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조 교수, 조 박사 그리고 조노마
조형근 | 사회학자
“조 교수, 잘 생각해 봐요.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오. 집에 돈도 없다며. 딱 2년만 뛰어봅시다. 그다음엔 실컷 공부하면 돼요.”
뜻밖의 제안 앞에서 나는 생맥주만 들이켰다. 입이 탔다. 말하자면 나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중이었다.
1994년 초여름 무렵이었다. 학기 초 시작한 논술학원 알바가 두어달 지나고 있었다. 논술반 대표 선생님이 술 한잔 하자더니 전업 강사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꽤 좋은 조건이었다. “조 교수는 성공할 거요.” 짧고 굵게 벌어 박사 딸 때까지 걱정 없이 공부하라는 제안이었다. 당장 예, 하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놀라 바로 사양했다. 시작하면 못 돌아올 것 같았다. 방학 때만 하는 알바로 몇년 귀한 호구지책을 삼았다. 밤새 강의안을 준비하고 유머를 고민하던 열의는 미구에 시들해졌다. 학생들 호응도 시들해졌는지 더는 제안이 없었다. 나는 전업 강사로 살아남을 만한 사람이 못 됐다.
제안의 내용 말고 놀란 게 하나 더 있었다. ‘조 교수’라는 호칭이었다. 석사과정 알바생을 그는 교수라고 불렀다. 아득히 높은 호칭이 낮은 데로 임했다. 알고 보니 그 업계의 관행이었다. 상대를 존중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교수가 대수냐는, 학계에 대한 업계의 시선도 깔렸던 것 같다.
한국어는 상대와의 관계에 따라 말을 높이고 낮추는 존비법이 유독 복잡하게 발달한 언어다. 하도 어려워서 모국어 화자조차 틀리기 쉽다. 인간관계를 주로 수직 상하관계로 이해해온 관습 탓일 게다. 상대를 부르는 호칭과 제삼자를 가리키는 지칭에도 복잡한 존비법 관습이 배어 있다.
상대를 2인칭 대명사나 이름으로 부르면 간단하지만 그게 어렵다. 우선 한국어에는 두루 쓸 수 있는 2인칭 대명사가 없다. ‘너’는 매우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면 상대를 아주 낮추어 부를 때 쓰인다. 예사낮춤 말 ‘자네’도 쓸 수 있는 상대가 제한적이다. ‘당신’은 부부나 연인 사이에서나 쓰일 법하고, 그 외에는 “당신 뭐요?”처럼 시비 거는 느낌을 준다.
이름도 친밀한 관계에서만 부를 수 있다. 친밀하지 않은 사이에서는 이름 뒤에 ‘씨’나 ‘님’을 붙여 부르면 될 것 같지만, 자칫 결례될 수도 있다. 특히 사회적 위신이 높다고 여기는 이들이 문제다. 꼭 직업명으로 불러줘야 한다. 예를 들어 ‘의원님’이 그렇다. 한번 국회의원은 평생 의원이라 ‘전 의원’도 실례다. 교수 그만둔 지 꽤 지난 나도 곧잘 교수로 불린다. 기업의 세계에서는 직위가 호칭, 지칭이 된다. 고객 응대에 쓰이는 ‘사장님’, ‘사모님’ 같은 인플레이션 호칭도 있고, 고객이 쓰는 ‘저기요’, ‘이모님’ 같은 말도 있다.
의미상 같은 말도 대화 참가자의 높낮이와 상황에 따라 섬세하게 구별해야 하니 더 어렵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조 교수’나 ‘김 과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최소한 직위가 같거나 더 높은 인물이다. 학생이나 조교가 조 교수, 하고 부르면 큰일 난다. ‘조 교수님’ 하고 부르면 될까? 안 된다. 성을 떼고 ‘교수님’ 하고 불러야 한다. 다중의 대화 상황에서 부르거나 가리킬 때는 반대다. ‘조형근 교수님’이라고 온전히 칭하는 게 ‘아랫사람’의 예의다. 이 상황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면 당신은 대학 나온 한국어 원어민일 확률이 높다. 언어는 이렇게 차별적인 경험을 반영하고 재생산한다.
사실 나는 조 교수라는 말이 어색하다. 내가 있던 학계의 관습에서는 교수 대신 선생이 익숙했다. 여기에 높낮이에 따라 님을 붙이고 뗀다. 다만 대학의 전임교수만 선생이고, 나머지는 ―박사학위가 있다는 전제 아래― 박사로 불린다. 전임 임용이 되는 순간 박사는 선생으로 신분 상승을 한다. 이 신분 차별에 저항감을 느끼는 비전임 박사들은 서로 선생이라고 부른다. 전임교수 중에도 비전임에게 선생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비전임 생활을 오래 한 이들이 그런 경향이 있다. 동병상련일 것이다.
호칭의 높낮이가 불변은 아니다. 박사가 드물던 시절에는 ‘이승만 박사’처럼 박사가 최고 존칭이었다. 박사는 흔하고 정규직 교수 되기가 너무 힘든 지금은 선생이 박사보다 훨씬 높아졌다. 이 높낮이가 변하면서 사정이 우스워지기도 한다. 결혼한 여성을 높여 부르는 ‘여사’가 그렇다. 대통령의 여성 배우자를 그 노릇 말고 딱히 다른 정체성이 없다는 전제 아래 여사로 불렀다. 성차별적 호칭이라고 여겨 한겨레는 창간 때부터 여사 대신 씨로 불렀다. 지난 정권 때 어디 감히 여사님을 씨라고 부르느냐는 지지자들의 분노 탓에 여사가 됐다. 덕분에 용산의 그 사람도 지금 여사로 불린다.
말로 차별하는 질긴 관행에 평등한 호칭, 평등한 말쓰기로 맞서려는 실천들이 있다. ‘예의 있는 반말’이라는 책에는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평어’라는 새로운 언어체계를 디자인해서 사용하고 있는 사례들이 담겼다. 이를테면 “형근아, 부탁해”가 아니라 “형근, 부탁해” 같은 식이다. 기업의 사례도 있다. 민음사 한국문학팀은 직위 대신 서로 이름을 부르며 평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기업도 하는데 다른 곳은 왜 못 할까?
말이 불평등을 강화하는 세상에서 평등한 말쓰기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시도는 귀중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말을 바꾼다고 해서 불평등한 관계가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대학원 시절 의대 수업을 두 학기 들었는데, 교수가 학생을 선생이라고 불러서 놀랐다. 의사 국시를 통과했으니 모두 선생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평등한 관계일 리는 없다. 시간강사가 비정규 교수로 불린다고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많은 여사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다. ‘아줌마’보다는 나을 것도 같지만, 중요한 건 처우를 개선하는 일이다.
마을공동체에서는 별명을 쓰는 경우가 많다. ‘누구 엄마’ 따위보다 예의도 있고 친근해지는 방법 같다. 우리 동에도 그렇다. 내 동네 이름은 노마다. 왜 노마인지 물으면 “요놈아, 조놈아 할 때 조노마”라고 대답하곤 한다. 세대 차이도 있다. 십대, 이십대는 그냥 노마 하고 부른다. 우리 세대는 노마님이라고 부르곤 한다. 습관 바꾸기가 어렵다. 나도 그렇다. 그래도 박사, 교수, 선생 등으로 불리던 시절에 비하면 마음이 한결 편하다. 이름도, 관계도 같이 바뀌면 좋겠다. 조금씩,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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