 나는 끌려나왔다”(「적도 될 수 없는 사이」 전문)
“친구와 함께 본 영화는 「다음 소희」였다.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소희가 콜센터에 취업했다가 말도 안되는 부조리한 시스템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데, 소희가 또다시 나올지 모른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추웠던 지난 2월 저녁, 친구와 함께 홍대 CGV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밥을 먹으면서 영화에 나온 콜센터 직원 이야기나 청소년 문제 등을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자연히 사회, 경제, 정치 문제로 옮겨갔다. 취향이 비슷하고 좀 안다고 생각해 정치 이야기까지 하게 됐지만, 정치적 입장은 너무나 달랐다. 대립적인 정치적 견해가 너무 무섭다는 것을 배웠다. 시 창작모임을 하는 한 여성에게서 남편과 정치적 입장이 달라져 같이 밥을 먹기가 싫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다큐멘터리처럼 쓴 시다.”
시편 「내일」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식 지상주의’ 세태를 고발하는 시편이다. 자신의 삶을, 내일을 자식에게서 찾는 것은 자식에게 너무 부담감을 줘서 좋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도 좋지 않다고.
“‘공부 열심히 해./ 내가 누구 때문에 사는지 알지?’// 한 여인이 전철 안에서 통화한다/ 아마도 전화기 너머 자기 자식에게 묻는 것 같다/ 자식이 받을 부담감이 통째로 내게 건너온다//⋯ 다른 누구 때문에 살면/ 삶의 까닭이 선명하겠다/ 묵직하고 무섭겠다// 그리운 이는 물 건너/ 혼자 외로이 있는데// 포기할 수 없는 게 내겐 있는지// 차라리 살고 싶을까/ 나 때문에 사는 사람이 있다면// 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내일」 부문)
―시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
“전철을 타고 한강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날 전철 안에서 한강을 보고 있는데, 제 옆에 앉아 있는 여성이 통화를 하면서 큰소리로 외치더라. 내가 누구 때문에 사는 줄 아느냐고. 다들 행복하면 좋겠는데 모두 괴로워하는 게 가슴 아팠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누구 때문에 살지 말고 자기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면 좋겠다고. 희생을 하면서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묻는 태도는 좀 줄어들면 좋겠다고.”
시인의 시선은 한국 사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거대한, 하지만 모순에 찬 현대 문명을 향해 나아간다. 시편 「두 유 리드 미」에는 인간이 많은 정보를 읽고 습득하지만, 반대로 인간의 모든 것이 읽혀져서 정보가 되는 시대의 역설이 담겨 있다.
“길가에 앉아 사람들을 읽는다 내가 읽던 사람이 노란 버스에 탄다 구름을 읽는다 가로수와 새를 읽는다 건성으로 읽을 때도 있다 이상하게 나는 난독증을 고칠 의욕이 없다 다시 길을 걸으며 간판을 읽는다 독일어를 아는 게 도움이 된다 아우구스트스트라세에서 서점에 들어갔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당나라 말기 러브레터 이집트 상형문자 벵골어 부기어 등 오래된 언어들이 적힌 얇은 책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글자를 통해 사람을 읽는 게 재밌다 읽을 게 없으면 죽고 싶다 얼굴은 표지의 기능도 상실했다 워낙 리커버가 많으니까 나는 읽으면서 읽힌다 투명 비닐로 포장된 타이포그래프 잡지도 골랐다 셀프 계산대가 있었다 공항 검역대를 통과할 때처럼 소리가 난다 바코드 읽는 기계로 사람을 읽는다”(「두 유 리드 미」 전문)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읽히는 시대를 묘파했는데.
“마치 개나 동물에게 칩을 넣어서 그들의 행로를 추적하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아마 바코드 칩 같은 게 생길 것 같다. 아니 이미 그런 것이 작동하는 지도 모른다. 교통카드, 신분증, 신용카드, 수많은 바코드 등등. 거대한 빅 브라더 안에 있는 것 같다.”
한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 실존적 고민 역시 담겨 있다. 「내일 쓸 시」나 「여장 남자 아더씨」 등에는 시에 대한 순수를 잃지 않으려는 모습과, 시에서 벗어나 다양한 정체성 역시 갖고 싶어 하는 이중의 마음이 녹아 있다.
“어제 두 시인과의 낭독회가 끝날 무렵/ 객석에서 독자가 제게 질문했어요/ ‘지금까지 쓴 작품 중에서 대표작은 뭔가요?’// 조금 머뭇거리다 저는 답변했답니다/ ‘제 대표작은 아직 못 썼습니다. 내일이나 모레쯤 쓸 예정이에요.’// 대개 작가들이 하는 농담이죠/ 정밀하게 시간이 흘러도 내일은 지연되죠/ 누가 뭘 가지고 도착하든// 지구가 태양과 멀어지고 있는 시각입니다/ 여전히 저는 아무하고도 같이 살 수 없지만/ 어머니, 저는 시가 제 생애 전부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내일 쓸 시」 부문)
―이 시는 좀 사연이 많을 것 같은데. 많이 울었을 것 같기도 하고.
“저의 7번째 시집이 나왔을 때 어느 곳에서 낭독회를 가졌다. 낭독회가 끝나고 객석에서 시집 속의 질문이 나왔고, 저 역시 시집 속의 대답을 했다. 그런데 행사장을 빠져나오는데 불현 듯 여러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시를 몇 백 편을 썼는데 아직까지 대표작이 없다니. 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에만 너무 몰입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만약에 무엇을 사랑한다고 너무 가깝게 따라다니면 괴로울 텐데. 시 또한 어떤 에너지, 생명의 기운이라면. 마음이 좀 어수선해지더라. 어수선한 마음과 좋아하는 실비아 플라스 이야기가 덧대서 나온 시편이다. 생을 너무 시에다 걸면 최고의 시를 쓰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좀 균형감 있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쓴 시였다. (‘시가 제 생애 전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진심인가) 역설적이고 반어적일 수도 있다. 제 삶에 시가 없다면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복잡한 감정의 문제여서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다. 많이 울고 난 뒤에 쓴 시였다.”
―4년만의 여덟 번째 시집, 어떤 의미나 특징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지난 4년은 바닥을 친 시기였다. 남 보기에는 해외에서 큰상을 받고 책방도 해서 뭔가 화려하고 근사해 보이겠지만, 사실은 괴로웠던 시절이었다. 책방 문제도 있었고, 스승이 돌아가시고 허수경 시인도 작고했으며, 제 혈육도 떠나는 힘겨운 나날이었다. 이전의 시집들은 좀 보여주려거나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은 태도였다면, 이번 시집은 저와 이야기하려고 했던, 살아내려고 한 시집이다. 이전에는 현실을 토대로 뛰어오르는 느낌, 도망가는 느낌을 가지고 썼는데, 이번에는 암흑기를 랜턴을 비추며 걸어 나왔던 시간 같다. 물속 같은 힘겨운 시절이었지만, 시를 쓸 때만은 저만의 시간, 저만의 세계였다. 비유하자면, 해녀가 물속에서 일하고 밖으로 나오면서 푸, 하고 숨비소리라는 호흡을 하는데, 저에게 시 쓰는 행위는 숨비소리같은 것이었다.(반응은 어떤가) 제가 시집을 포함해 국내 단행본을 13권 냈는데, 보통 반응이 천천히 오는 편이더라. 이번 시집은 출간하고 열흘쯤 됐을 때 2쇄를 찍는다고 연락이 왔다. 어리둥절하고, 신기하고, 고맙다.”
어느 날, 소녀는 아빠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창고 비슷한 작은방에 갇혔다. 반성할 때까지 밥도 제공되지 않았다. 그런데 작은방에는 전에 보지 못한 ‘보물’들이 놓여 있었다. 주황색으로 된 50권짜리 어린이 세계문학전집과, 검정색의 성인용 50권짜리 세계문학전집. 금성사에 다니다가 창업을 한 아버지가 회사 친구로부터 의리로 구입한 책들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생 김이듬은 벌 받으러 간 작은방에서 책을 손에 들었다. 『소공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아라비안 나이트』 등등. 책의 세계는 너무 재미있었다. 마치 엘리스가 토끼 굴로 들어가듯, 그는 책을 찾아 읽기 위해서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독서가 이어지면서 성인용 세계문학전집도 찾아 읽었다. 야한 대목도 읽고선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그 뒤에 어떻게 되는데?” 같은 반 친구들이 눈을 반짝거리면서 교단 위에 서있던 그의 입을 응시하다가 물었다. 작은방에서 읽은 세계문학전집 속의 이야기를 교실에서 들려주고 있는 중이었다. 담임선생은 특활 시간만 되면 그에게 앞으로 나와서 이야기를 들려주라고 했다. 특활 시간이 마치는 종이 울리면, 그는 말했다. “그럼 다음 주에!” 아이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금방 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반에 이듬이가 쓴 시를 한 번 들어볼래?” 젊은 국어교사이자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은 다른 반의 수업에서도 그의 시를 낭송한 뒤 칭찬하곤 했다. “정말 잘 썼지 않니?” 담임선생은 그의 재능을 일찍 알아봐줬다. “너는 좋은 시인이 될 친구다. 이대로 성장하면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될 거야.”
“쟤다!” 쉬는 시간, 다른 반 친구들의 손가락이 교실 창문에 모아졌다. 손가락은 모두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담임선생으로부터 그의 시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말했다. “야 너 멋있어!” 연예인 사진을 코팅해 다니던 친구들과 달리, 그는 헤르만 헤세의 사진을 코딩해 다녔다.
담임선생의 권유로, 백일장에도 여러 차례 나갔다. 선생은 방과 후에는 짜장면이나 빵을 사줬고, 비가 오면 그에게 장화를 챙겨주기도 했다. 그는 담임선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릴 적 작은방에서 읽은 세계문학전집과, 중학 시절 담임선생의 칭찬이야말로 시인 김이듬의 문학적 원점이었다.
“네 시는 시가 아니야!” 문학회 합평 첫날, 선배들은 그가 써온 시를 부욱, 하고 찢으며 말했다. 대학을 독문학과로 진학한 뒤 시를 배우고 싶어서 교내 문학 동아리에 들어온 그였다. “너무 기교적이고, 너무 낭만적이고, 너 자신만 아는 시야. 한 마디로 쁘띠 부르조아적이야!”
선배들은 대신 박노해처럼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는 시를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시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대학 서클연합회 홍보부 차장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농활을 다녀와서 쓴 시가 교내 학보에 실린 게 위안이라면 위안. 시 자체를 배운 것이라기보다는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운, 혼란스런 시기였다.
1969년 진주에서 태어나서 부산에서 자란 김이듬은 2001년 『포에지』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이후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등의 시집을 펴냈다. 시와세계작품상, 김달진창원문학상, 22세기시인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프라이징! 큰일 났어요!” 미국 문학번역가협회가 주관하는 전미번역상 수상자 발표가 임박한 2020년 10월, 그는 시집 『히스테리아』를 번역 출간한 액션북스의 대표이자 시인인 요하네스 고란슨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아무래도 당신이 이번에 받을지도 모르겠어요.”
최종후보 3명 가운데 한 명으로 올라가 있던 그는 고란슨 대표로부터 수상자 발표 시각을 전해 받았고, 그 시각에 맞춰서 줌으로 접속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혹시 인터뷰가 바로 들어갈 수도 있으니 미리 준비해두라는 부탁도 함께.
설마 내가 되겠어? 당시 그는 수상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큰상에서 늘 들러리만 섰는데, 뭐. 발표 시각, 줌에 접속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 페이스북 메신저를 비롯해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쏟아져 들어왔다. 줌에 접속하니, 오 마이 갓! 2020년 전미번역상 수상자는 바로 그였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너무 놀라서. 믿을 수 없어서. 눈물을 쏟았다. 한국 작가의 첫 전미번역상 수상이었다. ‘전미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동시에 석권하면서 해외에서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부상한 순간이었다.
―2020년 ‘전미번역상’을 수상한 이후 사정이 좀 바뀌었는지.
“문체부장관이 축전과 꽃다발 보내준 것 외에는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다. 그럼에도 마치 습자지에 먹이 번지듯, 시인들이 먼저 알아주더라. 축하해요, 큰상 받으셨더라. 옛날부터 시 잘 쓰는 줄 알고 있었지만, 다시 축하해, 하고. 요즘에는 주변 동료나 선배, 후배들이 존중해 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해외에서 열리는 시축제 등에도 많이 초대 받았고.”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남들처럼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고, 문학 아카데미 같은 데에서도 공부하지 못했다. 맨땅의 헤딩이었다. 대학 시절 시를 배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떤 시나 문학 정신은 배운 것 같다. 불의를 보면 맞서야 한다, 자유의 억압에 대해선 항의해야 된다, 평등하지 못하거나 누구를 무시하면 존중해선 안된다 등등. 다른 시인들의 시를 보면 비단자락처럼 매끈하고 물살처럼 잘 흘러가지만, 제 시는 마대자루처럼 거친 느낌이 들거나 중간에 자갈이 있는 것처럼 툭툭 걸리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매뉴얼에 충실하지 않고, 좀 거칠 수도 있으며, 자유분방하고 틀에 박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전미번역상도 ‘의도적으로 과도하고 비이성적인 시들로 구성된 흥미롭고 놀라운 작품’이라고 평가하지 않았을까. 액션 페인팅을 했던 앤디 워홀이나 도끼로 피아노를 깬 존 케이지를 생각해 본다.”
―시 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무엇인가.
“내면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저의 경우, 시를 쓸 때는 우선 모티프를 잡는다. 한 단어나 문장, 장면 등으로. 모티프가 잡히면, 내시경을 하듯 모티브를 내면 속으로 확 집어넣는다. 여기에 살점처럼 감정이 붙게 되는데, 감정의 살점을 좀 제거하고 다시 시를 쓴다. 결국 모티브가 자신의 몸을 관통해야 되는 것 같다. 어떤 되새김일 수도 있고. 뾰족뾰족한 면돗날 같은 모티프든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모티프든, 계속 아프게 담고 껴안고 하면서 제가 변하는 것이다. 메시지와 이미지, 형상화도 중요하지만, 예술가의 내면이 없다면 그 예술을 사랑할 수 없다.”
―일상이나 글쓰기 루틴은 어떤지.
“저는 어떤 규칙이나 루틴이 없다. 원칙주의를 싫어하고, 원칙도 없다. 학교 다닐 때에도 지긋지긋하고 힘들었는데, 일상까지 그렇게 하긴 싫다. 일단 일이나 강연 등 밥벌이를 위한 시간 외에는, 거의 시를 쓰기 위해 워밍업을 하고 몰두한다고 볼 수 있다. 보통 다이어리를 보면서 시를 쓰기 위한 시간을 임의로 정한다. 짬짬이 한 번씩 쓰다가, 하루를 잡아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볍게 먹고, 책 읽고, 글을 쓴다. 그러면 너무 행복하다.(건강관리는) 짬짬이 집에서 혼자 요가를 한다. 요가강사 자격증도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 탄수화물을 섭취한 뒤 천천히 걸으며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현재 담양의 창작 공간 ‘글을낳는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시집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슬로베니아, 국제 시 페스티벌, OECD 수준, 책 안 읽는 시대, ‘책방 이듬’, 글쓰기와 취재⋯. 인터뷰 중간 어느 대목에선 기자가 신달자 시인 이야기를 하자, 그는 시편 「여장 남자 아더 씨」를 이야기했다. “책방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어지는 눈물범벅의 뻘밭 같은 세상 속 리얼 스토리. ‘책방 이듬’의 폐업과 실직, 운주사와 150만원, 자영업과 OECD. “어쩌면 좀 낮아졌고 생각의 밀도 역시 건강해지지 않았나, 하는 자기 위로를 좀 했거든요.”
세상은 앞으로도 여전하겠지만, 시인 김이듬 역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밤이 너무 깊거나 숨이 턱턱 막힐 땐 조용히 시의 영화관을 찾아갈 것이다. 종일 맨발로 ‘오토 릭샤’를 운전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릭샤왈라’와 함께. 의자 깊은 곳에 가벼워진 몸을 구겨 넣고 시의 영화를 찬찬히 볼 것이다. 매일 저녁 영화관에서 뻔한 영화에도 울고 웃으며 다시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는 릭샤왈라처럼. 어느 순간, 시의 영화관에서 릭샤 한 대가 갑자기 솟구치더니 세상 밖으로 질주를 시작한다. 긴 머리가 살짝 삐져나온 시의 릭샤는 한동안 한국과 인도 상공을 날다가 지구를 넘고 어느 새 우주로, 우주로⋯.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서상배 선임기자 및 김이듬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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