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조정 과정서 은행 입지 좁아져···고의연체 등 악용 우려도
◆ 당국, 거부 사유 명시화
올 채무조정 신청 17년만에 최대
채무자보호법 맞물려 시행 방침
특례조정지원제도도 연장 운영
취약차주 운신폭 되레 줄어들어
소액대출 등 급전창구 막힐수도
금융 당국과 신용회복위원회가 추진하는 채무 조정 동의율 제고 방안은 채권금융회사가 조정 여부를 결정할 때 따라야 할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게 핵심이다. 채권금융사가 뚜렷한 이유 없이 채무 조정을 거부하는 일을 최소화하려는 취지다. 소비자가 금융사에 직접 채무 조정을 요청할 수 있도록 신설된 ‘개인채무자보호법’과 맞물려 시행될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금융권에서는 채무 조정 과정에서 채권자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져 되레 취약차주에 대한 대출 문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채무 조정 동의율 제고 방안 등을 담은 개편안은 채권자의 권고 사항을 명시하고 조정 심의 기능을 강화하는 투트랙으로 구성된다. 우선 신복위는 신용회복지원협약에 금융사가 조정안을 거부할 수 있는 사유를 구체화할 계획이다. 신복위 내에서는 ‘금융사 자체 채무 조정이 더 효율적인 경우’ ‘채무자 상환 능력을 확인해야 할 경우’ 등으로 한정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현재는 채권자가 어떤 경우에 조정을 거부할 수 있는지 명시돼 있지 않은데 은행이 불분명한 이유로 조정 절차를 밟지 않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개편안의 다른 한 축은 공적 협의체인 채무조정심의위원회의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심의위는 채권자가 채무 조정을 거부했을 때 거절 사유가 적정한지 검토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사유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금융사에 동의를 재차 권고한다.
신복위가 이처럼 채무 조정 절차를 손보려는 것은 빚 부담을 호소하는 차주가 갈수록 늘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신복위에 따르면 올해 들어 11월까지 채무 조정을 신청한 인원은 17만 1000명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12만 5000명)과 견줘 36.5% 늘어났으며 2006년 이후 17년 만의 최대 규모다.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는 데다 경기 둔화 흐름도 이어지고 있는 만큼 채무 조정 수요는 갈수록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제도 개편 움직임을 바라보는 금융권의 시각은 엇갈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빚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은행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점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이달 국회에서 채무자의 권리를 강화한 개인채무자보호법이 통과돼 은행들의 부담이 커진 상황인데 채무 조정 개편안까지 시행되면 은행들이 빚을 떼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지적이다. 또 일부 채무자가 고의로 연체를 한 뒤 조정을 요구하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적정 수준으로 채무가 조정되면 은행의 회수율을 더 높일 수 있다”면서도 “채무 조정 전에 한도까지 대출을 끌어다 쓴 뒤 탕감을 요구하는 식으로 악용될 소지도 있다”고 했다. 오히려 취약차주에 대한 대출 문턱이 높아지는 부작용 역시 우려된다. 저축은행에서 개인 여신 업무를 담당하는 한 인사는 “차주가 무턱대고 채무를 줄여달라고 요청하는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은행들이 대출을 적극적으로 취급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취약차주가 주로 찾는 2금융권이나 대부 업체에서 소액 대출을 찾는 고객을 꺼리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반면 현재도 채무 조정 동의 절차가 비교적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는 만큼 은행권에 큰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 또한 있다. 제도 개편 논의에 참여한 인사는 “현재도 채무 조정 신청이 들어온 건 중 대부분은 최종적으로 조정이 확정되고 있다”면서 “제도가 개편되더라도 채권금융회사에 동의를 강권하는 게 아니라 권유하는 것인 만큼 은행 부담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신복위는 연체 기간에 따라 채무 조정 규모를 달리하는 현행 지원 제도 역시 개편하기로 했다. 현행 조정 제도는 연체 기간이 길수록 채무 감면 폭이 크게 설계돼 있다. 문제는 상환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차주의 경우 연체 기간이 길어질수록 회생 가능성이 되레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신복위는 취약 계층을 비롯한 일부 차주에 한해 연체 기간 조건이 맞지 않더라도 지원 수준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올해 한시로 도입한 특례조정지원제도 또한 연장 운영할 것으로 알려졌다. 신용점수가 하위 20%인 채무자를 대상으로 이자율의 최대 50%를 인하하는 신용특례제도는 내년에도 지속할 예정이다. 취약 계층의 원금을 감면해주는 사전채무조정특례 역시 연장 운영된다. 신복위는 채무 조정을 거쳐 빚을 성실히 갚는 차주에게 지원하는 긴급 자금도 지속해 공급할 계획이다. 신복위는 내년에 1020억 원 규모의 소액 금융을 지원할 예정이다.
김우보 기자 ubo@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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