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대 떠난 접경지 상권 붕괴 가속… “열흘 넘게 한 푼 못 벌어” [심층기획]

배상철 2023. 12. 2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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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부대 이전·해체에 지역소멸 위기
2022년 7800명 규모 화천 27사단 해체 등
국방개혁 2.0 따라 사단 통폐합 후폭풍
인근 상권 직격탄… 음식점 등 줄줄이 폐업
일자리 잃은 주민들은 타지역 이주 고려
강원도내 미활용 군용지 230만㎡ 달해
민관군 협력 활용방안 적극 모색해야

“열흘이 넘도록 한 푼도 못 벌었습니다.”

지난 23일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생필품 판매점을 운영하는 강복득(82) 할머니는 매출을 기록한 노트를 펼쳐 보이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노트에는 ‘12월 13일 3000원’이라는 글이 마지막이었다. 바로 윗줄에는 ‘12일 2000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일주일 남은 연말까지 추가 판매가 없으면 12월 총 매출액은 1만8000원이 된다. 강 할머니는 “56년째 이곳에서 장사하고 있는데 올해가 최악”이라며 “군부대 통폐합으로 군인들이 빠져나가면서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사람이 전혀 없다. 밥값조차 벌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강복득(82) 할머니가 운영하는 생필품 판매점 매출을 기록한 노트. 금고도 텅 비어 있다.
이날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황금연휴 첫날이었음에도 마을에 군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24시간 영업’ 간판을 내건 PC방도, 음식점도 모두 문을 닫았다. 버스터미널 옆 ‘장병 휴게실’은 간판만 남고 휴게공간은 사라진 상태였다. 강 할머니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서면 버스터미널은 휴가를 나가려는 군인과 면회 온 가족들로 북적였다”며 “특히 오늘처럼 빨간 날을 낀 주말에는 군인들로 바글바글했다. 이제는 모두 옛날이야기가 됐다”고 했다.

화천군 상서면 상권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2019년부터다. 정부가 군부대 통폐합을 포함한 국방개혁 2.0 정책을 본격 추진한 시기다. 이 개혁안에 따라 상서면에 주둔하던 7사단과 15사단 일부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부대 규모가 크게 줄었다. 군부대 의존율이 높았던 상서면 상권은 직격탄을 맞았다. 음식점과 PC방 등 20여 곳이 줄줄이 폐업했다. 남은 10여 곳도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벼랑 끝에서 하루를 버티고 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건 군인을 상대로 한 군인용품점이다. 시댁에서 하던 군인용품점을 이어받아 60년 넘게 장사하고 있다는 신종숙(69)씨는 “군부대 규모가 줄어든 이후 매출이 80% 이상 줄었다. 개점휴업 상태라고 보면 된다”며“주변 상인들 모두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편도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며 “군인들이 빠져나간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마을에 남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7800명 규모 부대 해체, 지역소멸 도미노

이기자 부대로 유명한 27사단이 67년간 주둔하던 지역인 화천군 사내면도 상황은 비슷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문을 닫았고, 자물쇠를 채운 문 앞에는 임대를 구한다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마저도 오래됐는지 빛바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국적인 인기를 끄는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와 편의점 역시 인구 감소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폐업했다. 사내면 유일한 배달대행 업체 대표인 손석범(54)씨는 “7800명 규모인 이기자 부대가 지난해 11월 해체된 이후 1년 새 음식점 등 10여 곳이 문을 닫았다”며 “가게를 내놓은 집도 7~8곳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일대가 23일 황금연휴를 앞둔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인적이 드물어 썰렁하다.
치킨 프랜차이즈 매장을 함께하는 손씨의 걱정은 더 크다. 그는 “친구가 인근에서 중국집을 한다. 1년 전에는 한 달에 1000건 넘게 배달했다. 지금은 200건 수준으로 줄었다. 저희 치킨집도 상황은 마찬가지”라며 “치킨, 피자, 짜장면이 팔리지 않는 상권은 죽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 닫고 떠나고 싶지만 배달대행마저 사라지면 남은 자영업자들은 매출이 더 떨어지게 될 것”이라며 “조금 더 버텨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상인들은 병사들이 외박을 나갈 때 지역에 제한을 두는 이른바 ‘위수지역’ 폐지도 상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한 자영업자는 “과거에도 점프(외박 때 위수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가는 은어) 뛰는 군인들이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내면에서 머물렀다”며 “지금은 외박이나 외출 나온 모든 병사들이 춘천 등 외지로 간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이어 “접경지라는 이유로 그간 많은 부분에서 희생했다”며 “이제는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상권 붕괴는 자영업자는 물론 지역주민 이탈까지 부추겨 지역소멸을 가속화하고 있다. 화천 면사무소가 운영하는 한 카페는 유동인구 감소를 이유로 무인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게 된 주민은 이주를 고민하고 있다. 군인 가족과 지역 주민을 위해 군부대가 운행하던 통학버스가 부대 철수와 함께 중단되기도 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한순간에 자녀들 통학수단이 사라진 셈이다.
지역 소멸은 군부대가 있던 지역별 인구 수 추이로 확인된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 현황에 따르면 화천군 전체 인구는 2018년 2만5000명에서 2023년 6월 2만3000명으로 7.6% 줄었다. 특히 이 기간 사내면은 12.5%(1100명), 상서면은 11.2%(500명) 감소해 각각 5800명, 3700명까지 줄었다.
◆미활용 군용지 개발 등 대책마련 시급

상권을 살리고 지역 소멸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접경지역 주민들은 군부대가 떠나 빈 부지를 활용하는 방안이 우선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규모 관광지로 조성하는 등 개발을 통해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을 공간으로 재탄생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해복(64) 화천사내면상가번영회장은 “군부대 통폐합을 시작하기 전에 대책부터 마련했어야 한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 강원도 내 미활용 군용지는 230만㎡다. 축구장 327개 면적이다. 지금까지 미활용 군용지 활용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근 횡성군은 국방부가 소유하고 있던 유휴지 3만1000㎡를 매입했다. 횡성군은 이곳을 인근 산업단지와 연계한 지역거점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화천군과 철원군 등 접경지역 다른 지자체 역시 미활용 군용지 활용 방법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있다.
쉽지만은 않다. 국방부가 군사기밀을 이유로 정확한 위치와 면적 등을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자체가 미활용 군용지를 매입하려면 구체적인 도시개발 계획을 제출해야 하는데 정보가 없다 보니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임종선 강원도 접경지역과 발전정책팀장은 “부대 통폐합 규모부터 시작해 군 유휴지까지 군과 관련된 많은 정보가 군사기밀이라 자치단체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파악한다고 해도 활용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접경지 경제 활성화를 위해선 미활용 군용지 활용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이나영 강원대학교 DMZ HELP센터 연구교수는 “군부대가 떠난 미활용 군용지는 규제지역으로 묶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지역공동체가 참여하는 민관군 협력체계를 만들어 군 유휴지 활용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그러려면 각 지역 내 자원과 역량을 바탕으로 특성에 맞는 사업을 추진하고 이를 뒷받침할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재규 화천군의원 “접경지 이대로 방치 안돼  고도제한 등 규제 완화  특성화 산업 육성 절실”

“접경지가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조재규(사진) 강원도 화천군의원은 26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지역에서 만나는 상인들마다 매출이 크게 줄었다고 하소연한다. 문 닫은 점포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사람들은 하나둘 인근 도시로 떠나고 있다. 접경지역을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조 의원은 접경지 주민들은 군부대 해체와 이전이 결정된 이후 계속해서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목소리를 내 왔다면서, 이제는 정치권과 지자체가 응답해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군사시설로 인한 고도제한 등 각종 규제를 해제하는 것은 물론 지역자원 상품화를 통한 특성화 산업 육성이 절실하다”며 “특히 미활용 군용지를 활용하면 경제 활성화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을 통한 인구 유입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화천군은 27사단이 주둔했던 사내면 군용지 일부를 국방부로부터 빌려 농공단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며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조 의원은 교육 인프라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접경지 특성상 초·중·고등학교 학생 대다수가 군인 자녀들이다. 그런데 단기간에 군인들이 빠져나가면서 학생이 많이 줄었다”며 “강원도교육청에서는 학교 통폐합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일단 학교가 문 닫으면 그 지역으로 인구 유입은 중단된다고 봐야 한다.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조 의원은 “경기 침체와 인구 유출은 화천만의 문제가 아니다. 철원, 양구, 인제, 고성 등 모든 접경지역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일”이라면서 “화천이 소멸되면 인근 접경지도 사라진다. 공동 대응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천=글·사진 배상철 기자 b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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