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2024년, 대한민국 정치의 품격과 비상을 바라보며
2024년은 육십갑자의 시작인 청룡(靑龍)의 해다. 용은 형이상학적 영물이다. 용은 낙타의 머리, 잉어의 지느러미, 악어의 이빨, 사자의 발톱 등을 형상화 해 있다. 56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중국은 이러한 용을 국가적 상징으로 한다. 이는 곧 통합과 화합, 조화의 상징인 것이다. 새해는 용이 표상하는 바와 같이 통합과 화합의 해가 되길 소망한다.
정치는 심산유곡(深山幽谷)에 핀 순결한 백합꽃이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과도 같다. 흙탕물이 사사로운 이익이라면 연꽃은 정치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대의(大義)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대의이며, 대의는 곧 국가공동체의 존재 이유다. 국가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이 민주주의의 대의이자 가치다. 국민 모두가 대한민국호라는 한 배에 타고 목적지를 향하여 항해할 때,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나오지 않도록 한 뜻으로 함께 노를 저어 나가는 것이 가치 있는 정치의 역할인 것이다.
무릇 정치가는 사사로운 이익에 앞서 의로움을 먼저 생각하는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자세를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의 본령이다. 정치의 본령은 물 위에 흐르는 포말의 거품이 아니라 묵묵히 저변에 흐르는 소리없는 소리가 그 본질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정치에는 각자도생의 이전투구 속에서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밸리즘만이 판친다. 오로지 진흙탕의 탁함만이 있다. 민주적 가치는 그저 관념의 유희로 전락한 요즈음이다. 국정철학의 빈곤과 가치의 쇠락 때문이다. 국가공동체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가치와 이를 매개하는 국정운영에 관한 정립된 철학, 그리고 권력에 뒤따르는 책임의식이 사라진 자리에는 야만에 가까운 정치술만 남았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와 금리, 저성장의 늪에 빠져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무능 앞에서 정치가 이전투구를 벌이는 소인배로 비춰지는 것은 당연하다. 작금의 우리 정치를 아무리 좋게 봐줘도 사람만 바뀐 그 나물에 그 밥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정치에 대한 혐오가 득세한다. 분별하는 힘이 약해졌을 때 편견은 강해진다. 그러나 여기에 상생과 사회적 선순환, 분별을 제공해야 하는 정치의 역할은 찾아보기 어렵다.
바야흐로 정치 부재의 시대다. 정치에 대한 냉소가 가져오는 강한 독성은 결국 민주주의를 병들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정치의 반면교사이며, 우리가 의(義)를 가치의 중심으로 놓는 정치를 추구해야 하는 당위적 근거다.
평범한 사람들은 쉬운 것을 좇는다. 필부(匹夫)의 길이다. 정치가 민의의 총체이자 의를 실현하는 매개라면 그보다는 차원 높은 것을 다뤄야 한다. 영원에 사는 것은 오로지 정신이다. 정치의 지향이 바로 그것이다. 곧 시대정신이다.
시대정신은 대의이지, 기술이 아니다. 기술은 피상의 표피 위에서 기만적 눈속임을 벌이다 이내 사라지는 허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시대정신은 한 시대의 세상을 이끄는 주류적 정신이다. 시대정신은 그 자체로 주류다. 주류 세력이 주창하는 것이 시대정신이 아니라 시대정신이 있는 곳에 힘이 존재하고 주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주류 세력이 시대정신을 따르면 주류가 되는 이치다.
시대정신은 과거의 궤적과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혁신을 잉태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민주화와 산업화 이후 새로운 시대정신이 요구된다. 동시에 우리 정치는 국가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우선 국가경제의 성장동력 확보다. 세계는 대전환 시기를 마주하고 있다.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20여년 전 '제3의 물결'의 세계적 흐름 속에서 과감한 정보기술(IT)인프라 구축을 통해 IT선도국가로 거듭났다. 다시 세계는 대전환의 시기를 맞이 하고 있다. 담대하면서도 과감해야 한다. 포스트코로나 이후 4차 산업혁명으로 세계질서의 재편이 이뤄지는 흐름 속에 국가차원의 발빠른 대응이 절실하다.
다음은 공정의 회복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공정의 지향점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코로나19를 겪으며 부의 편중이 심화되고 계층간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격화된 불평등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국민이 갖는 억울함을 해소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가 직면한 개혁과제다. 이러한 개혁은 훼손된 공적가치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우리공동체의 존립 목적과 근거를 되찾는 데 주안점이 있다. 시대정신을 철저히 반영하되 사람 본위의 실용주의가 적용돼야 한다.
한반도의 생존과 평화, 군사안보·외교에서의 실사구시도 시대정신의 한 축이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책임국가로서 항구적 평화의 기틀을 다져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과거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근래 미중 갈등, 최근에 이르러서는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립 심화로 이어지고 있다. 낙관적 희망보다 냉정한 현실을 인정하되 호전적 대응을 통한 군사대립구도의 격화를 경계해야 한다. 여기에는 강한 책임의식이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가 주인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한반도의 주권국가이자 책임국가로서 주인의식을 지니고 공동체의 안녕과 구성원의 안전을 담보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정신의 실현에 있어 정치근본주의(Political Correctness)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도 짚는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는 우유를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 다양성과 사회 각 주체들과의 조화가 전제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꽃잎은 화려하지만 금세 진다. 반면 정신은 보이지 않지만 깊게 뿌리내리는 법이다. 권력은 유한하고 국민 속에 뿌리내린 시대정신은 영원하다. 곧 정치의 지향이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 청룡의 해, 대한민국 정치의 품격과 비상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우리 국민과 전자신문 독자께 삼가 새해를 축하드린다.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 intoan429@gmail.com
〈필자〉전북 고창 출신으로, 성균관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8~21대 국회의원직을 이어 오고 있으며, 상임위로는 외교안보 분야 전문성을 쌓고 있다. 민주당 전신인 평화민주당 공채 1기로 정치에 입문해 원내수석부대표, 전략홍보본부장, 서울시당위원장,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본부 조직2국장,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무본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국회 활동을 하면서 해외 의회와의 친선 교류에도 힘썼다. 20대 국회에선 한·베네수엘라 국회의원 친선협회장, 한·중 국회의원 외교협의회 부회장, 한·노르웨이 국회의원 친선협회 이사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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