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보여도 “자존감 회복 차차차, 분명 느껴질 자이브”
눈을 감고 춤을 춰본 사람은 안다. 영화 <여인의 향기> 속 한 장면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파트너와 춤추는 게 실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안대를 낀 채 뛰어오르거나 몸을 흔들면, 이내 균형감각을 잃고 비틀거린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여도 거울을 보고 확인할 길이 없다. 무엇보다 ‘어디 부딪히진 않을까’ 두려워 스스로 위축된다.
“(감독님한테) 제일 많이 듣는 말은 ‘고개를 들라’는 거예요.(웃음) 앞이 깜깜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동작도 소극적으로 되거든요.”
2023년 12월12일, 서울 영등포구 댄스스포츠 연습실 ‘댄스박스’에서 이동현(31) 댄스스포츠 선수를 만났다. 고등학생 때 중증 시각장애 진단을 받은 그는 전국장애인체육대회 라틴댄스 자이브 종목에서 여러 차례 금메달을 받았다. 낮에는 직장, 퇴근 뒤엔 연습실을 다니며 얻은 성과였다. 2015년 ‘아는 형’의 권유로 시작한 댄스스포츠 경기 출전이 어느새 9년째. 무엇이 힘든 일과 끝에 그를 집이 아닌 연습실로 이끈 걸까. 이날의 만남에는 이동현 선수의 비장애인 파트너 안지현(30) 프로 라틴댄스 선수, 이들을 지도하는 임채성(40) 충남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 감독(전 국가대표 라틴댄스 선수)도 함께했다.
어둠 속에서 파트너와 춤추는 방법
같은 시각장애라 할지라도 장애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 선수는 중증 시각장애인이지만 흐리게나마 빛을 감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경기에선 형평성을 위해 빛을 완전히 차단하는 안대를 착용하고 춤춘다.
“2015년부터 댄스스포츠 대회를 준비했는데, 처음 안대를 끼고 연습한 날이 기억나요. 완전히 깜깜한 어둠 속에서 춤추는데, 적어도 넘어지거나 중심을 잃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춤추진 않는 거예요. 재능이라기보단… 신기했어요. 안대를 껴도 ‘나름대로 할 수 있겠다’ 싶었죠.”
대학을 졸업한 뒤 ‘어둠 속의 대화’란 전시회에서 3년여간 일한 게 도움이 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관객이 100분간 이동도 하고 음식도 먹는 등 여러 체험을 하는 ‘참여형 전시’인데, 이러한 움직임을 ‘로드마스터’가 조율한다. 어둠 속에서 모든 게 서툴 수밖에 없는 관객을 어둠에 익숙한 시각장애인이 돕는 것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는 점, 누군가와 호흡을 맞춰야 하는 점이 시각장애인 댄스스포츠 경기와 닮았다. 그렇다 해도 볼 수 없는데 세밀한 손동작은 어떻게 맞출까? 멀리 떨어져야 했던 파트너와 어떻게 다시 만나 손을 맞잡고 춤추는 걸까?
“제가 혼자만의 동작을 취하고 나서 다시 파트너와 만날 때쯤 파트너가 저를 잡아줘요. 또 다른 사람과 좀 부딪칠 거 같은 상황이면 더 손을 꽉 쥐는 식으로 ‘그만 가, 조금 가’ 이런 신호를 줘요.”
임채성 감독은 이동현 선수의 설명을 듣다가 “그게 바로 파트너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했다. “파트너는 서로 의존하는 관계예요. 제 생각엔 댄스스포츠가 거의 유일하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파트너가 돼 동등한 선상에서 동등한 평가를 받는 스포츠 종목인 거 같아요. 예를 들면 장애인 달리기 종목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해도, 앞에 선 비장애인이 가이드 역할을 하잖아요. 이건 가이드가 아니라 파트너예요. 두 사람의 합이 무너지면 성적이 달라지는 거예요.”(임채성 감독)
동작을 맞출 땐 상호 동의하에 직접 만져서 세밀한 모양을 파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꽃 모양 손동작을 해야 할 때, 감독이 선수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만져 자세를 빚듯이 지도한다.
“제가 손 모양을 예시로 들면, 동현 선수가 손을 만져서 그 모양을 따라 하세요. 접촉이 조금 많지만 어느 운동이든 이건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동현 선수한테도 이 점을 충분히 이야기했고, 동현 선수도 동의해서 그런 방식으로 연습해요.”(안지현 선수)
고교 2학년, 당혹스러웠던 시각장애 판정
어릴 땐 그냥 자신이 저시력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칠판 글씨를 보기 어려웠지만, 얼굴을 가까이 대면 교과서 글씨는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됐을 때 뭔가 이상했다. 시력이 자꾸만 떨어졌다. 고등학교 2학년, 안과에서 시각장애 진단을 받았다.
“막연하게 ‘나중에 크면 라식수술 해야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안과에서 진단하길 계속 시력이 떨어지는 망막질환이 있고, 시각장애라는 거예요. 회복하리라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많이 당혹스러웠죠.”
특수학교 경험이 없고 주변 친구 중에 장애인이 없었기에 편견과 괴리감은 더 컸다. 시각장애 진단을 받고는 공부를 놓아버렸다. 이 선수는 “현실을 부정하는 입장도 있었던 거 같다”고 했다.
“괴리감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나는 여기 속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도 했던 거 같아요. 시각장애를 최대한 감추려 했죠. ‘웬만하면 감춰서 도움을 안 받고, 아예 도움받을 상황도 만들지 말자.’ 그 생각이 바뀐 건 대학생 때였어요. 대학을 점자 관련 학과로 가면서 시각장애가 있는 친구들이 생겼고 장애 이해도도 높아졌어요. 어느 순간부턴 ‘이럴 게 아니라 깔끔하게 도움을 요구하고 내 상황을 알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쉬운 건 없었다. 취업도 만만치 않았다. 시각장애인 대부분은 안마 일을 택했다. 시험 준비 환경이 갖춰진 경우에만 공무원·교사 임용시험 등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이 선수도 처음엔 공공기관·사기업 취업을 생각했지만 결국 ‘이 시력으로 문서를 보는 건 어렵다’는 결론을 냈다. 고객센터의 전화 상담 업무를 시작했다.
“컴퓨터를 할 땐 그래도 컴퓨터에 화면을 엄청나게 많이 키우는 접근성 기능이 있어, 저도 조금은 볼 수가 있어요. 물론 다른 사람보다 훨씬 느리지만요. 그런 점에서 전화 업무가 잘 맞았어요. 전화 업무는 인쇄물을 볼 일이 많이 없고, 또 상대방이 제가 시각장애인인지 모른 채 안내를 받잖아요. 그 부분도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낮엔 직장인, 밤엔 운동선수
어느새 9년째 이어오는 댄스스포츠는 단순히 체력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자존감의 한 축이다. 휠체어 댄스스포츠는 선수층이 두꺼워 직업으로 돈을 받고 훈련하는 실업팀이 있지만, 시각장애인 댄스스포츠는 그렇지 못하다. 직장생활과 병행할 수밖에 없어, 퇴근하고 바로 달려와도 저녁 7시. 두 시간 연습하면 저녁이 다 간다. 연초엔 주 1~2회 연습하다가, 9월부턴 바빠진다. 11월 초에 열리는 대회를 앞두고 일주일에 두세 번, 혹은 주말까지 연습할 때도 있다.
2015년 처음 출전한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선 자이브 종목 은메달을 받았다. 2016년, 2017년, 2018년 연이어 자이브·파소도블레 두 종목 모두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코로나19로 경기가 없었던 때를 건너뛰고 2021년·2022년 또다시 자이브 종목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제 자부심의 하나가 된 거 같아요.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엄청나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사실 저 자신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동영상이나 사진을 본 사람들이 ‘엄청 연습 많이 했겠다’ ‘정말 대단하다’고 하더라고요. 가족한테 별 응원의 말을 못 들었는데, 금메달 두 개(상금 50만원씩)를 따서 어머니께 상금 100만원을 갖다드리니 좋아하시더라고요(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2021년 10월에 열린 전국장애인체육대회. 2년 만에 찾아온 경기는 방식이 달라져 있었다. 한 무대에 여러 선수팀이 출전해 다 함께 춤추는 방식이 아니라, 한 팀씩 등장해 춤을 선보여야 했다. 코로나19 예방 수칙 때문이었다.
“안대를 끼고 있는데도 갑자기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탁 켜지는 순간이 느껴졌어요. 조명이 뜨거워 피부로 느껴지거든요.”(이동현 선수)
“관중이 한 팀만 보고 있으니까 더 긴장됐어요. 차차차 종목을 먼저 했는데 생각처럼 잘 안돼서 동현 선수가 굉장히 낙심한 상태였거든요. 그 뒤 자이브 종목에서 그 낙심한 마음을 무대에서 다 분출했죠. 제가 봤던 동현 선수의 대회 중에 제일 높이 뛰어올랐어요. 그 때 정말 멋있었어요.”(안지현 선수)
대회 경쟁자가 늘면 좋겠어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 생활체육 증진을 위해 장애인스포츠강좌이용권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장애인이 접근 가능한 시설·강좌·지도자가 부족해, 아예 이용하지 않거나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아래 상자기사 참조) 이동현 선수에게 이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한국 등록장애인 수가 265만여 명(2022년)인데 ‘장애인스포츠 지도자가 더 많아진다면 장애인의 운동할 권리가 더 증진될 수 있지 않겠느냐?’
“글쎄요, 꿈만 같은 세상이네요. 그런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어요.(웃음) 그 꿈은 너무 크니까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인 거 같기도 하고. 저도 일반 헬스장에서 개인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있는데, 보통 장애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너무 쉽고 간단한 운동만 시키더라고요. 모든 장애 유형이 비슷할 텐데, 사실 일반 운동시설은 대부분 저희가 어울려 운동할 환경은 못 돼요. 그래서 장애인들은 복지관을 많이 찾아요. 장애가 생기면 뭘 선뜻 배울 용기도 나지 않거든요. 예를 들어 저는 드럼을 엄청 배우고 싶던 때가 있었어요. 배우려면 학원에 전화해서 ‘제가 악보를 못 보는 상황이다’ ‘어떻게 배워야 할까’ 등 이야기를 나눠야 할 텐데 선뜻 용기가 나지 않죠.”
그럼에도 그는 댄스스포츠를 시작하는 데는 용기를 냈다. 이 선수는 자신과 같은 장애인 댄스스포츠 선수가 많아져서 대회 경쟁자가 늘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은 패럴림픽에 시각장애인 댄스스포츠 종목이 없지만, 언젠가 생긴다면 나가고 싶다고도 했다.
“자신이 저시력이냐 전맹이냐 따지지 않고, 일단 한번 운동에 도전해보고 뭔가 느끼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몸을 직접 움직이고 나면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게 되고, 그럼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사람이 많아질 거예요. 만약 저를 보고 ‘한번 도전해볼까’ 생각하게 됐다면 지금 당장 도전해보세요. 고민하지 말고 댄스스포츠란 장르를 겪어보세요. 분명 뭔가 느껴지는 게 있을 겁니다.”
글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사진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한계를 마음대로 정하면 안 되는구나” 임채성 감독·안지현 선수 인터뷰
문화체육관광부가 2022년 발간한 ‘장애인 생활체육 조사 결과보고서’를 보면, 장애인 생활체육 완전실행자(주 2회 이상, 1회당 30분 이상 집 밖에서 운동)는 전체의 26.6%. 국민 생활체육 참여율(61.2%, 2022년 기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조사(표본 총 1만 명, 모집단 10~69살 장애인 159만7211명) 보고서에는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운동하지 않는 10대 장애인이 ‘운동하지 않는 이유’로 꼽은 1위는 ‘운동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23.6%)였지만, 2위는 ‘운동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16.9%)였다.
임채성 충남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 감독의 이야기도 비슷했다. 임 감독은 장애인 댄스스포츠 지도자·파트너가 많지 않은 상황이 장애인 댄스스포츠 발전의 걸림돌이라고 봤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아직 비장애인 선수들이 장애인 선수와 파트너가 돼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인식 자체가 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희 연습실의 프로 현역 선생님들은 장애인 종목도 다 하시는데, 보통은 본인이 하는 비장애인 종목에만 집중하거든요. 은퇴했거나 선수생활을 중지한 경우에만 파트너가 되는 일이 많고요. 선수생활을 할 때 영국 등 외국에 공부하러 갔는데, 외국엔 장애인 선수들이 댄스스포츠를 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나도 선수 은퇴하면 빨리 일반 선수와 더불어 장애인 선수도 지도해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임채성)
임 감독은 대학 시절 교양수업으로 장애인스포츠지도 과정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장애인 종목에 관심 갖게 됐다. 국가대표 라틴댄스 선수, 전국 댄스스포츠 선수권대회 프로 라틴 1위에 오를 정도로 선수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선수보다 지도자로서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청각장애인 수업을 할 땐 간단한 수화 정도는 직접 했고, 세밀한 설명이 필요할 땐 수화통역사와 수업을 진행했다. 휠체어 장애인과 수업할 땐 ‘키’를 생각하는 게 관건이다. 비장애인 선수 키가 너무 크면, 허리를 많이 숙여 구부정한 자세가 나오게 된다. 이동현 시각장애인 선수의 파트너 안지현 선수는 “그전까지 장애인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어 좀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고정관념이었다”며 “장애인 종목을 통해 ‘한계를 마음대로 정하면 안 되는구나, 하고자 하면 다 할 수 있구나’ 하는 걸 배웠다. 많은 분이 같은 걸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애인 댄스스포츠 선수들을 가르치면서 아쉬운 건 없었을까. 임 감독은 비용 문제를 꼽았다. 충남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은 충남장애인체육회에서 비용을 지원받아 대회를 치른다. 지원비가 적어 한두 번 치를 정도에 불과하다. ‘국가 지원이 늘었으면’ 바라는 이유다. 안 선수는 ‘아카이브 구축’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장애인 운동 관련 자료 자체가 많지 않은데다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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