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층 화재, 5층 생존, 10층 사망…아파트공화국 ‘대피헌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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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여니까 이미 연기가 자욱했어요. 남편이랑 아이 데리고 우선 1층으로 가려고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려는데 연기 때문에 질식할 수도 있겠다 싶어 집으로 다시 돌아갔어요.”
성탄절 새벽 화재가 발생한 서울 도봉구 아파트의 같은 동 5층 주민 송아무개(54)씨는 우왕좌왕했던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다행히 송씨네 가족은 젖은 물수건으로 입을 막고 불길이 아직 닿지 않은 베란다 쪽으로 나가서 소방 구조를 기다려 인명사고를 피했다. 구조대는 송씨네 가족을 찾아 방독면을 건넸고, 이후 구조될 때까지 집 안에 대기했다. 반면 10층에 살던 주민은 가족을 대피시키다가 연기를 마셔 숨졌고, 4층에 살던 남성은 아이를 안고 뛰어내렸다가 끝내 숨지고 말았다.
국민 2명 중 1명은 아파트에 살고, 매해 아파트에서 발생하는 화재만 2600여건(2021년 기준)에 이른다. 아파트 화재 상황에 맞는 대피 원칙을 숙지하고, 개별 아파트별 화재 대응 매뉴얼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방청이 지난달 개정한 ‘아파트 화재 발생 시 대피요령’ 지침은 “무조건 대피하지는 말라”로 요약된다. ‘불이 나면 무조건 대피해야 한다’는 기존의 지침이 인명사고를 더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을 반영했다. 화재로 발생하는 유독가스의 전파 속도는 사람 이동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피하는 과정에서 연기 흡입, 질식 등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실제 소방청 통계를 보면, 최근 3년간(2019~2021년)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 8360건에서 1040명(사망 98명, 부상 942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 중 3년간 39.6%(사망 29명, 부상 383명)는 피난 도중 발생했다.
대피 여부에 대한 판단은 ‘불길과 연기’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 우선 자기 집 현관문에서 열기가 느껴지면 복도·계단 등에 연기나 불길이 퍼졌다고 봐야 한다. 이런 경우 현관문을 열지 말고 집 안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
아파트 현관문은 건축법상 방화문이다. 1시간 동안 화재로부터 견딜 수 있다. 대신 연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틈과 창문을 젖은 옷가지 등으로 막아야 한다.
집 안에서는 베란다 등 집 내부와 단절되고, 외부와 연결된 공간으로 대피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이번 화재처럼 베란다를 통해 불길이 번진 경우엔 욕실로 이동하는 게 안전하다. 욕실엔 물이 있다. 물은 불과 연기를 막아준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현관에서 가장 먼 곳으로 대피하라고 전문가들은 권한다. 화재 시 복도는 불길과 연기의 이동경로이고, 현관문은 불길과 연기를 집 안으로 들이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구조대는 늦어도 10분 안에 온다는 점도 명심하고 당황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소방차가 신고부터 현장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을 뜻하는 ‘소방차 골든타임’은 현재 7분이다. 지난 10월 이성만 무소속 의원실이 소방청으로부터 받은 ‘소방력 현황’ 자료를 보면 서울은 소방차 출동에서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이 4분59초에 불과했다. 가장 출동거리가 긴 경북의 경우 소요시간이 9분13초로 소방차 골든타임을 초과했지만 10분 이내에 도착했다. 충북이 8분45초, 전남 8분40초, 강원 8분20초 등이 뒤를 이었다.
연기가 많이 확산되지 않아 대피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화재 지점을 고려해야 한다. 자기 집보다 아래층에서 불이 났다면 개방된 옥상으로, 윗집에 불이 났다면 지상층으로 이동해 건물 밖으로 이동하라고 소방당국은 권고한다. 2017년 이후 30가구 이상 공동주택의 옥상 출입문은 화재 시 자동으로 열리는 자동개폐장치 설치가 의무화되어 있다.
대피 시엔 자세를 최대한 낮추고, 젖은 수건 등으로 입과 코를 가려 연기 흡입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 집에 미리 비치해둔 방독면이 있다면 연기 흡입 우려 없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조성계 소방청 화재예방총괄과 계장은 “시민들이 화재 상황을 판단해야 하고, 보통 불이나 연기가 발생하는 위치의 반대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대원칙’만큼 중요한 게 각자 거주 중인 아파트의 상태를 평소에 파악해두는 것이다. 소방당국과 전문가는 집집마다 아파트 환경에 맞는 대피계획을 짜고 소방·피난시설 사용법을 숙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채진 목원대 소방안전학부 교수는 “상황에 따른 대피요령 및 체험에 기반한 소방안전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경황 없는 상황에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안내방송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훈련이 돼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번 화재에서도 아파트 주민들은 “대피하라”는 방송도 불길이 잡힐 때쯤 뒤늦게 들은 경우가 있었다고 전했다. 또 아파트 내 화재경보음도 크게 들리지 않아 불이 난 사실을 파악하는 데 어려웠다고 한다. 화재 난 동의 2층 주민 ㄱ(54)씨는 “안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사이렌 소리도 안 들렸다. 안내방송이 나오긴 했지만,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전문가는 외부 화재 감지기 외에 ‘단독 경보형 감지기’를 설치하면 집안에서도 경보음을 듣고 대피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권장했다.
한편, 경찰은 발화 지점인 아파트 3층 집의 작은방에서 담배꽁초와 라이터를 발견해, 실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 중이다. 이날 소방과 1차 합동감식을 마친 경찰은 “전기 기구의 오작동이나 누전 등 전기적 요인이나 방화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밝혔다.
곽진산 기자 kjs@hani.co.kr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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