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장관의 비애
대주주 양도세와 공매도 금지
정권 따르는 게 관료 숙명이지만
정책 바꿀 땐 담당자도 교체해야
정부가 반대해온 공매도 금지나 대주주 양도세 기준 완화 같은 정책이 정치권의 요구로 잇따라 시행되는 것을 보면서 “역시 공무원은 영혼이 없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양도세를 물어야 하는 대주주 기준을 10억원에서 50억원으로 올린 조치는 발표 9일 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던 추경호 부총리 발언을 뒤집은 것이다. 심지어 공매도 금지는 발표 이틀 전까지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가 부인했었다. 정부가 스스로 정책 신뢰성을 갉아먹은 셈이다.
하지만 정책 변경의 책임을 공무원에게만 덮어 씌우는 것은 과한 측면이 있다. 공무원의 숙명이 원래 두뇌에 해당하는 정권의 주문을 받아 정책을 집행하는 수족(手足) 역할이기 때문이다. “관료에겐 영혼이 없어야 한다”는 명언의 원조인 막스 베버도 소신 없이 정권에 따라 부화뇌동하는 공무원들을 비판하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민주적 선거로 정권을 잡았지만 행정 경험은 없는 정치인들이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각 분야 전문성을 갖춘 행정관료 조직이 뒤를 받쳐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이념에 치우친 소득주도성장이나 탈원전 같은 정책이 실행될 수 있었던 것도 역설적이지만 일머리가 있는 공무원들 덕분이었다. 만일 공무원이 자기 신념과 다르다고 해서 선출 권력의 정책을 거부한다면 국정 운영은 파행을 겪을 수밖에 없다. 대신 공무원은 정책이 잘못되더라도 법과 규정을 위반하지 않았다면 책임은 지지 않는다. 정책에 대한 책임은 선거를 통해 정치인들이 진다.
하지만 영혼 없는 공무원은 말처럼 쉽지 않다. 공무원이 기계가 아니라 감정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30년 넘는 공직 생활을 거쳐 장관으로 퇴직한 한 전직 관료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정책을 맡다 보면 본인 생각을 정책에 일치시키게 된다”며 “내 생각과 다른 정책을 맡게 되면 괴로워서 견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의 능률도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신과 행동이 따로 놀아서 발생하는 심리적인 괴로움(인지부조화)을 피하려는 성향은 인간 본성에 가깝다. 이런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핵심 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을 바꿔주는 것이 관행화돼 왔다.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외치던 관료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분배 우선으로 돌아서는 것은 자기 부정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번처럼 정권은 그대로인데 정책이 바뀌는 경우다. 문재인 정부 때 홍남기 부총리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증권거래세 인하와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등 선거에서 표를 얻으려는 여당의 선심성 정책에 반대했지만, 번번이 밀렸다. 결과적으로 그가 얻은 것은 ‘홍두사미(홍남기+용두사미)’나 ‘홍백기(홍남기+백기 투항)’같은 불명예스러운 별명이었다.
관가에서는 “그나마 대주주 양도세 기준 번복이 공매도 금지보다는 낫다”는 얘기가 나온다. 번복을 결정한 주체가 부총리 후임인 최상목 후보자이기 때문에 최소한 추 부총리가 말을 바꿨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반면 공매도 결정을 뒤집은 김주현 금융위원장에 대해서는 “사표를 내고 장관직을 걸고 맞섰어야 했다. 홍남기 전 부총리와 다를 게 뭐냐”는 지적이 나온다. 김 위원장이 이번 개각에서 제외되면서 졸지에 ‘한 입 갖고 두말하는 장관’이 돼버린 셈이다.
장관의 불명예는 해당 부처 공무원들의 사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정부 부처를 떠나 민간으로 옮긴 엘리트 공무원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는 “장관 돼봐야 좋은 게 뭐 있나. 정치인들 시다바리(보조 역할)만 하지”였다. 공무원들의 명예를 경시하는 정치권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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