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적 고물가 아르헨, 현재의 10배 이상 초고액권 화폐 발행 검토
이달 초 출범한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가 현재 최고액권인 2000페소보다 10배 이상 액면가가 높은 초고액권 지폐 발행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살인적인 물가와 외화 보유액 고갈로 아르헨티나 통화인 페소화 가치가 대폭 하락하자 급한불 끄기에 나선 것이다. 세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하며 고공행진 중인 아르헨티나 물가는 새 정부 출범이 이후 더욱 치솟으며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25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매체 클라린 등은 밀레이 정부가 2만 페소와 5만 페소짜리 지폐를 발행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아르헨티나 최고 액면가 지폐는 2000페소로 공식 환율로 환산하면 2.43달러(3166원), 아르헨티나 국민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비공식 환율 시세로는 2달러(2600원) 정도다.
1991년 화폐개혁 당시 페소화의 가치는 ‘1페소=1달러’였지만 아르헨티나가 만성적인 경제 위기를 거치며 달러화 대비 가치가 급락했다. 경제 상황이 안정적이었다면 현재 260만원에 상응해야 할 2000 페소의 가치가 1000분의 1로 떨어진 것이다.
이에 신규 고액권 발행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으나 물가 상승을 부추기고 탈세와 돈세탁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며 구체화하지 못했다.
밀레이 정부는 경제난 극복을 위해 화폐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페소화 가치 하락으로 국민들이 지폐 사용에 불편을 겪고 있을뿐만 아니라 지폐 운반과 보관 등에도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선에서 페소화를 폐지하고 달러화를 도입하겠다고 주장한 밀레이 대통령은 우선 페소화의 가치하락을 인정하고 이를 유지하면서 고액 액면가 지폐 신규 발행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인 산티아고 바우실리는 당초 5000페소와 1만 페소 지폐의 신규 발행을 고려했으나 추가 물가 인상 가능성을 고려해 2만 페소와 5만 페소 신규 지폐 발행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다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다만 실제 유통까지는 최소 6개월 이상 걸릴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중국에서 생산한 2000페소 지폐 4억장에 대한 대금조차 지불하지 못할 정도로 재정 상황이 어렵다. 이런 상황을 감안했을 때 신규 고액면가 지폐가 시중에 유통되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지난달 전년 대비 160%까지 치솟은 아르헨티나의 물가는 밀레이 대통령이 취임 직후 단행한 경제 개혁 정책의 여파로 초고속 상승하며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경제난 해결을 위한 ‘충격 요법’을 예고해 온 밀레이 대통령은 지난 13일 자국 페소화 환율을 한 번에 54% 평가절하하고 에너지 및 교통 보조금 등을 삭감하는 등 단기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수출 경쟁력을 강화하고 만성 적자를 해소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이는 가뜩이나 악화한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부었다. 페소화 평가절하가 실질 구매력을 떨어트리며 고물가에 신음하던 서민들이 더 큰 물가 상승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뉴욕타임스(NYT)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의 대명사가 된 아르헨티나의 사람들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데 익숙하지만, 새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삶은 더 고통스러워지고 있다”고 짚었다.
아르헨티나 매체 인포배에 따르면 페소화 평가절하 일주일만에 쌀과 빵, 우유 등 주요 식료품 가격이 50% 급등했다. 최근 2주 사이 아르헨티나의 기름값은 약 60%, 소고기 가격은 70% 뛰어올랐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고등학교 철학 교사 페르난도 갈리(36)는 NYT와 인터뷰에서 “이런 일은 겪어본 적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 18개월 딸의 기저귀를 더 저렴한 것으로 바꾸었다”며 “페소의 가치가 더 하락하기 전에 월급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사러 가야한다”고 말했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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