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신문 등장한 1989년 영화…“김정은식 감성정치”
“저는… 여태 남편의 사랑 속에서 제 하나의 행복만을 즐기는…사회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인간으로 살아왔어요. 하지만 이제부터는…저도 생의 흔적을 남기고 싶습니다.”
“오직 당과 혁명을 위하여 한생을 깡그리 다 바친 사람만이 생의 고귀한 흔적을 후대 앞에 남길 수 있는 거요.”
“저는 이런 성장 과정에 비로소 개인을 위한 삶은 그게 부귀영화라 해도 그 가치는 바늘값만도 못하며 오직 사회와 집단을 위해 바친 삶만이 참으로 천금같이 귀중하다는 걸 생활의 진실을 통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25일자 4면에 실린 북한 예술영화 <생의 흔적> 대사이다. 노동신문은 이날 ‘천금같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생의 흔적>의 대사를 사진 한 장과 함께 게재했다. 별다른 해설은 없었다.
해당 기사는 북한 매체들이 연말 노동당 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연일 경제성과 홍보에 집중하는 가운데 실렸다. 부진한 경제실적에 따른 민심이반 기류를 다잡기 위해 향수에 호소하는 ‘감성정치’의 일환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생의 흔적>은 1989년 제작된 2부작 영화이다. 인민군 군관(장교)과 결혼한 여주인공이 남한의 해상도발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남편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농사일에 몰두, 협동농장 관리위원장까지 승진한다는 ‘노력영웅’ 이야기다. 한순희 숙천군 성남협동농장 관리위원장을 모델로 만들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진정한 애국자란 명예와 보수를 바라는 것이 없이 조국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남겨 유명해졌다. 북한 민중 사이에서도 사회주의 공동체 안에서 당에 헌신하던 시절로 기억하는 1960~198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로 유명하다.
한순희의 실제 남편은 숙천군 농업 간부를 지내다 병사했다. 남편의 뒤를 이어 농업에 매진하다 노력영웅이 된 한순희는 1997년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농업담당 비서 서관히가 1990년대 식량난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간첩으로 몰릴 때 그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함께 간첩으로 몰렸다. 김정일 위원장 지시로 2000년 복권됐다.
노동신문의 보도를 두고 경제분야의 부진한 성과에 따른 위기감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 당국이 법으로 사회 통제의 고삐를 죄는 정책과 당에 헌신하는 삶의 자세를 감성적으로 강조하는 감성 정치를 병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올해 북·러 정상회담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군사정찰위성 발사 등 외교·군사 분야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민생과 직결되는 경제 분야에서는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농업진흥청에 따르면 올 한 해 북한에서 생산된 식량작물은 총 482만t으로, 2022년도 451만t보다 31만t(6.9%)이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021년도 469만t에 대비 약 2.7% 증가에 그쳤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가 규정한 총수요량인 550만t 대비 75만~85만t 가량이 부족하다고 추정된다.
해외 파견 노동자를 한꺼번에 송환하면서 북한 당국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해외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6~7년 간 살던 노동자들이 민심 이반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이다. 북한 당국이 송환 노동자를 상대로 한국 드라마 시청 여부 등을 조사한다는 보도도 나온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선대에 비해 정치적 권위가 취약해 성과가 중요하다”며 “핵은 개발했지만 이로 인해 경제가 왜곡됐고, 북한 당국으로서는 조마조마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위기 국면에서 ‘인민이 체제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과거’를 소환하는 김정은식 감성정치”라고 분석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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