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기 같던 시간 살아내려 안간힘 … 내 자신과 이야기 그대로 담아냈죠
팬데믹 때 이국서 마주한 삶 진실 그려
4년 만에 시 68편 모아서 신작 출간
해외서 만난 경험·사유·사람 담겨 있어
한국 사회 관한 인식·분석도 날카로워
2020년 전미·루시엔 스트릭 번역상
동시 석권… 해외서 韓 대표시인 부상
“남 보기엔 화려·근사해 보이겠지만
지난 4년 바닥 치며 괴로웠던 시절”
“양성 나왔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이가 긴 줄이 그어진 진단 키트를 그의 눈앞에 대고 흔들면서 사무적으로 말했다. 머릿속이 천천히 하얗게 변해 갔고, 모든 것은 배경으로 사라졌다. 대법원 결정 같은 판단 앞에 한 나약한 인간이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코드를 뽑지 않았던 냉장고, 익산시가 주최하는 작가 투어. 익산 미륵사지도 보고 싶었는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끊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가 어디 있는지도,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절대적 고독. 세상에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그는 독일에서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호텔의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노트북을 치기 시작했다. 시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시를 쓰고 또 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시 ‘너는 여기에 없었다’였다.
‘전미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떠오른 김이듬이 팬데믹 기간 경험하고 사유한 세상과 실존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문학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일까. ‘문제적이고 불온한 작가’ 김 시인을 지난 21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시집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해외에서 만난 다양한 경험이나 사유. 세계적이고, 글로벌하다. 해외에서 만난, 자신만의 색깔을 내는 수많은 사람이 담겨 있다. 시편 ‘도로시아’ 역시 가난하고 늙었지만 자신의 향기를 잃지 않는 노인들이….
“이 그림이 팔리면 맥주를 살게 우리는 루트비히성당 앞 광장에서 그림을 팔았다 광장에는 돌로 만든 탁구대가 있었고 탁구를 치려는 주민들로 붐볐다 플라타너스 열매가 떨어졌다 밤에는 탁구대에 빵과 커피, 싸구려 와인을 놓고 저녁을 먹었다/…끝이 좌절이기도 하다면 사랑이 완벽한 결합으로 완성된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사람들은 울부짖을 때 위선을 드러낸다/ 하지만 나의 지루한 경험이 말한다 모든 평범한 인간들도 위대한 순간이 있었다”(‘도로시아’ 부문)
―‘모든 평범한 인간들도 위대한 순간이 있었다’는 엘리엇의 문장으로 끝맺는 시인데, 세상의 모든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2022년 여름 독일 국제 시 축제 당시 일정이 비면 여행을 가거나 사람을 만나곤 했다. 그때 베를린자유대에서 만난 지인의 초대로 도로시아의 한 로컬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이때 탁구대가 있는 성당 앞 광장이 보였는데, 거리의 악사와 그림을 파는 사람 등이 탁구를 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일정이 빈 날 다시 찾아갔다. 함께 그림을 파는 등 이들과 하루를 온전히 보냈다. 탁구대 위에 싸구려 와인 한 병을 올려놓고 이야기도 하고. 그때 독일에서 일기처럼 쓴 미발표 작품이다.”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과 분석 역시 날이 서 있다. ‘적도 될 수 없는 사이’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갈등 혐오 구조가 얼마나 가까운 이웃과 친구, 가족 속으로 파고들고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묘파한 시편이다.
“친구와 함께 본 영화는 ‘다음 소희’였다. 지난 2월 저녁, 친구와 함께 홍대 CGV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밥을 먹으면서 영화에 나온 콜센터 직원 이야기나 청소년 문제 등을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사회, 경제, 정치 문제로 확대됐다. 취향이 비슷하고 좀 안다고 생각해 정치 이야기까지 하게 됐지만, 정치적 입장은 너무나 달랐다. 대립적인 정치적 견해가 너무 무섭다는 것을 배웠다.”
―4년 만의 여덟 번째 시집, 어떤 의미나 특징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지난 4년은 바닥을 친 시기였다. 남 보기에는 해외에서 큰 상을 받고 책방도 해서 뭔가 화려하고 근사해 보이겠지만, 사실은 괴로웠던 시절이었다. 이전의 시집들은 좀 보여 주려거나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은 태도였다면, 이번 시집은 저와 이야기하려고 했던, 살아내려고 한 시집이다. 암흑기를 랜턴을 비추며 걸어 나왔던 시간 같다.”
1969년 진주에서 태어나서 부산에서 자란 김이듬은 2001년 ‘포에지’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이후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등의 시집을 펴냈다. 시와세계작품상, 김달진창원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특히 2020년 ‘히스테리아’ 영역판으로 전미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동시에 거머쥐면서 해외에서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부상했다.
―전미번역상을 수상한 이후 사정이 좀 바뀌었는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축전과 꽃다발 보내 준 것 외에는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다. 그럼에도 마치 습자지에 먹이 번지듯, 시인들이 먼저 알아주더라. 축하해요, 큰 상 받으셨더라, 하고. 요즘에는 주변 동료나 선배, 후배들이 존중해 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해외에서 열리는 시 축제 등에도 많이 초대 받았고.”
세상은 앞으로도 여전하겠지만, 시인 김이듬 역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밤이 너무 깊거나 숨이 턱턱 막힐 땐 조용히 시의 영화관을 찾아갈 것이다. 종일 맨발로 ‘오토 릭샤’를 운전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릭샤왈라’와 함께. 의자 깊은 곳에 가벼워진 몸을 구겨 넣고 시의 영화를 찬찬히 볼 것이다. 매일 저녁 영화관에서 뻔한 영화에도 울고 웃으며 다시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는 릭샤왈라처럼. 어느 순간, 시의 영화관에서 릭샤 한 대가 갑자기 솟구치더니 세상 밖으로 질주를 시작한다. 긴 머리가 삐져나온 시의 릭샤는 한동안 한국과 인도 상공을 날다가 지구를 넘고 어느새 우주로, 우주로….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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