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의 실패 속 1번의 성공…유방암환자들의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과분한 찬사”
[인터뷰] 임석아 서울대병원 암연구소 교수(혈액종양내과)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숨겨진 숫자’ 또는 ‘숨겨진 인물’ 등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하지만 2016년 개봉한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는 ‘숨겨진 영웅들’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차용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외면해왔던 숨겨진 영웅들의 삶을 엿봤다.
병원을 방문하면 병원만의 공기가 있다. 치과에 들어서면 맡게 되는 독특한 냄새처럼 특유의 분위기가 사람을 감싼다. 조용한 발걸음 속에 분주한 움직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단 한 차례의 소음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공간의 특성일 것이다.
과거 기자는 의료행위에 공식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정답이 없는 것이 의료였다. 1+1=2의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의료. 더욱이 의료기술의 발달로 질병의 원인인자가 계속 밝혀지고 있으며 새로운 치료제가 탄생하고 있다. 한 가지 치료제가 탄생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숨겨진 영웅이 개인의 삶을 포기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행히 이들의 업적을 가리기 위한 상이 있다. 바로 ‘분쉬의학상’이다.
분쉬의학상은 고종의 시의였던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박사가 우리나라 의료환경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을 때 독일의 발전된 의학을 국내에 전해준 업적을 기리고자 제정한 상이다. 분쉬의학상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상 중 하나다.
“과거에는 미국, 유럽 등 서구권을 위주로 진행돼 국내 의과학자가 진입하는 데 장벽이 있었지만 최근 10여년 사이 국내 의과학의 수준이 인정받았다. 모두의 노력 덕분이다.”
나긋나긋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을 뿐 그속에 담긴 내용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투명하게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니 그 기백에 부끄러움과 감탄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수많은 진료와 연구를 위해 삶의 일부를 포기했지만 환자를 위해 끊임없이 달리는 제33회 분쉬의학상 본상 수상자 임석아 서울대병원 암연구소 교수(혈액종양내과)를 만났다.
- 제33회 분쉬의학상 본상 수상자 선정을 축하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진료와 연구에 헌신하는 의학자들이 많은 가운데 본상을 수상하게 돼 감사하고 신기하다. 후보자가 직접 공모하는 여러 의학상들과 다르게 분쉬의학상 본상은 대학과 학회에서 후보자를 추천한다. 본교 학장님께서 각 연구의 영향력, 국제협업, 독창성 등을 평가하는 ‘서울 팩터’를 기준으로 상위 연구자 몇 명을 추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본교에서 ‘기혼 여성’으로 본상을 받은 연구자는 없었던 것 같다. 진료와 연구를 병행하며 늦게까지 일하고 주말근무도 이어왔다. 여러 면에서 가정의 양보를 받아온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다. 분쉬의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지난 고생들을 인정받은 느낌을 받았다. 이는 국내 수많은 의과학자와 동료들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여러 연구를 진행해 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연구는.
첫 번째는 호르몬수용체 양성 유방암에서 세포주기조절 표적치료제인 ‘CDK4/6억제제’에 대한 연구다. 폐경 후 여성에서 아로마타제 억제제에 CDK4/6억제제(팔보시클립)를 추가했을 때의 효과를 확인하는 제약사 주도 임상에 운영위원회로 참여했다.
두 번째는 호르몬수용체 양성인 폐경 전 전이성유방암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다. 20년 만에 폐경 전 전이성유방암환자만을 대상으로 이뤄진 임상연구라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1차치료제로 난소기능억제제와 아로마타아제 억제제에 CDK4/6억제제(리보시클립)를 추가, 치료효과를 평가하는 임상연구였다. 일반적으로 무진행생존기간(PFS)만을 1차 평가변수로 고려하는 기존의 임상연구들과 달리 20년 만에 처음으로 유방암환자들의 전체생존기간(OS)의 연장을 연구한 첫 임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다.
- 폐경 전후 여성호르몬치료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임상 참여 전부터 폐경 전후 여성에서의 호르몬치료제 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난소기능억제제가 등장하기 전 국내 폐경 전 유방암환자들은 난소절제 후 치료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젊은 환자들에게 큰 신체적 부담과 정서적 충격을 준다. 또 과거 전이성유방암환자에서 난소절제술은 보험급여가 적용되지 않았다. 급여가 적용되기까지 학회와 의료진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난소절제술을 받은 한 환자가 급여적용에 대한 민원을 제기했고 직접 소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4개의 학회(대한종양내과학회, 대한암학회, 한국유방암학회, 대한항암요법연구회)에서 난소절제술의 급여 적용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면서 2016년도에 급여가 적용되기도 했다. 이 모든 성과 역시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원내에서 유방암 진료를 보는 의료진, 항암요법연구회 유방암 분과 회원들, 세계 각국의 여러 의과학자의 큰 기여 덕분에 이뤄낼 수 있었다.
- 해외 학자들과 협업한 만큼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시차는 글로벌 임상시험 중 힘든 점 중 하나다. 미국, 유럽 등 해외 학자들과 협업하기 위해 오후 11시에서 오전 1시경 늦은 밤에 회의를 진행했다. 연구기간 동안 바빴지만 환자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감사하고 즐겁게 연구를 진행했다. 실제로 진료하고 있는 유방암환자들도 임상 연구에 참여했고 현재까지 임상 약제를 사용해 치료받고 있다. 7년째 암 진행이 없는 환자들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낀다.
- 최근 진행 중인 연구가 있는지.
항체-약물접합체(이하 ADC)의 항암효과와 DNA 손상 억제의 연관성을 위암 및 유방암분야에서 실험하고 있다. 또 HER2 음성 환자들에게 효과가 있는 TROP2 ADC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 유방암분야에서 이루고자 하는 최종 목표는.
최종 목표는 국내 유방암환자들의 행복한 삶이다. 모든 암환자들이 걱정하지 않고 삶을 즐기며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를 바란다. 이 목표를 직접 이룰 수는 없더라도 한 단계씩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또 대한항암요법연구회 유방암 분과의 세계적인 활동에 힘입어 우리나라에 국제적 가이드라인과 부합하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으면 한다. 무엇보다 실험실 연구와 임상연구를 접목할 수 있는 의과학자들이 많이 배출됐으면 한다.
‘종양내과’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학교에서 배우는 실험, 생물학, 유전학 등이 환자에게 실질적으로 적용되고 도움을 주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학문 분야이다. 굉장히 재미있고 환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줄 수 있다. 재미있는 과학이 의학으로 이어져 환자에게 제공된다는 것을 빠르게 체감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최선의 노력이 최고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임상시험에서는 성공보다 실패가 더 잦다. 따라서 임상시험이 실패해도 원인을 찾고 개선점을 도출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다. 지금의 실패가 다음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 진료와 연구의 병행, 가정과 개인의 삶 등 균형을 잡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나 역시 연구자이자 의사로서 가정을 이루기 어려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유방암 및 갑상선수술을 하는 외과의사인 남편을 만났다. 서로의 일에 대해서도 잘 이해해줬다. 병원에서 근무하다 보면 귀가하지 못하는 날이 많은데 가족과 주위 분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육아는 돌보미 분의 도움을 받았다. 아이들이 “엄마가 오늘은 퇴근하면 좋겠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엄마가 바쁘다는 점에 대해 불평했지만 크고 난 후 엄마가 롤모델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니 너무 고마웠다. 힘은 들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짧게라도 가족들과 긍정적인 대화를 나누며 함께하는 생활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자리를 빌어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헬스경향 이원국 기자 21guk@k-healt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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