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 동의맺고 하라”는 일본 新앱… 왜? [방구석 도쿄통신]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
일본 내면 풍경, 살림, 2014
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며 따뜻한 시간을 보낼 연말입니다. 사랑만 가득해도 과하지 않을 이 시즌에, 일본에서 다소 엉뚱한 웹서비스가 출범해 화제입니다.
‘성 동의 서비스’라고 들어보셨나요? 연인 등이 양측 동의하에 성관계를 맺었음을 기록하는 모바일 서비스가 이달 14일 일본에서 출범했습니다. 서비스 이름은 ‘키로쿠(キロク)’. 한국어로 ‘기록’이란 뜻입니다.
사용법은 간단합니다. 웹사이트에 접속, 이메일로 회원가입하고 상대방과 성관계를 갖는 데 문제가 없다는 등 문항 10개에 동의하면 첫 단계는 완료입니다. 문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상대방이 폭력을 휘두르거나 말로 위협하진 않았습니까?”
“신체·지적·발달·정신장애가 있어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상태는 아닙니까?”
“다량의 술을 마셨거나 약을 복용해 판단력에 영향이 생기지는 않았습니까?”
“수면 부족과 피로 등으로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몽롱한 의식 상태는 아닌가요?”
“지금 성적 행위를 맺을지에 대해 여유를 갖고 고민했습니까?”
“예상 밖의 상황에 닥쳐 극도로 불안하거나 동요한 상태는 아닙니까?”
“지금까지 상대방으로부터 학대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상대방이 누군가를 학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거나 보고 난 직후는 아닌가요?”
“상대와의 관계 때문에 성관계를 거절하면 자신이나 주위에 미칠 악영향에 대한 불안은 없습니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잘못 알고 있진 않나요?”
“지금 당신이 동의하려는 행위를 이해하고 있고, 정말 그 행위를 하고 싶습니까?”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읽었다간 따뜻한 분위기도 얼어붙을 것 같은 이 문항들을 전부 체크하고나면,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할 수 있는 QR코드가 주어집니다. 해당 QR코드를 상대방이 마찬가지로 키로쿠를 틀어 자신의 휴대전화에 인식하면, ‘쌍방 동의 완료’. 마음 놓고 성관계를 맺어도 됩니다.(?)
이처럼 다소 엉뚱한 서비스가 등장한 배경에는 지난 7월 신설된 ‘부동의 성교죄(형법 177조)’가 있습니다.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억지로 맺은 자에게 5년 이상 징역형을 내릴 수 있다는 법인데요.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폭행·협박’과 ‘알코올·약물 섭취’, ‘공포·놀람’, ‘학대’, ‘지위 이용’ 등 8개 항목으로 세분화하고 기존보다 처벌을 강화했습니다. 항목을 읽고 나니 위 문항들의 의도가 조금씩 읽히시죠?
개발사는 ‘부동의 성관계’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양측 사전 동의가 필수고, 이를 간단한 설문과 QR코드 인식만으로 기록할 수 있는 서비스를 내놓았다고 설명합니다. 개발사 관계자는 18일 간사이TV 등 인터뷰에서 “(키로쿠는) 커플들의 건전한 관계를 위한 서비스”라며 “가능한 한 분위기를 깨지 않고, 또 확실한 형태로 (동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다들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고 했죠. 또 “개발 과정에 엄격한 변호사 감수를 거쳤기 때문에 (앱 기록이) 법적인 ‘성적 동의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당초 키로쿠는 해당 법이 시행되고 한 달 이후였던 지난 8월 공개될 예정이었지만, “성폭행 가해자가 강제로 동의 버튼을 누르게 할 수 있다”는 등 비판이 쏟아져 이달까지 연기됐습니다. 해당 지적에 대해선 성관계에 동의한 날로부터 이틀 안에는 철회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죠. 이 밖에도 동의한 장소와 일시까지 기록되는 시스템 탓에 “과거 성관계 기록이 유출될 위험이 있다”는 우려에는 보안 기능을 앱 내부가 아닌 외부 전문 업체에 맡겨 운용하는 등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키로쿠의 개발 감수를 맡았다는 한 변호사는 지난달 산케이신문 인터뷰에서 “키로쿠를 통한 동의서는 추후 재판에서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며 “이 서비스를 계기로 젊은 세대 사이에 ‘성적 행위는 서로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지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불동의 성관계로부터 양측 모두를 보호할 수 있다” “동의서를 위해 종이에 이름을 적고 날인하는 절차보다 분위기도 덜 망치고 간편하다”는 등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죠.
반면 과거 기록 유출 우려는 해결책이 보안 강화에 그쳐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데다, 성관계를 맺을 때마다 동의서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어색한 사람이 많아 실효성엔 의문이 남는 상황입니다. 강제에 의한 동의를 방지하려 이틀간 번복할 수 있게 기능을 고쳤지만, 되려 이 기능이 무고(誣告) 사건을 유발하거나 상대에게 금전을 요구하는 등 악용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있죠.
일본 여론조사 업체 빅로브가 최근 20~50대 성인들을 설문조사한 결과, “성관계를 맺을 때 반드시 상대 동의를 구한다”는 응답은 절반이었고 “가끔 받는다”가 14.8%, “받은 적 없다”가 9.7%였습니다. 국제협력 NGO(비정부기구) 조이세프의 지난 8월 조사에서는 15~29세 일본인 5800명 중 90% 이상이 “성관계엔 양측 동의가 필수”라는 데 공감하면서도, 전체의 42%가 “성관계 동의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불미스러운 성폭력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쌍방 동의를 구하는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12월 27일 열여덟 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연말 일본 사회에 논란을 일으킨 ‘키로쿠’ 애플리케이션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구독자 여러분, 2023년 한해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 주에는 새해 첫 레터로 찾아뵙게 되겠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16~17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마법소녀’는 어떻게 20억원을 등쳐먹었나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3/12/13/WCDGWCHT3RDV5CZQJRPH64IU2M/
예술 좇아 한국 온 日청년, 이제는 ‘맛집 전도사’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3/12/20/EC557CMRLFHB7M3YZ4XVWP3Z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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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주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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