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희의동행] 숫눈의 통증

2023. 12. 26.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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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은 눈이 푸지고, 또 푸지다.

기왕 오려거든 함박눈이면 좋을 것을 눈은 쌀가루처럼 입자도 작고 푸슬푸슬하기만 하다.

그 숫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쩔 수 없이 명치끝에 알싸한 통증이 일었다.

홀로 그 눈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이제까지 내가 본 사람의 뒷모습 가운데 가장 쓸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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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은 눈이 푸지고, 또 푸지다. 기왕 오려거든 함박눈이면 좋을 것을 눈은 쌀가루처럼 입자도 작고 푸슬푸슬하기만 하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그 쌀가루 같은 눈은 사부작사부작 내렸다. 하도 추워, 바깥의 냉기가 집안으로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꽁꽁 문을 닫고 커튼까지 쳐둔 탓에 눈이 내리는 줄도 몰랐다. 잠깐 밖이 궁금해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세상에나. 언제 이렇게 내렸을까. 소리 없이 내린 눈에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놀이터는 물론이고 인도와 화단에도 눈이 소복하게 덮여서는 경계가 사라져 있었다. 계속되는 한파경보 탓인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눈만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 숫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쩔 수 없이 명치끝에 알싸한 통증이 일었다. 그 숫눈이 미늘처럼 오래전 기억을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어느 겨울의 새벽, 미명으로 사위가 푸르스름할 때, 식구들은 곤한 새벽잠을 자고 있었다. 연탄을 갈고 연탄구멍을 막는 것을 잊어버린 탓에 방안은 절절 끓고 있었다. 그때 철커덩,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귀잠에서 나를 끌어냈다. 아버지가 나가는 소리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나는 그때 아버지가 조금 전까지 주무시던 방으로 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그렇게 내다본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밤새 내린 눈으로 세상은 하얀 설국으로 변해 있었고, 한 노인이 그 숫눈 위를 절름절름 걸어가고 있었다. 모자라도 썼으면 좋았을 것을. 눈은 은발의 머리카락 위로 속절없이 내려앉았다. 늙은 아버지였다. 뜨거운 물 한 잔 달라 하지도 못하고 빈속으로 그 눈 오는 새벽길을 절름절름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울컥, 목울대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라왔다. 홀로 그 눈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이제까지 내가 본 사람의 뒷모습 가운데 가장 쓸쓸한 것이었다. 증등학교 교감으로 정년퇴직을 한 아버지는 그날, 시 경계 밖에 있는 시골학교로 출근하느라 이른 새벽 집을 나선 것이었다.

아버지의 삶을 자양분 삼아 우리 가족은 배부르게 먹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어리석게도, 그때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아버지이므로. 아버지에게는 부양의 책임이 있으므로. 뇌졸중으로 한쪽이 마비되면서 화가로서의 꿈도 접어야만 했던 한 사람의 좌절과 절망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 역시 꿈이 있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번번이 길을 잃고 나를 놓치기도 하는데 아버지도 마찬가지셨을 것이다. 매일 아침 그렇듯 새벽에 집을 나서야만 했던 그 삶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눈이 내리면, 숫눈 진 세상을 보면 언제나 명치끝이 아프다. 이 통증은 내 숨이 다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또 눈이 내린다.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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