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전쟁·혼미한 미국…해 넘기는 ‘혼돈의 국제질서’
1 2차대전 도시 파괴 방불한 가자 폭격
세계인들은 유럽과 중동에서 진행되는 두개의 전쟁을 지켜보며 2023년을 마치게 됐다. 우크라이나에서 포연이 멈추지 않는 가운데 시작한 올해는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촉발된 가자지구 전쟁까지 겹쳐 더욱 잔혹한 한해가 됐다. 2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 사망자 수는 역대 양쪽 충돌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은 20세기 전쟁들 중에서도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 때의 무차별적 도시 파괴와 맞먹을 정도로 끔찍한 양상을 띠었다.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은 두 전쟁에 자국군을 투입하지는 않았지만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두 전쟁은 겉으로는 달라 보일지 모르나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점은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에서는 유럽 등의 동맹국들 지지를 받고 동참도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가자지구 문제에서는 국제적 여론을 거슬러 이스라엘에 무기를 대고 ‘인도주의적 휴전’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외교적 고립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세계인들이 이스라엘을 냉혹한 가해자로 인식하게 됐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정치적 대립과 내년 대선이 두 전쟁의 전개와 결말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주목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에 ‘퍼주기’라는 인식을 지닌 공화당은 내년 지원 예산 법률안을 가로막고 있다. 현재 배정된 예산으로는 올해 말이 마지막이라는 미국의 지원이 끊기면 우크라이나는 패전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의 주요 지지층이었던 젊은 세대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을 사실상 방관하는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의 혼미’가 이어지며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구호와 고립주의적 외교 노선을 결합시키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다. 이 경우 현재 진행 중인 두 전쟁의 흐름 역시 급변하면서 한반도를 포함한 국제질서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2 미-중 전략적 경쟁 속 소통 길 열기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은 더욱 달아올랐다. 양쪽은 서로를 외교·군사·경제적으로 견제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은 수출 통제, 투자 제한, 한국·일본 정상들과 함께한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 등 동맹 결속으로 중국에 대한 포위를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연초에 발생한 중국 기구의 미국 영공 침범 사건은 양국의 소통을 전면적으로 중단시킬 만큼 험악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서도 조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은 11월1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1년 만에 다시 만나 대화 의지도 보였다. 미·중 정상은 충돌 방지를 위한 군사 소통 채널 재개와 관계의 안정적 관리에 합의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갈등이 너무 커지는 것을 염려했고, 시 주석도 중국 경제 둔화라는 내부 사정 탓에 같은 입장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전략적 화해와는 거리가 먼 전술적 휴지기를 모색한 셈이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3 한·일 정상 셔틀외교 12년만에 부활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3월6일 한-일 관계 최대 현안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과 관련해 피고인 일본 기업이 아닌 한국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배상금을 대신 내는 이른바 ‘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일본의 ‘상응 조처’가 전제되지 않은 일방적 양보안이었다. 이를 계기로 한·일 정상이 수시로 상대국을 찾아 만나는 ‘셔틀 외교’가 12년 만에 부활하는 등 극한으로 치닫던 양국 관계가 완화됐다. 이는 8월18일 한·미·일 정상의 ‘캠프 데이비드 회의’로 이어졌다. 이 회의로 3국은 사실상의 ‘동맹’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일부 피해자들이 재단의 돈을 받지 않는 등 강한 반발을 이어가고 있고, 대법원은 지난 21일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이른바 ‘2차 소송’에서도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일방적 양보’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일본 정부는 강하게 반발하며 ‘성의 있는 호응 조치’에 전혀 응하지 않고 있다. 올해 8월엔 한국 국민의 80% 이상이 반대하는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바다 방류가 이뤄졌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4 챗GPT ‘전례없는 창조적 혁신’ 충격
전세계 정보통신(IT) 업계를 아우르는 연말 시상식이 있다면, 올해 신인상과 최우수상을 미국 오픈에이아이(OpenAI)사의 ‘챗지피티’(ChatGPT)가 동시에 쓸어 갔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과 대화하는 인공지능(AI)이라는 콘셉트의 챗지피티는 지난해 말 혜성같이 등장한 뒤 올해 말 그대로 ‘초특급 태풍’을 불렀다. 애초 학생 답안지 대리 작성 정도로 화제가 됐던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후 빠르게 의료·법률·행정 분야 등에 녹아들었다. 곧 사람 마음을 다루는 교육·정치·선거 같은 영역에도 적극 이용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인공지능이 보편화되며 사이버 범죄 증가, 딥페이크 악용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맞서 유럽연합(EU)·미국·한국·일본 등 주요국들이 인공지능이 몰고 올 위험성에 대응하기 위한 법 제도 마련에 나섰다. 새해에도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 더 깊숙이 파고들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인공지능이 2024년 주류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5 가자전쟁 사망 70%는 여성·아이·노인
올해 중동 정세는 크게 출렁였다. 극우세력과 연정을 맺고 지난해 말 역대 최악의 ‘극우정권’이라는 우려를 사며 집권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연초부터 팔레스타인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가자지구를 실질 통치하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10월7일 1200여명의 이스라엘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대규모 기습공격으로 이에 맞섰다. 전쟁의 또 다른 원인은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서 진행되던 국교 정상화 협상이었다. 하마스는 중동의 맹주인 사우디가 2020년 아랍에미리트(UAE)·바레인에 이어 이스라엘과 수교(아브라함 협정)하면 고립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결국 하마스의 공격으로 양쪽 사이 국교 정상화 협상은 중단됐다.
하마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가자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에서 벌어진 최악의 참사로 변했다. 80일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전쟁은 극도의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했다. 2만명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숨졌다. 이 가운데 70% 넘는 이들이 여성·어린이·노인 등 약자였다. 이란이 지원하는 예멘의 후티 반군은 팔레스타인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세계 주요 무역로인 홍해를 지나는 민간 선박을 공격하며 미국과 대립하고 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6 러시아가 점령지 굳히기 들어간 우크라이나 전쟁
지난 6월 초 시작된 우크라이나의 반격 공세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가운데 미국 등 서방에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비슷해진 우크라이나 원조에 대한 피로증이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무기 지원을 등에 업고 국토 남동부 4개 주에 길게 이어진 러시아 점령지의 가운데를 반으로 갈라 결정적인 승기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지뢰, 참호, 대전차 방어물 등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러시아의 끈질긴 대응에 막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0월20일 의회에 제출된 614억달러 규모의 우크라이나 지원안이 공화당의 국경 통제 강화를 연계한 반대로 막혀 있고, 유럽연합에서도 500억유로 지원안이 지난 14일 헝가리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다. 전황이 악화되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50만 추가 징병을 제안했다. 우크라이나가 무기와 병력 부족을 노출하기 시작하자, 일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가 공세로 전환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7 가장 뜨거운 여름, 미지근한 COP28 합의
전세계는 올해도 극심한 기후변화로 고통을 겪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지난 7월이 “지구 역사상 가장 더운 달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에 따르면, 북극 여름 기온(7∼9월 평균 6.4℃)도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를 지구가 “끓어오르는 시기가 됐다”는 말로 표현했다.
지구 온도 상승을 막기 위해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제28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가 열렸지만 산유국 등의 저항으로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 대신 ‘화석연료로부터의 전환’이란 애매한 합의에 그쳤다. 무시무시한 천재지변으로 고통받는 일도 많았다. 지난 2월 튀르키예에 규모 7.8의 지진이 발생해 4만여명이 숨진 데 이어 9월엔 모로코의 규모 6.8 지진으로 3천여명이 사망했다. 볼리비아엔 ‘더운 겨울’이 찾아와 남미대륙 최대 티티카카호수를 말라붙게 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8 프리고진 충성→반란→회군→추락사
러시아 용병집단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62)이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을 둘러싸고 러시아 군부와 갈등을 빚다가 6월23일 반란을 벌였다. 그는 이튿날인 24일까지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의 러시아 도시 로스토프나도누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800㎞가량을 진격하다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중재로 반란을 중단했다. 그는 지난해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자신들의 용병들을 최전선에 투입했으며, 동부 돈바스 바흐무트 점령 작전을 둘러싸고 러시아 군부와 갈등을 빚었다.
반란 중단 뒤 바그너그룹 용병 수천명은 벨라루스로 이동했으나 프리고진의 행방은 정확히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8월23일 바그너그룹의 전용기를 타고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던 중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러시아의 일부 매체들은 이 비행기가 미사일을 맞아 추락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프리고진의 사망 배후에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가 있다고 전했지만 러시아는 ‘펄프 픽션’(싸구려 소설)이라고 일축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
9 코로나19 종식…깨어나지 못한 중국경제
중국 당국은 후베이성 우한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한 직후인 2020년 1월 시작한 ‘제로 코로나’ 정책을 지난해 말 끝내고 올해부터 본격 경제 활동을 재개했다. 지난해 10월 시진핑 국가주석이 중국 공산당의 오랜 관례를 깨고 중국 최고지도자직 ‘3연임’을 확정한 직후였다.
제로 코로나 정책이 끝나면 중국 경제가 급속히 활력을 회복할 것이란 ‘리오프닝 효과’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 경제는 외형상 올해 목표했던 5%대 성장을 달성할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경제 상황은 매우 좋지 않다. 3년간 강력한 봉쇄정책을 편 결과,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한다는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었고, 소득이 줄어든 소비자들이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으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대를 기록하고 있다. ‘개방’보다 ‘사회통제’를 우선시하는 중국 정부의 행태를 확인한 외국인들은 중국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이고 있다. 시 주석의 3연임을 위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코로나 봉쇄 정책의 후폭풍이 중국과 세계 경제를 여전히 휘감고 있다.
베이징/최현준 특파원 haojune@hani.co.kr
10 핀란드 나토 가입…러시아와 새 갈등
2023년 4월4일 벨기에 브뤼셀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본부 광장에 핀란드 국기가 내걸렸다. 나토 설립 74돌이던 이날 북유럽의 오랜 중립국이던 핀란드가 나토의 31번째 정식 회원국이 됐다. 러시아와 1340㎞ 국경을 맞댄 핀란드는 그동안 나토와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 노선’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뒤 실질적 안보 위협을 느낀 핀란드는 세달이 채 지나지 않은 5월18일 이웃 스웨덴과 함께 나토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집단안전보장’(한 회원국에 대한 무력 공격을 나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공동 대응)을 약속한 나토에 가입하는 것만이 국가의 안보를 지킬 유일한 방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입 절차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핀란드가 지난 18일 미군이 자국 내 15개 기지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안보협정을 맺으며 러시아와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는 모습이다. 핀란드와 함께 나토 가입 의사를 밝힌 스웨덴은 튀르키예·헝가리의 반대로 연내 가입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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