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155] 여행자수표
기독교 세계는 638년 예루살렘을 이슬람 제국에 빼앗겼다가 1099년 십자군 전쟁 때 되찾았다. 그 뒤 그곳에 왕국을 세웠다. 물론 진짜 왕국은 아니었다. 이슬람 세계 한복판에서 가까스로 버티는, 자치 지역에 가까웠다. 오늘날 이스라엘 안의 가자지구와 비교하자면 주객이 반대였다. 그곳을 향해 유럽인들의 성지순례가 끊이지 않았다.
성지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전사들’이라는 조직이 탄생했다. 예루살렘 템플 산에 본부가 있어서 ‘템플기사단’으로 불리던 그 조직은, 이름과 달리 가난하지 않았다. 순례길을 따라 수백 개 영업소를 운영하는, 유럽 최대 다국적 기업이었다. 순례자에게 숙박을 제공하면서 은행업까지 했다. 여행객들이 현지 화폐와 교환해서 쓸 수 있는 예금 증명서를 발행했다. 여행자수표다.
예루살렘은 1187년 다시 이슬람 세계로 넘어갔다. 하지만 템플기사단의 위세와 조직은 위축되지 않았다. 기사단의 빚 독촉에 시달리던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왕권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결국 1312년 기사단을 강제 해산했다. 그때 여행자수표도 명맥이 끊겼다.
그런데 400년 뒤 ‘런던 신용 교환사’라는 회사가 여행자수표를 부활시켰다. 1869년 영국의 토머스 쿡은 수표 용지와 액면을 표준화시켜서 화폐처럼 만들었다. 분실하면 재발급도 했다. 그러자 여행자수표가 해외여행의 필수품이 되었다. 1882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사가 그 사업을 전 세계로 확대했다.
하지만 끝이 있었다. 컴퓨터를 이용한 신용카드에 무릎을 꿇었다. 근대 여행자수표는 1772년 초 ‘런던 신용 교환사’를 통해 등장했다가 2020년 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사의 사업 포기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여행자수표라는 말조차 아득하다. 이 칼럼도 마찬가지다. 3년 전 중국 은화로 시작해서 오늘 여행자수표로 끝날 때까지 과분한 사랑을 누려오다가 이제 기억 너머로 사라진다.
※ ‘차현진의 돈과 세상’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과 차현진 이사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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