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못 올리게 하니 눈 가리고 아웅…‘꼼수와의 전쟁’은 계속된다

노도현 기자 2023. 12. 26.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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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도 ‘불황형 소비 트렌드’ 전망…핵심은 정확한 가격 정보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1월14일 서울 이마트 용산점에서 주요 먹거리 가격 동향을 점검하며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기재부 제공

‘가격’ 때문에 말 많고 탈 많은 한 해였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사회 전체가 작은 가격 변화에 민감했다. 가공식품을 중심으로 정부와 기업 간 가격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올해 내내 이어졌다. 가격 대비 괜찮은 품질을 갖췄다는 의미의 ‘가성비’는 유통업계의 핵심 키워드였다.

내년 하반기에나 본격적으로 경기 회복이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새해에도 가격을 둘러싼 소비자 민감도는 높고, 저렴한 제품을 선호하는 ‘불황형 소비’ 트렌드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라면) 기업들이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

지난 6월18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던진 한마디의 힘은 강력했다. 이미 정부는 연초부터 식품업체, 외식업체 등 업계 관계자들을 줄줄이 만나며 가격 인상 자제를 압박하던 터였다. 주요 타깃은 소비자들의 생활과 가장 맞닿아 있는 가공식품이었다.

기업들에도 속사정은 있었다. 밀값 하락과 수입가격의 시차가 있는 데다 물류비, 인건비, 부자재값 등 다른 비용이 죄다 올랐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결국 백기를 들었다. 농심이 7월1일 신라면 출고가를 4.5% 내린 이후 라면업체들이 줄줄이 가격 인하를 선언했다. 라면 가격 인하는 2010년 이후 13년 만이었다. 이후 제과제빵업계도 동참했다. 제품 가격을 올리려던 기업들이 계획을 철회하는 일도 빈번했다.

정부는 지난 11월 물가 체감도가 높은 빵, 우유, 스낵과자, 커피, 라면, 아이스크림, 설탕, 식용유, 밀가루 등 9개 품목을 관리하는 전담 공무원을 지정했다. 과도한 시장 개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왔다.

‘서민의 술’ 소주의 공장 출고가 상승으로 식당 소주값이 들썩이려는 조짐이 보이자 정부는 세금 인하 효과가 있는 ‘기준판매비율’을 도입해 소주 출고가 인하를 유도했다. 그 효과를 차치하더라도 소주에 대한 기준판매비율 도입은 현재 물가가 얼마나 민감한 이슈인지 보여줬다.

■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
가격은 그대로 두고 제품 크기나 수량을 줄여 가격 인상 효과를 보는 현상

■ 스킴플레이션(Skimpflation)
물가 인상 와중에 상품과 서비스의 양과 질이 눈에 띄지 않게 떨어지는 현상

■ 번들플레이션(Bundleflation)
묶음 상품이 낱개 상품보다 더 비싼 현상
정부의 가격 인상 자제 ‘압박’에
제품 개수 줄이고 중량 슬쩍 낮춘
슈링크플레이션 등 시장 화두로

■ 가격 못 올리니 ‘슈링크플레이션’

기업들은 언뜻 눈에 잘 띄지 않는 방법으로 살길을 모색했다. 5개들이 핫도그 한 봉지에 핫도그 한 개가 빠졌다. 오렌지주스 과즙 햠량이 80%에서 45%로 낮아졌다. 조미김, 참치 통조림, 캔맥주, 초코바, 만두 등의 용량이 스리슬쩍 줄었다.

이처럼 물가안정 기조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기업들이 가격을 올리는 대신 알게 모르게 중량을 줄이거나 품질을 낮추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런 ‘슈링크플레이션’은 하반기를 휩쓴 화두 중 하나였다.

지난 11월 정부는 슈링크플레이션을 정직한 판매 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실태조사에 돌입했다. 대국민 제보까지 받았다. 한국소비자원 조사 결과 최근 1년간 9개 품목 37개 상품 용량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더 이상 ‘꼼수’는 쓰기 어렵게 됐다. 정부는 제품 용량 변경 등에 대한 정보 공개를 의무화하는 슈링크플레이션 방지책을 내년 1분기 중 마무리할 방침이다. 지난 20일 소비자원은 주요 유통업체와 상품 용량 정보 제공 및 표시 확대를 위한 자율 협약을 맺었다.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컬리, 쿠팡 등 쟁쟁한 업체들이 참여했다. 1월 중 제조업체와도 협약 체결에 나선다.

소비자단체들은 가격 인상 국면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소비자들이 얻는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라고 지적한다. 기업들이 제반 비용 상승으로 제품 가격을 올릴 순 있지만, 소비자로선 합당한지 판단하기 어려우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홍연금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물가감시센터 본부장은 지난 21일 ‘가공식품 가격 인상과 물가안정 토론회’에서 “원재료비가 제품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은데 왜 그것만 놓고 ‘원재료비 내렸으니 제품 가격 내려라’ 소리를 하냐는 말을 항상 듣는다”며 “기업들은 원재료비가 올라서 가격을 올렸다고 할 뿐 정보가 없다. 우리도 다른 정보를 가지고 소비자가가 왜 이렇게 올랐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반값 마케팅 열 올리는 유통업체
소비자단체 “정보 제한적” 불만
최저가보다 ‘최적가’ 설정이 중요

■ 새해에도 가격은 민감해

유통업계는 올해 ‘반값’처럼 저렴한 가격을 강조하는 마케팅에 열을 올렸다. 대형마트와 편의점에선 가격을 낮춘 자체브랜드(PB) 상품들이 잘 팔렸다.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등 중국발 초저가 상품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고물가가 있다.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세계 경제 침체가 내년 하반기부터 풀릴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만큼 최소한 하반기까지는 불황형 소비 트렌드가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 연구위원은 “다만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소비자들이 실제로 느끼는 건 또 다른 문제”라고 짚었다. 그는 “소비자들이 경제 회복을 체감하지 못한다면 지금과 같은 트렌드는 앞으로도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소비의 양극화가 지속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기업 입장에선 싸게 파느냐, 비싸게 파느냐보다 타깃 고객을 누구로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내년 소비 트렌드 중 하나로 ‘버라이어티 가격 전략’을 제시했다. 같은 제품이라도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고정 가격이 아닌 다양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선택하는 옵션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수 있다. 불황 속에서 가격을 무작정 올리기 어려운 기업들에는 이 같은 전략이 불확실한 경제 상황을 버티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저가’뿐만 아니라 소비자가 납득할 수 있는 ‘최적가’를 설정하는 게 중요하게 됐다.

홍연금 본부장은 “버라이어티 가격 전략을 펼 때 가격이 적정한지를 소비자가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주지 않으면 계속 문제제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결국 필요한 건 정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올해 (정부의 자제 요청에) 가격 인상을 철회한 곳들이 많기 때문에 새해 가격 인상이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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